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41)
* * *
시간은 아쉬우리만치 빠르게 흘러, 어느덧 공작저를 떠나야 할 시기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선물할 꽃 화분에 푸른 리본 끈을 두르고 예쁘게 매듭지었다.
생일 파티는 오후에 할 예정이긴 하지만, 준비는 미리 해 놔야 한다.
내가 직접 들고 나가면 선물을 건네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목격해 버리니까. 파티가 시작되면 가져다 달라고 제온에게 미리 부탁해 놨다.
'그간 잘 숨겨왔는데, 생일 당일에 들킬 수야 없지.'
마지막 점검차 화분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파란 꽃과 초록 잎사귀, 어디 하나 시든 곳 없이 파릇파릇 건강했다.
'매일 신경 쓰며 들여다본 보람이 있네!'
곳곳에 새순이 자라난 게 보였으나 건들지 않았다.
이따 저녁에 세르펜스에게 직접 순을 따 보라고 시킬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카네이션은 결국 못 구한 건가?'
꽃을 보고 있으니, 아직도 받지 못한 꽃 생각이 떠올랐다.
카네이션이 겨울에 구하기 어려운 꽃인 줄 알았으면, 겨울이 끝나고 나서 구해달라고 했을 텐데.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녀석이 사과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 선수쳐서 달래줘야겠다.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지 않아도, 내게 감사하는 마음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 되려나? 그리고 까먹고 있다가 받으면 기쁨이 배가 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얘기하자.'
그렇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방문을 연 순간.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붉은 색채에 깜짝 놀라,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다.
"으앗, 깜짝이야!"
"아···, 미안하다. 많이 놀랐는가?"
커다란 꽃다발 너머로 세르펜스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그냥 문을 열면 잘 보이도록 들고 있었을 뿐. 일부러 놀래킬 의도는 없었는지, 녀석 또한 당황하여 눈이 커졌다.
나는 세르펜스가 방 안의 화분을 보지 못하도록,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아버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갑툭튀···. 그러니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에 좀 약해서요."
"음···, 내가 실수했군. 앞으로 참고하겠다."
세르펜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녀석 딴에는 어렵사리 카네이션을 구해서 빨리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랬을 뿐인데.
내가 과하게 놀라는 바람에 풀이 죽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손에 들고 있는 그거, 저 주려고 가져오신 거 맞죠? 겨울이라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용케 구하셨네요!"
어서 카네이션 꽃다발을 이리 달라는 뜻으로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나 많은 꽃은 필요 없고, 가슴에 달 한 송이면 충분하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아무리 환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담아 말하더라도.
녀석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내가 자신의 노력을 몰라봐 준 거라고 오해하고도 남는다.
이럴 땐 그냥 솔직하게 기대하고 있었다는 티를 팍팍 내주는 게 최고다.
세르펜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많이 기다렸나 보군."
"당연하죠!"
내가 즉답하자, 세르펜스가 방긋 웃으며 카네이션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
"이야~! 입학식이나 졸업식도 아닌데, 꽃다발을 다 받아보네?"
간질간질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가 달콤했다.
꽃향기가 끄집어 올린 과거의 향수 또한 그립고도 달콤했다.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 꽃을 선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면 모를까. 꽃다발로 엮은 식물의 수명은 무척이나 짧아진다.
그렇게 짧아진 수명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꽃다발을 선물 받는다는 건 꽃의 가장 특별한 순간도 함께 선물 받는 셈이다.
그렇기에 꽃 선물을 받은 사람의 그 순간 또한 특별해지는 게 아닐까 한다.
문득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 선물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내일이면 공작저를 떠나야 하잖아?'
모처럼 받은 효도 선물을 고작 하루밖에 즐길 수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시들 때까지 두고두고 지켜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식사실까지 가는 도중에 시녀를 만나면, 화병에 꽂아서 응접실 테이블에 장식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뭔가 빼먹지 않았습니까?"
한 다발의 카네이션보다 가슴에 달아주는 한 송이의 카네이션이 훨씬 값지고 소중하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덮어두고, 세르펜스를 향해 꽃다발을 내밀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빨리 이 꽃다발에서 카네이션 한 송이를 뽑아서, 내 가슴에 달아달라는 의미를 담아 녀석을 쳐다보았다.
"사실 늦어진 건 카네이션을 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녀석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을 포함한 손바닥만 한, 제법 큰 사이즈의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보석함이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보석함이 열렸다. 눈에 들어온 건 카네이션 모양의 부토니에였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꽃잎은 그 한 장 한 장이 매우 얇고 정교했다.
금으로 꽃을 만든 게 아니라, 꽃이 황금으로 변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짜 카네이션 꽃잎처럼 나풀나풀한 느낌이 살아있었다
심지어 카네이션 주변을 꾸며주는 잎사귀와 작은 꽃들은 전부 보석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황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꽃다발 같은 모습이다.
섬세하고도 화려한 그 장신구를 본 순간. 세르펜스가 어째서 카네이션을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걸 주문 제작하니까 오래 걸리지!'
다른 곳도 아닌 프라시더스 공작가에서 꽃 한 송이 공수하는 게 어려워서 애먹는다는 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거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내 실책이다.
