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70화 (670/925)

670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38)

* * *

아침 먹고 대련 구경하고, 점심 먹고 에일리히와 서류 작업을 하다가 간식을 먹고 이하 생략.

그렇게 비슷비슷한 나날이 일주일쯤 반복되었다.

악숭 세력이라는 불안 요소가 남아있는 만큼.

지금이 폭풍 전야가 아닌가 싶어 때때로 불안함이 찾아들긴 했다.

그렇기에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기보다는 평온했고, 이런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 똑똑똑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나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일리히도 서류 작업을 잠시 멈췄고, 내 옆에 앉아 명상 중이던 세르펜스도 조용히 눈을 떴다.

"아르케 왕국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들어와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제온이었다.

따로 설명할 내용은 없는지, 제온은 세르펜스에게 서류만 넘겨주고 나가보겠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에일리히에게는 가볍게 목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이와 항렬로 따지면 에일리히가 웃어른이었으니, 내가 살던 세상이었다면 버릇없는 놈이라 혼나 마땅한 행동이다.

하지만 에일리히는 그런 제온의 행동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모르긴 몰라도, 세르펜스보다 자신을 더 존중했다면 분명 화를 냈겠지.'

이 세상에서는 나이나 항렬보다 실질적인 권력이 우선시 되니까.

고작 인사에 불과할지라도, 프라시더스 가문의 가주인 세르펜스에게 더 예의를 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세르펜스가 장시간 공작가의 일에서 손을 떼고 자리를 비워도, 잡음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그나저나 아르케 왕국과 관련된 중요 정보라면···.'

가장 먼저 '닼숭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그 문제로 아르케 왕국까지 찾아갔지만, 결국 세계수와 엘프 왕에게 맡기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성검 일행은 테라룸 왕국으로, 우리는 제국으로 향했으니.

자신들을 방해할 자가 아르케 왕국에 없다는 확신을 갖고, 악숭 세력이 움직인 게 틀림없다.

'기껏 그곳까지 찾아가 놓고, 비극을 막지 못했다며 우리가 절망하기라도 바란 거려나?'

가짜 닼숭이를 미끼로 함정을 파서 그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세르펜스의 유일한 혈육인 에일리히를 납치하려 들어, 우리를 제국으로 돌아오게끔 유도한 뒤.

그러고 나서야 진짜 닼숭이를 움직였다면. 그것이 일련의 계획이었다면.

악숭 세력은 진짜로 악랄한 놈들이다.

'아니구나, 놈들은 원래부터 비열하고 악랄했지?'

나는 속으로 악숭이와 악마와 마왕을 싸잡아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유지스의 삼촌인 엘프 왕과 세계수를 믿어야겠지만, 안 좋은 상상이 먼저 고개를 치켜드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무슨 내용입니까?"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질문하자, 세르펜스가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직접 읽어보라며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녀석은 그새 다 훑어본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써진 건, 예상했던 대로 닼숭이에 관한 것이었다.

"닼숭이 잡았네요?!"

"그뿐만이 아니다. 계속 읽어 봐라."

내가 첫 단락만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세르펜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사건의 과정이 자세히 적힌 두 번째 문단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닼숭이가 붙잡힌 장소는 아르케 왕국의 수도인 디우실바 근처의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순찰을 하던 자경단원이 후드를 뒤집어쓴 낯선 엘프를 발견하고, 왕성에서 내려온 지침에 따라 후드를 벗기려 한 게 사건의 발단이다.

역안이라는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닌 닼숭이는 당연히 거부했고, 자경단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전개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귀가 밝은 엘프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들게 되어, 위기를 느낀 닼숭이가 착용한 후드와 마력 구속구를 벗어 던지고 전투에 임하려 했으나.

'본 실력을 채 내보이기도 전에 모여든 엘프들에게 다굴 맞고, 현장에서 즉각 사살당했다니···.'

걱정하며 마음 졸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다.

심문은커녕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기에, 닼숭이가 어떻게 강화된 입국 심사를 통과한 것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닼숭이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진실이 영영 묻혀버리는 건 아니다.

닼숭이가 나타나기 전날.

마물로 추정되는 거대한 새를 목격했다는 엘프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닼숭이가 마물을 타고 아르케 숲 어딘가에 숨어들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닼숭이 사건은 일단락된 듯했으나.

닼숭이에게 참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죽여버린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며, 비난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성검의 주인]에서 아르케 왕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닼숭이가 국가를 전복시킬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닼숭이는 다크 엘프가 되며 영혼에 크나큰 손상을 입었기에, 악마와 계약한 존재치고는 많이 약한 편에 속했다.

아르케 왕국이 국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닼숭이 그 자체가 아닌.

그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엘프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진짜로 경계해야 하는 건 바로 내부 분열이라는 뜻이지.'

그렇게 닼숭이의 죽음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나타나며, 사건은 절정을 맞이하는 듯했다.

어째서 '맞이했다.'가 아닌, '듯했다.'에서 그쳤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헛소리를 해댄 건 엘프가 아니라, 아르케 왕국에 눌러사는 인간들이었으니까.'

엘프들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건전한 시민 정신을 발휘하여 그들을 신고했다.

조사 결과 그들은 악숭 세력이 오래전부터 잠입시킨 바람잡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들을 일망타진한 것으로 결말에 도달하게 되었다.

