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회
76. 공작님과 바다 (5)
"악마가 어디에서 소환된 건지는···, 모르겠죠?"
악마 소환 징후는 그 지역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역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대륙 바깥의 바다에서도 관측된다.
세르펜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휴마누스가 제아무리 성검의 주인이라 한들.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방금 한 질문은 그냥 한 번 던져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알 것 같은데?"
"으음···."
휴마누스가 얼굴을 굳힌 채로 떨떠름하게 내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세르펜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휴마누스의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바다를 향했다.
"설마···, 악마가 바닷속에서 소환된 건가요?"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지 못하겠는지, 유지스의 목소리가 회의적이다.
그 물음에 대한 세르펜스와 휴마누스의 답변은 무척이나 직관적이었다.
- 채앵─!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 그리고 리에나는 배를 보호해 줘!"
세르펜스가 모두에게 경고했고, 휴마누스는 지시를 내렸다.
리에나는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으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이내 백색의 신성력이 배를 감쌌다.
구 형태로 배 주변을 둘러싸지 않고 코팅하듯 배에 막을 씌우는 느낌으로 결계를 친 건,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함일 테다.
결계 안에서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신성력과 집중력을 요구했으니.
집중하는 리에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큰 배를 빌리지 말았어야 했나···?"
"작은 배는 쉽게 뒤집힐뿐더러, 충분한 발판이 되어주지 못해요."
후회 섞인 휴마누스의 중얼거림에 유지스가 활에 화살을 메기며 답했다.
그 말에는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으나, 그저 위로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는 아니었다.
유지스의 말대로.
이렇게 큰 여객선이 아닌 그저 그런 크기의 배였다면, 적과 싸우기는커녕 일행들이 발 디딜 곳도 부족했으리라.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대한 체격에 걸맞은 거대한 검을 든 윈스톤의 모습이 보였다.
에드나와 아니마도 스태프를 꺼내 들어, 언제라도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
악마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것인지, 세니어가 위협을 감지하고 신성 결계를 쳤다.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세르펜스의 의지가 담긴 신성석이 박혀있을 뿐.
무생물인 세니어까지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는 가운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푸로르는 평소처럼 드루이드의 힘을 끌어올리는 대신, 이를 악다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으로서는 다가오는 적이 악마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놈이 어떤 형태를 갖췄으며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이곳은 망망대해에 동동 떠 있는 배 위였으니.
어떤 짐승의 힘을 빌려와야 할지 막막할 만도 했다.
"저···, 갑자기 무,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고 바다를 노려보고 있자, 갑판에서 일하던 선원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질문했다.
하얗게 질린 안색과 떨리는 목소리는 분명 공포에 질린 사람의 것이었다.
말을 건 선원만 그러한 게 아니라, 다른 선원들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들도 악마 소환 징후를 보았고 전투를 준비하라는 휴마누스의 외침을 들었을 테니.
악마가 소환된 장소가 이 근처라는 사실을. 그리고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눈치챘을 터.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한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일 테다.
"이곳은 위험하니, 다들 배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히익···!"
세르펜스의 말에 선원들이 겁을 집어먹고 부리나케 선실로 대피했다.
우리끼리라면 배가 부서져도 어떻게든 날아서 이동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배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킬 수는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지켜야만 한다.
벌써부터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세르펜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하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선원들을 따라 배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기에는 그들을 믿을 수 없을뿐더러, 시야에 보이지 않으니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고 전투가 벌어질 갑판에 서 있으라고 하기에는 그거대로 걱정되어서.
갈팡질팡 고민하는 걸 테다.
그러다가 녀석이 겨우 마음을 굳히고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일어난 높은 파도 탓에 배가 크게 기울었다.
- 콰앙!
조금 전까지 우리가 둘러앉아 먹고 놀던 테이블과 의자들이 미끄러지며, 반대쪽 난간에 처박혔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접시 중 일부는 바닷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렇지 않은 접시들은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갑판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난간에 부딪혀 반파된 테이블이나 바닷속에 빠진 접시 꼴을 면하기 위해, 나는 마침 붙잡고 있던 난간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계속 난간을 잡고 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한 것도 잠시.
'잠깐만, 다른 사람들은?!'
불현듯, 난간을 붙잡고 있었던 건 나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육체파 일행들이야 알아서 잘 균형을 잡을 테니 내가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중에는 순수한 신체 능력만 따지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어, 어어···?!"
배를 감싼 신성 결계를 유지하느라 집중하던 리에나는 쏠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울어진 갑판을 따라 속수무책으로 쓸려 내려갔다.
그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배를 감싸고 있던 신성 결계가 깨졌다.
"악!"
"언니!!"
에드나와 아니마가 스태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서둘러 난간을 붙잡았으나, 한 손으로는 힘이 부족했다.
그 탓에 둘은 나란히 난간을 놓치고, 리에나와 마찬가지로 반대쪽 난간을 향해 내던져질 위기에 처했다.
- 탓─!
푸로르가 잽싸게 갑판을 박찼다.