"혹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나?"
"아, 아뇨! 아닙니다! 저는 그냥 세르펜스가 생화나 한 송이 구해다가 달아주겠거니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너무 예상 밖의 큰 선물이라 얼떨떨하고 그래서···."
"그렇다니 다행이군."
세르펜스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내 왼손에 보석함을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그 속에 들어있던 부토니에를 꺼내서 내 재킷의 깃 부분에 달아주며 말했다.
"선우, 당신은 항상 내 인생이 바뀐 건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라 말해왔지. 하지만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게 된 건, 선우가 나를 이끌어 준 덕택이다. 그대가 내게 왔기에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대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 사실에 늘 감사하고 있다."
말을 마친 후.
녀석은 부토니에를 다느라 살짝 흐트러진 재킷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준 뒤, 손을 거두어들였다.
가슴 쪽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의식하자 어째서인지 코끝이 찡해졌다.
'좀···, 울 것 같네···.'
한 손에는 카네이션 꽃다발. 다른 한 손에는 보석함이 들려 있는지라, 직접 눈가를 만져서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눈물이 찔끔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옷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리 아이가 사랑스러워도 늘 좋을 수만은 없다.
부모 속을 썩이지 않는 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단 한순간도 아이를 미워한 적 없는 부모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그러하다.
세르펜스를 키우며 힘든 일도 있었고 서운했던 적도 많았다. 때로는 지치고 버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맛에 아이를 키우는 거구나···!'
단순히 '보람'이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끓어 넘쳤다.
육아에 시달리며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입에 달고 살면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아이와의 만남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 시들 수 없는 꽃이 시들 때까지, 선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겠다. 이건 그런 각오로 준비한 선물이다. 모쪼록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와, 진짜···. 와아···."
검지로 카네이션 부토니에를 톡 치면서 말하는 세르펜스를 마주하며.
나는 멍청하게 '와' 소리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말문이 막혀버린 까닭이다.
녀석에게 카네이션을 받고 싶다고 말하긴 했으나 장난으로 던져본 말에 가까웠다.
겨울이라 카네이션을 못 구했다고 하면 아쉬울 거 하나 없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수준에 불과했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네이션을 구하지 못해서 의기소침해질 세르펜스가 더 신경 쓰이면 쓰였지.'
그렇기에 세르펜스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시들지 않는 카네이션'을 준비해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아, 진짜···. 아침 먹으러 가야 하는데 사람을 이렇게 울리면 어떡합니까···?"
얼마 전에는 밥상머리에서 에일리히에게 편지를 건네서 울리더니.
아주 그냥 상습범이다.
"그러게요, 식사하러 가는 길에 별꼴을 다 보네요···. 다 함께 쓰는 복도 한복판에서 대체 뭘 하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드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크흠···!"
어디선가 세르펜스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말한 두 명은 에드나와 유지스고, 그 뒤에 헛기침을 한 사람은 윈스톤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서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수습이 급선무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꽃다발과 빈 보석함을 잠시 맡기고 뒤돌아서 눈물을 닦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 꽃다발이에요? 오늘은 선우가 아니라 세르펜스의 생일을 축하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어째서 생일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꽃과 선물을 주고 있냐는 질문이다.
그런 유지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하! 이해 했어요. 그래서 선우가 감동을 받아서 울고 있었던 거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눈물을 다 닦고 돌아서자, 의기양양 뿌듯해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울지만 않았어도 '우리 애가 이렇게나 기특합니다!' 하며 자랑해댔을 텐데.
마음의 준비 할 새도 없이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그 직후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건 아무리 나라도 무리다.
너무 민망하다.
"유지스나 에드나 씨는 그렇다 쳐도, 윈스톤은 왜 이 시각에 여기 계신 겁니까? 연무장에서 새벽 훈련 후, 식사실로 바로 가시는 거 아녔어요?"
"오늘은 다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선배가 어제 본인 입으로 말했잖소. 그새 잊어버린 거요?"
"······."
제길. 윈스톤의 말대로였다.
당황해서 잠시 까먹었는데, 어제저녁을 먹으면서 분명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저는 세수 좀 하고 내려갈 테니까, 다들 먼저 내려가서 식사하고 계세요."
내 말에 유지스와 에드나는 먹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윈스톤은 언제나 그러하듯, 과묵하게 고개만 끄덕여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따라 내려갔다.
세르펜스는 나와 함께 갈 생각인지 제자리에 남았다.
마침 잘 됐다.
아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녀석에게 채 전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지금 해야겠다.
"진짜 고마워요. 저도 세르펜스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찹니다. 세르펜스를 키우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또 느끼고 있어요."
"내가 선우에게 도움이 되었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세르펜스가 제게 의지하는 것처럼, 저를 지탱하는 건 세르펜스입니다."
"······!"
내 대답에 세르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반 접히며 눈웃음 지었다.
나도 녀석과 눈을 맞추고 웃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올 생각 말고, 거기 서서 기다리세요."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방 안으로 쏙 들어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이렇게 해 봤자 세르펜스가 들어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얘기해 뒀으니 몰래 들어오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