'놈들이 악숭 세력의 끄나풀이란 사실도 모르고, 속아서 결혼했던 엘프들은 큰 충격에 빠졌겠지만···.'

그건 어떻게 보상할 수 없는 문제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래도 1회차와 2회차에 비하면 이웃이 남아있고, 엘프들은 다들 오지랖이 넓으니까. 서로서로 위로하며 마음을 잘 추스르겠지.'

서류를 끝까지 다 읽고 나자, 기쁨보다는 얼떨떨한 기분이 앞섰다.

너무 일이 잘 풀려서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다.

나는 다 읽은 서류를 다시 세르펜스에게 돌려주려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에일리히에게 갖다줬다.

"호오···. 악마와 계약한 자를 처치하고, 아르케 왕국에 숨어든 이단자들까지 걸러냈다니. 대단한 소득이구나!"

서류를 다 읽은 에일리히가 그것을 세르펜스에게 되돌려주며, 놀랍다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사실 놀라기는 내가 더 놀랐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성검의 주인] 시기의 아르케 왕국을 알고 있으니까.

'그랬던 아르케 왕국이 이제는 악숭이 청정 지역이 되었다니···!'

문서로 읽을 땐 실감이 안 났는데.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내용이 와닿았다.

지금 당장 유지스에게 알려주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유지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요?"

"알았다면 당장에 뛰어와서 우리에게 얘기했겠지. 잠잠한 거로 보아, 아직 모르는 듯하다."

대답하는 세르펜스의 표정과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았다.

닼숭이 건이 잘 해결되어, 유지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기뻤나 보다.

"간식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죠?"

"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군."

"오늘은 좋은 소식도 있으니, 그 핑계로 사람들을 모아서 조금 일찍 먹을까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는 고개를 큰 폭으로 끄덕거렸다.

나는 에일리히에게 뒤쪽에 늘어진 줄을 당겨 달라고 부탁했다.

줄을 당기고 조금 기다리니 제온이 다시 집무실로 찾아왔다.

"모두에게 할 얘기가 있으니, 지금 당장 응접실로 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간식도 바로 준비해 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세르펜스나 에일리히가 아닌 내가 지시를 내렸는데도 제온은 군말 없이 받아주었다.

응접실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알타르에게도 얘기를 해 둬야 하나 싶었으나 그냥 관뒀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간식을 가져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때까지 서류를 봐 두는 게 좋겠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갑자기 일이 잘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약 15분가량 집중해서 서류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세르펜스가 팔을 툭툭 쳤다.

다들 도착했으니까 우리도 이만 자리를 옮기자는 뜻이다.

응접실 문을 열자, 시녀들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직전에 간식을 가져다 뒀지만, 오늘은 갑자기 간식 시간이 앞당겨졌으니까.

그 탓에 이제서야 테이블 세팅을 하는 걸 테다.

세르펜스가 아몬드가 잔뜩 올라간 플로랑탱을 보고, 단 것인지 별로 안 단 것인지 가늠하는 사이.

시녀들은 프로답게 후다닥 제 할 일을 끝내고 조용히 물러났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유지스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질문했다.

정말로 아르케 왕국의 소식을 아직 모르나 보다.

사후 처리 문제로 아르케 왕실이 바빠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정신이 없었거나, 보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어느 쪽이든 세르펜스에겐 잘된 일인가?'

녀석은 자신의 입으로 유지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세르펜스에게 설명을 맡기겠다는 뜻을 전달한 뒤,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려있는 플로랑탱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파이지 부분은 바삭하고 그 위에 올라간 아몬드 누가는 쫀득해서, 상반된 두 가지 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거기에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함께 어우러지니.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참 다채로운 맛을 지녔구나 싶다.

내가 플로랑탱의 맛을 음미하는 동안, 세르펜스는 유지스를 비롯한 모두에게 아르케 왕국의 소식을 전했다.

간식보다 유지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을 우선시한 거다.

오늘 간식이 별로 안 달아 보이는 것도 한몫했지만.

한눈에 봐도 달고 맛있는 것이 나왔어도, 녀석은 소식부터 전했을 테다.

"정말요?!"

세르펜스의 설명을 모두 들은 유지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얘기가 사실이냐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재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뛸 듯이 기뻐하는 유지스를 보며, 세르펜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서류를 넘겼다.

직접 두 눈으로 사건의 전말을 꼼꼼히 읽어 보라는 의미다.

서류를 다 읽고, 유지스는 그것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안고 좋아라 했다.

그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 때문일까?

에드나가 잘 됐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윈스톤의 표정도 살짝 부드럽게 풀렸다.

"정말 고마워요. 이게 다 세르펜스와 시온, 두 분 덕택이에요."

"두 분이라니···.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유지스의 감사 인사에 세르펜스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닼숭이에 관한 일을 숨기다가 악숭이의 함정에 걸리기나 했지. 이번 일의 해결에 도움을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무것도 한 게 없기는요! 세르펜스는 제 삼촌에게 아주 중요한 조언을 해 주셨잖아요.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봐야 하며, 예의 그 다크 엘프를 발견하면 즉각 그자를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고요. 그 덕분에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린 거예요."

"유지스 말이 맞아요. 그러니까 세르펜스도 감사받아 마땅합니다."

유지스에 이어 나까지 나서서 맞장구를 친 후에야, 세르펜스가 안도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에일리히는 삼촌을 삼촌이라 부르는 유지스를 보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엘프 왕을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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