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72화 (672/925)

672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40)

{ 아, 미안. 불러놓고 딴소리 해서. }

다시 브로치에서 휴마누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대화가 진행되려나 보다.

{ 세르펜스, 네가 쓴 편지는 잘 받았어. 거기서 더 머물다가, 마르가리타 해안에서 합류하고 싶다고 했지? }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목소리 너머로, 아니마의 혼잣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대충 자신도 에드나가 쓴 편지를 잘 받았다는 내용이었는데, 더는 대화를 끊을 수 없으니 눈치껏 중얼거리는 선에서 끝낸 듯하다.

"상의도 없이 계획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실전 경험이 많은 이단 심문관들과의 대련을 통해, 실력을 더 키우고 싶어서 그런 거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나한테도 도움 되는 일인걸, 뭐.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서 어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

"네, 어떻게 하면 아군을 방해하지 않고 도움을 주면서 합공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대련을 하면서 개인의 단련뿐 아니라, 합격술(合擊術)에 관해서도 고민해 봤나 보다.

저번에 쌍둥이 악마들과 싸울 때, 휴마누스와 합이 안 맞아서 공격이 꼬였던 게 내내 마음 쓰였나 보다.

{ 그래? 기회만 된다면 나도 그 두 분과 대련해 보고 싶네. 스메른에 들르고 나서 시간이 있으려나? }

"성검의 주인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꼭 들러주십시오."

자신을 거론하는 휴마누스의 말에, 에일리히가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진심으로 조카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조만간 밥 한번 먹자.'와 같은 알맹이 없는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악숭이가 지금처럼 계속 잠잠하게 지내 준다면 또 모를까···.'

놈들이 계속 얌전히 지내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우리가 아르케 왕국의 닼숭이 사건을 뒤늦게 접했을 뿐, 진짜로 가만히 있어 준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각지대에서 악숭한 짓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휴마누스는 밝은 목소리로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한다고 대답하며, 에일리히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 세르펜스. }

"네, 말씀하십시오."

{ 우리 합류하는 거 말인데, 더 늦춰도 괜찮을 것 같아. 이제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까, 여차했을 때 합류하기도 쉽고. }

휴마누스가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러려고 통신 마법을 만든 게 아니라는 아니마의 절규가 들려왔다. 리에나와 푸로르가 아니마를 달래고자 애쓰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 과정에서 통신 마법을 유지하는 아니마의 집중력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브로치를 놓친 건지.

돌연 연결이 뚝 끊겼다.

빛을 잃은 브로치를 보며, 우리는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그렇게 얼마나 굳어 있었을까?

- 우우웅···.

에드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브로치가 깜박깜박 빛나며 진동했다.

반대쪽에서 연락을 시도하면 이런 식으로 알림이 오나 보다.

{ 미안해! 갑자기 통신이 끊겨서 당황했지? }

연결이 되자마자, 휴마누스가 사과부터 했다.

그새 한 명만 말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건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동료들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봤어야 했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상의 없이 내뱉은 거라서···. 하하하···. }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지만, 휴마누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는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결론은 나왔습니까?"

{ 너희랑 언제 합류할지 정하는 건데 우리끼리 결정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일단 네 의견을 들어보고 다시 얘기해보기로 했어. }

"으음···. 그런데 휴마누스는 어째서 합류 시기를 늦추자는 말씀을 하신 겁니까?"

{ 나보다 경험이 많은 에일리히 님과 알타르 님, 두 분을 동시에 상대하는 게 너에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돌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될 수 있으면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게 좋지 않겠어? }

세르펜스와 동행하는 걸 누구보다 반겼던 그가 합류를 늦추자는 말을 왜 하나 했더니.

이제까지 세르펜스가 그나마 긴장할 수 있는 대련 상대는 휴마누스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현직 이단 심문관과의 1:2 대련이라는 새로운 수가 생겨났으니.

실력과 경험. 모든 것이 부족한 자신과 대련하는 건, 세르펜스의 발목만 잡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 당연히 나도 실력을 쌓아야겠지만, 나한테는 '그 방법'이 있잖아? 스메른 왕국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그럭저럭 너와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

스메른 왕국에 가서 첫 번째 용사의 무구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 하고.

2회차의 기억을 통해 간접 경험을 쌓고 나면, 그때 같이 다니며 대련을 하자는 얘기다.

그 뜻을 이해할 턱이 없는 에일리히와 알타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본래 성검의 선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세르펜스라는 것. 그리고 이전 회차에 관한 것까지 전부 말해야만 한다.

'그런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생각을 묻는 휴마누스의 말에 진지하게 고민 중인 세르펜스를 제외한, 나와 유지스, 윈스톤, 에드나는 플로랑탱을 하나씩 집어 들고 오독오독 씹어댔다.

그렇게 우리는 의문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외면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딴짓을 했다.

{ 어? 갑자기 이상한 잡음이 들리는데,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야? }

{ 그냥 뭔가 먹고 있는 거겠지. 우리랑 지낼 때도 이 시간 즈음이면 시온이 간식을 나눠주곤 했잖아. }

휴마누스의 물음에 대답한 목소리는 푸로르의 것이었다.

그녀는 정확하게 우리의 상황을 파악하고 답변해준 뒤, 그대로 발언을 종료했다.

그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세르펜스는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음···. 생각해 봤는데, 역시 동의할 수 없습니다."

