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회
76. 공작님과 바다 (1)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방으로 돌아가 몸에 꼭 맞아떨어지는 옷을 벗고, 움직임이 편한 여행자용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딱히 챙길 건 없지?'
어지간한 건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놓은 터라, 챙길 게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괜스레 방안을 둘러보았다.
요 몇 주 동안 누린 평화로운 일상을 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 똑똑똑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미적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내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내 방에 들어올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보나 마나 세르펜스겠지.'
별관에서 지낼 때는 창문을 통해 막 들어왔었는데.
방을 옮겨 문으로 들어오는 게 더 편해지니, 이제는 노크도 해 준다.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뒤로 돌자,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꽃 화분을 내려놓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화분을 가지고 갈 속셈은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었으나 일단은 녀석이 하는 양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주아주 어쩌면, 자신의 방보다 여기가 햇볕이 더 잘 드는 것 같아서 위치를 옮긴 걸지도 모르니까.
물론 맞은 편도 아니고 바로 옆방이니만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내가 선물한 카네이션은 어디에 있지?"
어제 생일 파티가 끝나고, 카네이션 화병은 내가 직접 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방금 세르펜스가 화분을 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버젓이 눈앞에 있는 화병을 못 찾아서 묻는 건 아닐 테니. 녀석이 말한 카네이션이란 부토니에 쪽을 일컫는 걸 테다.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잘 넣어 뒀어요."
"그렇군."
세르펜스가 짧게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내 웃옷 안주머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가져갔다.
그러더니 부토니에를 꺼내어 내 가슴에 달아주었다.
"혹시 이걸 매일 직접 달아줄 생각인 건 아니겠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이렇게 화려한 장신구를 가슴팍에 달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띄잖아요."
"음···."
내 말에 세르펜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내가 걸친 망토를 잘 여며서 부토니에를 가렸다.
이러면 되는 거 아니냐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래···. 어차피 이번에는 변장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강한 일행들과 함께 다니니까 괜찮겠지.'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빼고 다니면 된다.
그렇게 합리화 섞인 단념을 하며, 나는 가슴에 단 부토니에의 존재를 잊고 생활하기로 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리도 어서 나가죠."
내가 방을 나서자 세르펜스가 화분을 챙겨 들고 따라 나왔다.
역시 가지고 갈 생각인가 싶었지만, 매우 희박한 확률로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
내게 선물 받은 귀중한 것이니까.
화분을 돌봐줄 사람에게 직접 건네며, 잘 관리해 달라고 당부하려는 의도일지 누가 아는가?
나는 무턱대고 녀석을 혼내기 전에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화분은 왜 들고 다니는 겁니까?"
"살아있는 식물은 생명체라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석해도 화분을 가지고 다니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녀석이 화분을 들고 내 방에 찾아왔을 때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도···.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데다가 들고 다니기도 힘든 물건을 선물로 줬으면, 두고 다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거 봐라, 어젯밤에 순을 정리했는데 또 이렇게 나오기 시작했다."
세르펜스가 화분을 한쪽 팔로 안듯이 들고, 손가락으로 가지 사이에 조그맣게 자라난 새순을 가리켰다.
자기가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관리를 하겠다는 소리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면 되잖습니까?"
"선우가 선물로 준 것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다."
"그럼 아무나가 아니라 가족에게 맡기면 되겠네!"
"정말로 가져가면 안 되나···?"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세르펜스는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화분을 애지중지 양손으로 고쳐 들고, 눈썹을 팔(八)자 모양으로 모으며 처연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런 표정 지어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어째서?"
"전투 중에는 어쩌려고요?"
"선우는 아무것도 안 하니까, 선우에게 맡기면 된다."
"······."
전투 중, 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분 거치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제자리로 갖다 놓을래요, 아니면 에일리히 님께 직접 맡기실래요?"
"···백부님께 맡기겠다."
내가 짐짓 화난 척하며 얼굴 근육을 굳히자,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제 고집을 꺾었다.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 모습으로 봤을 때.
녀석 또한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는지 알고 있나 보다.
"옳지, 옳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굳은 표정을 풀고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어두웠던 녀석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1층에 내려가니 모두들 모여있었다.
처음 보는 갑옷을 입은 윈스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크레아토가 제작한 검과 어울리는 묵빛 갑옷이다.
저번에 테라룸 왕국에서 제작을 의뢰한 갑옷이 분명하다. 공작저에 무사히 도착해 있었나 보다.
'검을 받기 전에 갑옷을 먼저 맞춰서 색이 따로 놀면 어쩌나 했는데···.'
드워프들이 보기에 윈스톤은 검은색이 잘 받을 것 같았나 보다.
회갈색 머리칼과 구릿빛 피부와 검정 갑옷.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어두운 색들 사이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잘 어울리기는 하네. 그렇기는 한데···.'
