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35)
* * *
오늘의 일정은 대체적으로 어제와 비슷했다.
'복도에서 잠깐 제온과 만나서 어제 그린 도안과 함께, 그 사이에 쪽지를 끼워 넣어 건네긴 했지만···.'
이건 일정이라고 하기 뭐하니까 제외하고.
그 밖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점심 식사 후 방에서 쉬다가 집무실로 간 게 아니라,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간식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다.
오늘의 간식은 바로 스트룹 와플과 따뜻한 커피, 혹은 우유다.
내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 위에 뚜껑을 덮듯이 와플을 올리자, 세르펜스가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따라 했다.
따뜻해진 와플을 먹어보면, 녀석은 필시 너무 달고 맛있어서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뜰 테다.
그럼 캐러멜 시럽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겸, 어제 깜박했던 얘기를 꺼내야겠다.
"가만 보면 알타르 님은 에일리히 님과 굉장히 친하신 것 같던데, 원래 이단 심문관들끼리는 다들 친해요?"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와 에일리히 님은 주요 활동 지역이 겹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교류가 잦았을 뿐. 심하면 같은 이단 심문관이라 하더라도, 서로 얼굴 한 번 못 보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럼 두 분처럼 특별히 친한 경우는 별로 없다는 거네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그렇죠."
내 물음에 알타르가 술술 대답했다.
가볍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에일리히 또한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하다.
"그 이런저런 일이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단 심문관들은 후계자를 한 명씩 거두는 건 알고 계시죠?"
질문에 질문이 돌아왔다.
예전에 세르펜스에게 벼락치기로 신학 수업을 들었을 때, 이단 심문관의 성(姓)이 일인 전승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성을 물려주신, 선대 악스트 이단 심문관님께는 본래 다른 후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임무 도중 돌아가시게 된 겁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선대께서 노쇠하여 은퇴를 앞둔 시점에. 물론 은퇴한다고 해서 '누구처럼' 성직자 자체를 때려치우는 건 아니지만···."
알타르가 설명을 잠시 멈추고 에일리히를 째려보았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에일리히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안면을 몰수하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카 앞에서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치기 싫었나 보다.
"저는 후계자 교육이 다 끝난 시점에서 은퇴했습니다. 그러고도 교단을 나오기 바로 전날까지 창술을 봐주고, 인수인계까지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지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생색내시는 겁니까?"
에일리히의 변명에 알타르가 정론으로 맞받아쳤다.
만약 에일리히가 후계자를 미리 키워놓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까지도 교단을 나오지 못하고 후계자 교육에 힘쓰고 있었을 테니.
곧바로 창을 물려주고 은퇴할 수 있는 후계자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건, 에일리히 본인에게나 다행한 일이었다.
실로 정당하고도 합당한 알타르의 얘기에 할 말을 잃었는지, 에일리히는 공연히 커피를 홀짝거렸다.
탁월한 판단이다.
여기서 반박하며 변명을 이어나가 봤자, 구차해질 뿐이니까.
"아, 그렇다고 에일리히 님께서 잘못하셨다는 건 아닙니다. 교단을 나가신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감 때문이었고···. 저는 이단 심문관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에일리히 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조카 앞에서 에일리히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는지, 알타르가 그의 기를 살려 주었다.
비록 병 주고 약 주는 그림이긴 하나, 시말서를 쓰게 된 것에 대한 사과도 받지 못했는데 저렇게 두둔해 주다니.
존경한다는 그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다.
"말하다 잠시 끊겼는데, 제가 실무 경험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 바로 에일리히 님이셨습니다. 선대께서 제게 무기술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현장에서 실무 교육을 직접 하시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던지라···."
이단 심문관은 교단에서 가장 위험한 일과 제일 더러운 일을 도맡았다.
더러운 일에 해당하는 고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위험한 현장에 기력이 쇠한 노인과 초짜가 함께 나섰다간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
그러다 자칫 잘못해서 둘 다 죽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로 큰일이다.
"그래서 할버드와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쓰시는 에일리히 님께서 현장 교육을 담당해 주신 거로군요!"
"네. 마침 에일리히 님께서 경험과 실력을 고루 갖추셨으면서, 아직 후계자도 들이기 전이었던 터라. 따라다니며 많이 배웠습니다."
눈치 빠른 유지스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알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쩐지 전투 합이 잘 맞고, 건포도를 좋아한다는 사소한 입맛까지 꿰고 있더라니.
알타르에게 에일리히는 직장 동료이자,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거다.
'에일리히 님이 은퇴한다고 했을 때, 엄청 서운했겠는걸?'
작년 이맘때 쓴 시말서 일로 아직도 꽁해 있는 게,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에일리히를 알고 싶어서 말을 꺼냈는데 엉뚱하게도 알타르에 대한 이해도만 올랐다.
유일한 수확이라고는 알타르가 에일리히와 생각 이상으로 오래된 사이라는 것뿐이다.
현재 그의 나이가 서른여덟이니.
대충 어림잡아 그가 스무 살 때 이단 심문관이 되었다고 치면, 18년이나 알고 지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무슨 질문을 던져야 수상하지 않게 에일리히 님에 관한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으려나?'