{ 그러니까···. 그때가 되어도 네 실력에는 못 미칠 거라는 뜻이야? 아, 그렇겠네. 그때까지 네가 노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대련하면서 실력을 키웠을 테니···. }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휴마누스는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세르펜스는 헛다리를 짚은 그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잘 모르겠으면 부족한 눈치로 넘겨짚어 보려 하지 말고, 그냥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목소리만 들리는 상태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게 되면, 얼굴을 보고 얘기할 때보다 더 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방금 푸로르가 딱 한 마디만 말하고 침묵한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방법'을 시도하는 동안 휴마누스는 무방비 상태가 될 겁니다. 그리고 깨어난 직후에 착란 증세가 나타난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휴마누스가 '그 방법'을 쓰면 무방비 상태가 될 거라고 녀석이 확신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하고 기절했을 때.

내가 녀석의 몸에 한 짓을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묶고, 굴리고, 심지어는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깨어나지 못했다. 의식이 깊이 가라앉아, 외부의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못한 거다.

용사의 무구를 이용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전 회차의 기억을 엿보는 메커니즘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닐 테니.

세르펜스의 말대로 될 확률이 매우 높다.

{ 으응···, 아마도 그렇겠지? }

"함께 다니는 동료분들이 지켜 주시기는 하겠지만, 안전장치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입니다."

{ 한마디로 내가 걱정되니까 스메른 왕국에 가기 직전에 합류하겠다는 얘기네? }

"그러면 안 됩니까···?"

세르펜스가 청순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새침하게 되물었다.

지금 녀석의 저 표정을 휴마누스가 봤으면 감동했을 텐데.

아니마와 에드나가 만든 통신기가 아직 영상 통화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감동한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알타르 님, 제 조카가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아이입니다···!"

"아, 네···."

에일리히의 자랑질에 교단에 귀의하며 가족과 연을 끊은 알타르가 떨떠름히 대답했다.

표정이 어찌나 썩었는지, 순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알타르의 이마에 써진 줄 알았다.

{ 안 될 거야 없긴 한데···. 그건 내가 성검의 주인이자 황태자라서야? 아니면 친구라서? }

휴마누스의 목소리에서 장난기와 기대감이 흠뻑 묻어났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확인받으려고 질문한 게 틀림없다.

오랫동안 혼자만의 우정을 쌓아왔다가, 그것을 전면에서 부정당한 후유증이라도 남은 거려나?

"당연히···, 휴마누스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 당연한 거구나! 하하하하! }

즐거움 가득한 휴마누스의 웃음 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보통 기쁜 게 아닌가 보다.

그런 휴마누스의 행동에 세르펜스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휴마누스는 언제쯤 마르가리타 해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까?"

{ 부지런히 서두르면···, 약 3주 정도? 너희는 제국 수도에서 있으니까, 열흘 뒤에 출발하면 얼추 비슷한 날짜에 도착할 거야. }

"네, 알겠습니다. 그럼 3주 뒤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에일리히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열흘 뒤면 세르펜스의 생일 사흘 전이기 때문이다.

{ 만약 변동 사항이 생기면 또 연락할게. 그리고 시온이랑 유지스, 윈스톤 경도 거기 같이 있는 거 맞지? 다들 3주 뒤에 보자! }

"넵, 다 같이 모여있습니다! 오랜만에 목소리 들어서 반가웠고, 3주 뒤에 봅시다!"

"저도 반가웠어요, 안녕~!"

"···네."

휴마누스의 말에 살갑게 인사한 나와 유지스와는 달리, 윈스톤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했다.

일단 자신을 호명했으니 무시는 못 하겠고.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어색하게나마 '네'라는 한 마디를 꺼낸 듯하다.

{ 이제 말 해도 되는 거지? 모두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십쇼! }

{ 그럼 마르가리타 해안에서 만나요. }

푸로르와 리에나도 통화를 끊기 전에 한마디씩 꺼냈다.

{ 언니, 나는 암 일 없어두 연락 할꼬얌. 그래두 되징? }

"서둘러 이동하려면 피곤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 자기 전에 10분 정도 시간 내는 것 쯔믄 괜차나! }

마지막으로 통신 마법을 제어하는 아니마와 에드나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에일리히와 알타르는 성검 일행과 친분도 없으니, 끼어들기 뭐해서 그냥 넘어가려나 보다.

브로치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응접실에 모인 인원은 똑같은데, 통화가 종료되자 어쩐지 휑해진 기분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일 전에 떠나야겠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란다, 얘야.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니. 그냥 내가 서운해서 해 본 말이야."

에일리히가 쓸쓸히 독백했다가, 세르펜스의 사과를 듣고 황급히 표정을 추슬렀다.

"그보다 떠나는 날이 정해졌으니, 생일 파티 일정도 잡아야겠구나."

"떠나기 바로 전날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생일과 가장 가까운 날이기도 하고, 출발하기 전날은 푹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 둘 요량이었던지라···."

"그래, 그때가 가장 좋겠구나."

생일 파티 얘기가 나오자, 내 방에 둔 꽃 화분이 떠올랐다.

기왕이면 며칠 돌보게 해서 세르펜스가 정을 붙일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선물을 미리 줘 버릴 수는 없다. 지난 일주일간 세르펜스 몰래 화분에 쏟은 노력이 아까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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