664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32)
세르펜스는 유지스의 머리에서 손을 거둔 후, 곧바로 달고나 만들기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면서 내게 잘 지켜보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와···, 달고나를 만드는 동작이 저렇게 우아할 수도 있는 건가?'
얼굴이 받쳐주고 몸가짐까지 바르니 뭘 해도 예술이다.
귀족들이 보면 달고나 만들기를 필수 교양에 포함시켜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설탕을 젓는 세르펜스의 손놀림에서 고상한 품격이 느껴졌다.
그렇게 감탄을 거듭하다 보니, 세르펜스의 첫 달고나 만들기는 어느새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녀석은 눌러 편 달고나 위에 쿠키 커터로 모양을 찍었다.
제법 힘을 줘서 찍었는지, 고양이 형태의 윤곽선이 매우 선명하게 새겨졌다.
세르펜스는 그렇게 완성된 달고나를 스크래퍼로 떠올려, 내 쟁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직접 만든 간식이니까, 이건 세르펜스가 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꼭 당신이 드셔 주셨으면 합니다. 제겐 그쪽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내 물음에 기특펜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보다 많고 많은 쿠키 커터 중, 고양이 모양을 고르다니···.'
평소라면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이었으나 지금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만약 실수로라도 이것을 부수면 세르펜스의 동심까지 바사삭 부서질까 봐.
어차피 먹으면 부서진다는 건 똑같지만, 떼어내다가 고양이 목이 뚝 부러지는 것과 먹는 건 그 느낌이 다르다.
나는 바늘을 들고 신중하게 달고나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끝 감각에 집중하며, 바늘에 힘을 준 바로 그 순간.
- 쩌적─.
고양이 모양이 깔끔하게 분리되어 떨어졌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성공하셨으니, 제게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소원을 빌 권리는 내게 주어졌건만.
어째서인가 세르펜스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기대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 자식, 일부러 그랬구나!'
어쩐지 자국이 무척이나 선명하고, 달고나를 옮기는 세르펜스의 동작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더라니.
내가 절대 실패하지 않도록, 톡 건들면 알아서 분리될 정도로 자국을 깊게 새긴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녀석이 이런 짓을 하게 된 원인 또한 분명했다.
유지스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사리사욕을 채우자, 그걸 보고 따라 한 걸 테다.
"유지스, 이거 어쩔 겁니까? 아이가 보고 배웠잖아요."
"소원을 말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 양쪽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요?"
"······."
"저도 세르펜스가 만든 달고나를 먹고 싶으니, 빨리 소원을 빌어주세요."
유지스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애초에 사심이 가득한 사람과 소원 들어주기 놀이 같은 걸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어 세르펜스에게 건네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까 녀석이 쓰다듬어 한껏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가리켰다.
"빗겨주세요."
"고작 그런 거로 되겠습니까?"
"그럼 헤어 세팅까지 부탁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세르펜스가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봐주겠다.'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 조건 속에서, 대체 무슨 거창한 것을 바란 건지 모르겠다.
내가 혀를 내두르거나 말거나.
녀석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헤어 왁스까지 꺼내며 활활 의욕을 불태웠다.
왁스를 전혀 쓰지 않는 세르펜스가 그것을 꺼내 들자, 에일리히와 알타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루미나티 단원들은 그냥 분장용 소도구의 일종이겠거니 생각하며 넘어갔다.
세르펜스가 얼마나 설정 놀이에 진심인지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노예상 놈들을 잡으려고 함정 수사를 펼칠 때, 세르펜스가 내 머리에 왁스 떡칠을 해 놨었는데···. 곱슬머리인 게 티가 안 날 정도로 왁스를 처발라대서, 머리 감느라 꽤 고생했었지?'
그때 이후로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계속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다.
괜히 녀석에게 헤어 스타일링을 맡겼나 싶지만, 아이가 부모님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을 무시하고 세르펜스가 만든 달고나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자 노력하며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지스는 세르펜스 말고는 무언가를 시키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설탕에 절여놓은 유자를 꺼냈다.
그러더니 그 위에 달고나를 끼얹어 도전적이고 새로운 디저트 제작을 시도했다.
'무엇이 유지스를 저렇게 만든 거지? 맛은 있을까?'
머릿속에 호기심이 떠올랐지만, 그리 관여하고 싶지는 않아서 못 본 척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에일리히는 세르펜스와 교환하기 위해 두 번째 달고나를 만드는 중이었고, 알타르는 달고나를 만들어 모양도 안 찍고 그냥 먹고 있었다.
어차피 소원을 빌어 봤자 상쇄될 뿐이니, 에일리히에게 무언가 시키는 건 포기했나 보다.
에드나는 자신이 만든 달고나를 열심히 바늘로 찔러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문제집 풀이에 열중하는 모범생처럼 보였다.
달고나 만들기가 재밌으면 나중에 아니마와 하고 싶다더니, 미리 연습하고 있는 건가 보다.
심지어 이미 한 번 실수했는지, 입에 깨진 달고나 조각을 하나 물고 있었다.
"에드나 씨. 그거 잘게 부숴서 카페라떼나 그냥 우유에 타 마시면 맛있어요."
"엇, 그래요?!"
에드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빈 병을 꺼내어 깨진 달고나 조각을 담았다.
나는 에드나에게 팁을 하나 전수하고, 마지막으로 윈스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는 참가에 의의를 두기라도 한 것인지 달고나를 하나만 만들어 두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달고나 만들기를 즐기고 있거늘.
윈스톤 혼자만 즐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세르펜스가 머리 손질만 끝내면 바로 달고나를 만들어서 윈스톤이랑 교환해야지.'
녀석은 아직도 내 머리를 만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내 뒤에 서서 빗질하더니, 이제는 앞쪽에서 기웃거리며 앞머리를 건드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스타일을 만들려고 이러나 싶다.