나는 그런 고민을 하며,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그건 그렇고 이단 심문관은 파견직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활동 지역이 계속 겹쳤나 봐요?"
"그런 게 아니라, 먼 곳으로 파견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가끔 출장을 다녀오긴 했지만, 에일리히 님께서는 이단 심문관 중 가장 고뭌···!"
알타르가 대답을 하는 와중에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에일리히가 손날로 그의 목울대를 친 탓이다.
말이 도중에 끊기긴 했지만, 중요한 키워드는 이미 다 나왔다.
이단 심문관들 중 에일리히가 가장 잘하는 것.
제자 같은 후배의 목을 후려치면서까지, 세르펜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단어.
그건 바로 '고문'이었다.
'종교 재판 때문에 대신전으로 이송된 이단자들을 심문해야 하니까, 계속 제국 수도에서 머무르셨나 보네. 알타르 님은 그런 에일리히 님에게 실무 교육을 받았으니, 다른 곳에서 잡힌 이단자들을 심문하러 출장 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한 걸 테고.'
그렇다는 건 에일리히가 은퇴한 현재, 교단 제일의 고문 전문가는 알타르라는 뜻이 된다.
아무래도 질문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가, 갑자기 왜 때리시는 겁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툴툴거리는 알타르와 그에게 눈치 주는 에일리히에게서 잠시 신경을 끄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그러자 즉시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자신을 쳐다볼 줄 알았나 보다.
세르펜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에일리히의 특기에 관한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새삼스레 충격받거나 겁먹지 않으니.
'···자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라는 건 아는데, 어떻게 그래?!'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자리에서 세르펜스가 전대 공작에게 학대를 넘어선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나와 에일리히 뿐이니까.
"네, 이제 먹어도 됩니다."
앞뒤 맥락과 상황을 전부 갖다 버린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세르펜스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나를 쳐다본 건 언제쯤 와플을 먹어도 되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였다고 주장이라도 하듯.
세르펜스는 냉큼 잔 위에 올려놓았던 스트룹 와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잔 위에 너무 오래 와플을 방치한 탓일까?
녹은 캐러멜 시럽이 주욱 늘어났다. 그 모습이 마치 거미줄 같다.
당황한 세르펜스가 와플을 들지 않은 쪽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긴 하지만, 기대했던 대로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긴 했다.
"어때요? 맛있죠?"
내 물음에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분이 들어가서 그런지 표정이 확 밝아진 느낌이다.
녀석은 와플 하나를 눈 깜짝할 새에 먹어 치우고,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을 겁니다."
나는 내 잔 위에 올려진 와플을 반으로 쪼개서, 절반을 세르펜스에게 건넸다.
녀석은 내게 받은 와플을 우유에 살짝 담갔다가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관심이 고문이란 단어에서 와플로 완전히 이동한 것이다.
와플 반쪽을 다 먹고 커피로 입안을 말끔히 씻어내고 나자,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내 잔 위에 새 와플을 올렸다.
이따가 또 반띵해서 줘야겠다.
"혹시 쑥스러워서 그러십니까?"
다른 대화 주제가 생각날 때까지 신경을 끄고 있으려고 했는데, 알타르의 말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고개가 홱 돌아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린 조카 앞에서 '최고의 고문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숨기려 하는 건, 그 일의 잔인함 때문 아닌가?
알타르 이단 심문관이 고문을 즐기는 변태 사이코패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듯하다.
모두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유지스는 팔을 뻗어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윈스톤은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알타르를 경계했다.
그리고 에드나는 오른손으로 스태프를 넣어둔 왼팔 소매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요?"
평범하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모두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자 알타르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막 '악스트'라는 성을 받고 에일리히 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에일리히 님께서는 이미 그쪽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오르신 이후였습니다. 하나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만."
에일리히가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내리깔고 알타르의 말을 끊었다.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닌데도 위협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그 모습에 위축되어 마른침을 삼키려던 찰나.
언제 그런 무서운 얼굴을 했냐는 듯.
에일리히가 흠칫 놀라더니 소심한 표정으로 전전긍긍하며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놀라운 변화라, 방금 내가 보았던 에일리히의 모습이 정녕 현실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저는···, 듣고 싶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단다."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에일리히가 화들짝 놀라, 새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도 세르펜스는 고개를 저었다.
"백부님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과거의 일을 알아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나는 앞으로 그쪽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생각이니 몰라도 된단다."
에일리히가 세르펜스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표정만 보면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에일리히의 모습에 가장 당황한 건 알타르였다.
"혹시···, 제가 실수한 겁니까?"
"아닙니다. 괜찮으니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에일리히의 매서운 눈빛 탓에 알타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알타르에게서 답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세르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었다.
녀석은 에일리히를 향해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백부님께서 본격적으로 고문 기술을 갈고 닦게 되신 이유가 저 때문입니까?"
"네 탓이 아니란다, 얘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라."
"저와 연관된 건 맞습니까?"
"···그냥 내 욕심이고 미련이었단다."
그렇게 말하며 에일리히가 고개를 떨궜다.
사실상 긍정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