[성검의 주인] 속 흑기사가 연상되어 살짝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투구로 완전히 안면을 가렸던 흑기사와는 다르게, 현재의 윈스톤은 얼굴을 드러내고 뭘 그리 빤히 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새 갑옷, 잘 어울리네요."
"고맙소."
윈스톤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으나 목소리에서 미세한 기쁨이 묻어났다.
공작저로 돌아와 먼저 도착해 있던 새 갑옷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시할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을까?
나는 다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단단하고도 매끈한 금속 특유의 재질이 손바닥에 착착 감겼다.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요?"
"예? 제 눈이 왜요?"
"···아무것도 아니오."
윈스톤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고, 그로 인해 대화가 끊겨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에드나가 통신용 브로치를 옷에 달았다는 것 외에, 윈스톤처럼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세르펜스는 에일리히에게 화분을 떠안기고, 어젯밤 내게 배웠던 블루 데이즈 관리 요령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는 에일리히의 얼굴이 사뭇 비장했다.
절대로 세르펜스의 꽃을 말려 죽이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그럼 '유니어'를 잘 부탁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살피며 귀히 여길 테니 염려 말아라."
둘의 대화를 흘려듣던 중, 간과할 수 없는 단어가 귀에 쏙 박혔다.
세르펜스가 꽃 화분을 '유니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세니어가 세르펜스 주니어니까···. 유니어면 유선우 주니어인가?'
내가 그 꽃 화분과 닮은 구석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런 이름을 붙인 건지 모르겠다.
그냥 별생각 없이 내 작명 방식을 따라 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조심하거라. 다치지 말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모쪼록 백부님께서도 몸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너도···, 건강 하렴···."
세르펜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에일리히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째 저번보다 더 애절한 모습이다.
'쌍둥이 악마에 관해 얘기했을 때, 세르펜스에게 잠깐의 위기가 닥쳤었다는 설명을 들어서 그런가?'
제 조카를 위험한 곳에 보내기 싫다는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만일 내가 에일리히처럼 공작저에 남아서 기다리는 쪽이었다면, 에일리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일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시온 경, 제 조카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녀석이 무리하는 것 같으면 억지로라도 쉬게 하고, 식사와 간식도 꼬박꼬박 챙겨 먹일 테니까."
"그럼 시온 경만 믿겠습니다."
내 호언장담에 에일리히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나와 에일리히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세르펜스도 알타르를 붙들고 백부님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세르펜스가 '이제 가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공작저를 떠날 수 있었다.
기차가 여전히 운행 중지 상태였기에, 우리는 열심히 마차를 몰아 마르가리타 해안으로 향했다.
그러는 도중에 세르펜스의 진짜 생일날을 맞이했다.
생일 파티를 앞당겨서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우리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에 들러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어차피 밥은 매일 먹어야 하니까.
평소보다 비싸고 좋은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일정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
"생일 축하합니다, 세르펜스."
"오늘은 노래를 불러주지 않는 건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며칠이 지난 지금, 세르펜스가 앵콜을 요구해왔다.
그때 어디선가 '우웅···.' 하고 진동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니 에드나의 브로치가 점멸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드나가 재빨리 방음 마법을 펼친 뒤, 브로치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응, 아니마.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 그런 건 아니구, 그냥 언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
{ 내가 세르펜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연락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어. }
휴마누스가 아니마의 말을 끊으며 얘기했다.
용건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아니마가 한 말은 '무슨 일이 생겨서 연락한 건 아니다.'라는 정보만 취하면 될 것 같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 하심은···."
생일날 갑자기 전화해서 할 얘기라고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뿐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세르펜스는 내숭 떨며 아무것도 모르는 체했다.
{ 생일 축하해.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진짜 친구가 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네 생일이잖아? 그냥 넘어가기 아쉬웠는데, 이렇게 말이라도 전할 수 있으니까 좋다. }
"감사합니다."
{ 혹시 지금 바쁜 거 아니지? }
"네, 식사 중이었습니다. 휴마누스는 식사하셨습니까?"
{ 이제 먹으려고 준비 중이야. }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휴마누스! 지금 노래 부를 수 있어요?"
{ 응? 갑자기?! 그, 그게···. 주변에 우리 일행 말고는 없어서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나 한 번도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잘 부를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무슨 노래? }
당황했는지 휴마누스가 횡설수설했다.
그보다 태어나서 노래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니, 충격적인 발언이다.
나는 휴마누스에게 내가 살던 곳에 생일 축하 노래가 있다는 걸 설명했고, 시범까지 선보였다.
{ 다들 잘 들었지? }
{ 엑···, 설마 우리도 같이 불러야 하는 거야? }
{ 아하하, 재밌겠네! }
{ 성가(聖歌) 이외의 노래를 불러보는 건 처음이네요. }
혼자 노래를 부르기 민망했는지, 휴마누스가 물귀신처럼 자신의 일행들을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