그 추진력으로 리에나가 반대쪽 난간에 부딪히기 직전에 따라잡아, 정확하게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에드나와 아니마를 구해낸 건 윈스톤이었다.
석양을 구경할 때. 그는 혼자서 난간에 바짝 붙지 않고 몇 걸음 떨어져, 우리보다 뒤쪽에 서 있었다.
주군의 등 뒤를 지키는 기사로서의 직업 정신 때문이다.
윈스톤은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난간을 놓친 것을 보자마자, 들고 있던 검을 망설임 없이 갑판에 내리꽂았다.
신성 결계가 해제된 덕분에 검은 무리 없이 갑판 깊숙이 박혔다.
그는 한 손으로 검을 붙잡아 몸을 지탱하며, 다른 한쪽 팔을 뻗어 두 사람을 받아냈다.
'다행이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기울어졌던 배가 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리에나가 푸로르에게 몸을 기댄 채,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신성력으로 배를 감싸 보호했다.
하지만 흔들림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까보다는 낮지만, 제법 높은 파도가 배를 들었다 놨다 하며 뒤흔들었다.
난간을 붙잡지 않으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 요동쳤다.
유지스가 말했던 대로, 작은 배를 타고 있었다면 조금 전의 큰 파도로 배가 뒤집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연이어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그대로 바다에 빠져 죽었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혹 선실에 들어가고 싶다면 제가 데려다 드릴 수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내 등을 받쳐주며 말했다.
나를 보호하는 신성 결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에도, 세르펜스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버렸다.
세니어의 신성력이 본래 녀석의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렇기에 녀석이 결계를 무시한 것보다, 어떻게 중심을 잡고 있는지가 더 신기했다.
한 손은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등을 받치고 있다면, 녀석은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도 멀쩡히 서 있다는 뜻이 된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균형 감각인지 모르겠다.
"됐어요. 거기는 온갖 물건들이 있을 테니, 여기보다 더 난장판일 거 아닙니까?"
"으음···.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보다 악마는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배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는 답변을 들으니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물 밖으로 안 나오는 놈을 배 위에서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우리가 스메른 왕국으로 향하는 걸 알고, 미리 준비해 둔 건가?'
정체를 숨기고 이동할 걸 그랬나 후회막심이다.
성검펜스 덕분에 비행하는 적에 대처할 수단이 생겨 안심했더니, 악숭이 놈들이 수중전을 걸어올 줄이야.
[성검의 주인]에서는 수중 전투에 특화된 악마가 등장하지 않아서 방심했다.
"읏···."
결계를 유지하는 리에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직도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는 악마 놈이 파도만 일으키는 게 아니라, 배 밑바닥에다 대고 공격을 퍼붓고 있나 보다.
어쩌면 그 공격 때문에 파도가 끊이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바닷속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 없는 건 아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까.
현재 그 둘은 에드나의 마법으로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다.
배의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마법을 펼치기 위한 준비였다.
허나 현재 악마가 있는 위치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바로 밑이다.
섣불리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간, 배를 보호하는 결계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이 자명하다.
'악마의 공격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충격이 더해지면 결계가 깨져버리겠지···?'
그렇게 된다면 배가 부서지는 건 예정된 결과다.
반면에 악마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세르펜스도 결계를 펼쳐 배를 이중으로 보호한다면 배는 무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마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강력한 전력 하나를 잃게 된다.
"아무래도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결심했다는 듯, 내 등에서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려 애썼지만, 결국 그 수밖에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아, 진짜···! 악숭이 놈들은 대체 어떻게 바닷속에서 악마를 소환해 낸 거야?!"
적의 모습은 코빼기도 못 보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난간에 매달려 있기만 하려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치밀어 오른 건 짜증뿐만이 아니었다.
"우웁···."
악마 소환 징후가 나타난 순간부터 메스꺼움을 느꼈는데, 바닥이 하도 울렁거리니 욕지기도 치밀어 올랐다.
배가 크니까 흔들림이 적어 멀미할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거늘.
멀미약 생각이 간절해졌다.
"괜찮으십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신성력으로 치료할 생각은 버려요. 이렇게 배가 흔들리면 계속 멀미가 날 텐데, 신성력을 낭비하면···. 우욱···!"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으나, 뜻은 제대로 전해진 듯하다. 세르펜스가 내게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으니, 세니어라도 내게 지속적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어 줄 만도 한데.
세니어는 내가 안정적으로 난간을 붙들고 버틸 수 있도록 근력 버프만 걸어주고, 멀미는 치료해주지 않았다.
얘도 이게 신성력 낭비라는 걸 아는가 보다.
'에드나 씨에게 마법으로 몸을 띄워 달라고 부탁해도 되지만···.'
괜히 자신과 아니마의 몸만 띄운 게 아닐 테다.
마력 소모와 정신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겠지.
아니마가 아닌 에드나가 부유 마법을 쓴 것도, 마법 실력이 훨씬 뛰어난 아니마의 전력을 보존하기 위함일 테다.
'그냥 버티자.'
그게 내가 일행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작 멀미 때문에 전력을 깎아 먹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