"다 됐습니다."
드디어 세르펜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달고나를 먹다가 손이 끈적이면 닦으라고 준비한 물수건으로, 왁스 묻은 손을 닦았다.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니 포마드 머리를 한 시온의 모습이 보였다.
곱슬기 때문에 깔끔하지는 않지만, 살짝 웨이브가 져서 오히려 자연스럽고 멋스러웠다.
저번에 왁스를 떡칠해서 촌스러운 올백 머리를 만든 건 그냥 캐릭터 설정이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누가 보면 어디 파티라도 참석하는 줄 알겠네.'
나중에 악숭이들을 물리치고 황실 연회에 참석하게 되면, 세르펜스에게 헤어 스타일링을 부탁해야겠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괜찮네요."
내 대답에 세르펜스가 활짝 웃어 보인 뒤, 유지스에게 줄 달고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도 국자에 설탕을 담아 녹이며 윈스톤에게 선전포고를 던졌다.
"윈스톤! 저랑 달고나 교환합시다. 식어서 딱딱한 거 말고, 새로 만들어서 따끈한 거로 주세요!"
"미리 말해두건대, 선배가 성공하면 내 소원은 선배의 소원을 취소하는 데에 쓸 거요. 그리고 만약 선배가 실패하고 나 혼자 성공한다면 팔굽혀 펴기를 100번 시킬 테니 그리 아시오."
윈스톤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오싹한 소리를 해댔다.
자신은 무조건 성공할 거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말이었다.
'에일리히 님께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기셨네.'
사심 가득한 유지스가 끼어있는 이상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다음에도 이런 소원 들어주기 놀이를 할 일이 생기면, 소원 취소는 미리 규칙으로 막아둬야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윈스톤에게 시킬만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방금 그 제안은 취소할게요."
"그거 아쉽구려."
그렇게 말하는 윈스톤의 얼굴은 그다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쉬워할 거면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도 않았겠지.
'그냥 혼자서 달고나 빵이나 만들어 먹자···.'
소원 들어주기는 어디까지나 작은 여흥이었을 뿐이다.
오늘 간식 시간의 주인공은 '달고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냥 달고나를 만들 때보다 식소다를 조금 더 넣어 섞고, 국자 아랫부분을 골고루 달군 뒤.
한껏 부풀어 오른 달고나를 설탕 위에 툭 치듯 털어냈다.
그러자 잔여물 없이 국자에서 달고나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그건 다른 겁니까?"
달고나 빵 위에 설탕을 잔뜩 끼얹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관심을 보여왔다.
자신이 유지스에게 넘긴 달고나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가 보다.
사실 나도 안 궁금하다. 보나 마나 모양대로 깔끔하게 떨어져 나오겠지.
"이건 달고나 빵이라는 건데, 이것도 한번 드셔보실래요?"
세르펜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녀석에게 달고나 빵을 넘겼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쫀득, 촉촉해서 단맛이 더 진득하게 들러붙는 느낌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묻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감상평을 말했다.
마음에 드는가 보다.
"다 했어요, 세르펜스!"
그새 뽑기에 성공한 유지스가 의기양양하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앞에는 고양이 모양으로 깔끔하게 떨어져 나온 달고나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고양이를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삼은 모양이다.
"제 소원은 세르펜스가 이 대사문을 읽어 주는 거예요! 실감 나는 연기를 곁들여서!"
유지스가 책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짚으며 말했다.
설정극을 좋아하며, 툭하면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는 유지스다운 소원이다.
펼쳐진 페이지를 눈으로 대충 훑어봤을 때.
서브 남주로 추정되는 남자 캐릭터가 여자 주인공 대신 악숭이의 공격을 맞고, 죽어가면서 남긴 대사인 듯하다.
내용을 확인한 그 즉시.
세르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유지스를 향해 뻗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크윽···. 황실의 기사 단장이며 항상 냉철한 판단을 해온 내가 어째서, 하악···. 탐정이라 자칭하고 다니는···. 너 같이 수상한 인물을 지키기 위해, 악마 숭배자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무모한 짓을···."
황실의 기사 단장이 민간인 보호에 힘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내 상식 안에서는 그러한데 저 소설을 쓴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본인이 냉철하다고 자화자찬하며, 죽는 순간 자기소개를 하는 걸 보면 그냥 저 캐릭터가 특이한 건가 싶기도 하고.
고작 한 페이지를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는 뭐라 단언하기 어렵다.
"하아, 하아···. 루비안느···. 너는 이 세상의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목표라 하였지···? 내게는, 윽···. 네가 가장 큰 수수께끼였다. 대체···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내게 너는 무슨 의미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면, 부디···. 내게 그 답을···."
조연은 주인공에게 미처 답을 듣지 못한 채 숨을 거뒀고, 세르펜스는 손을 뚝 떨어뜨리는 동시에 앞으로 고꾸라질 듯 힘없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5초 정도 기다렸다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마음에 드셨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완전 마음에 쏙 들어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저 두 사람 눈에는 황당한 표정을 한, 전현직 이단 심문관 두 명이 뵈지도 않는가 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달고나 빵을 새로 만들어 먹었다.
"그건 그렇고···.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악마 숭배자들과 싸우는데, 저희는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소설 내용이 마음에 걸렸는지 알타르가 떨떠름한 얼굴로 질문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륙 사람들은 악숭이들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며 덜덜 떨고 있을 터.
우리가 장난치며 웃고 떠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단 심문관으로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모양이다.
나는 휴식과 스트레스 해소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닫았다.
아직 세르펜스와 달고나를 교환하지 못한 에일리히가 알타르의 정강이를 걷어차서, 그를 닥치게 했기에.
내가 알타르를 설득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