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83화 (683/925)

683회

76. 공작님과 바다 (8)

'그나저나 쌍둥이 악마를 소환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중상급 악마를 소환하다니···.'

대체 어디서 그 정도의 제물을 모은 건지 모르겠다.

최근에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건만.

대륙 전역에서 조금씩 조금씩 납치해서 모은 건가?

아니면 외부와 교류가 적은 화전민 마을이라도 습격한 걸까?

현재로서는 짚이는 구석이 없다.

"어떻게든 전장을 물 밖으로 옮겨야 하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는 게 없는지, 휴마누스가 초조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 속에서 싸우려면 호흡도 신경 써야 할뿐더러, 물의 저항 때문에 체력도 배로 소모된다.

반면에 적은 수중전에 특화된 악마다.

게다가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에 딱 알맞은 특성도 있다.

드넓은 바닷속을 헤엄치며, 무한히 재생되는 촉수들을 방패로 삼는다면.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인간 중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라 할지라도, 체력이 바닥나고 나면 위험해지겠지.'

싸울 수 있는 전력들을 배 위에서 가만히 기다리게 두는 것도 크나큰 손실이다.

그렇다고 적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바닷속에 다 같이 들어가는 건, 적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꼴이니.

악마를 물 위로 유인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휴마누스가 고민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휴마누스, 적은 중상급 악마가 확실하죠?"

"응.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기록에 따르면 저런 괴이한 외형을 지닌 악마는 중상급뿐이야."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알아서 물 밖으로 나오도록 도발하면 됩니다."

유지스, 윈스톤, 에드나가 '도발'이라는 단어에 움찔했다.

반면에 휴마누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발이라면···. 설마 욕하자는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일행의 리더 대신, 푸로르가 내 의중을 재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정답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악마라는 놈이 욕을 좀 들었다고,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버리려고 할까?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이면 배 바로 밑에 붙어서 배를 부수려 하는 대신, 그냥 대놓고 공격했을 것 같은데?"

푸로르의 말대로, 이번에 소환된 악마는 어느 정도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다.

하지만 도발 성공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지능이 아니다.

어차피 화가 나면 머리는 굳기 마련이니까.

"다른 악마라면 푸로르 님의 말씀대로 저희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겠지만, 상대가 중상급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교단 도서관에 비치된 문헌에 따르면, 중상급 악마는 유독 충동적이며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나와 있거든요."

리에나가 중상급 악마에게 분노 조절 장애가 있음을 설명했다.

중상급 악마의 욱하는 기질 또한 그들의 외형이 마기의 폭주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 중 하나다.

이러한 정보를 내가 알고 있는 건, [성검의 주인]에서도 리에나가 저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리에나, 얘기해도 괜찮아?"

"네. 세르펜스 님께서 배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악마를 멀리 유인해 내신 건지, 결계에 가해지는 충격이 많이 약해져서···. 간단한 대화 정도는···."

그래도 말이 길어질수록 결계를 유지하는 집중력이 흐트러지는지, 리에나는 말을 흐지부지 끝냈다.

그러고 나서 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덜 흔들리는 것 같긴 해.'

그래도 한 번 시작된 멀미는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였지만.

더는 난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아도 돼서, 일행들을 둘러볼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건 그렇고, 세르펜스 얘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녀석이 바다에 뛰어들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니 꽤 지쳤을 텐데.

빨리 촉수 악마 놈을 물 위로 끌어내야지 안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나는 에드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무튼 리에나의 말대로 그런 거니까, 에드나 씨. 목소리를 바닷속까지 전달하는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

"잠시만 기다리시오. 선배, 혹시 직접 악마를 도발할 생각이오?"

윈스톤이 에드나의 말을 끊고, 나에게 따지듯 질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면 날 기절시켜서 선실 안에 던져 넣기라도 할 기세다.

"무, 물론 아니죠! 도발 당한 악마가 죽자고 달려들 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짓을 왜 제가 맡겠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이제까지는 왜 그랬소?"

"제가 뭘요?"

"···됐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윈스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났다.

어쨌거나 도발하는 주체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의외로 아니마는 얌전하네?'

네가 뭔데 언니에게 일을 시키는 거냐며, 화를 내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우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현재 악마와 싸우고 있는 건 세르펜스 혼자지만, 어쨌거나 전투 중이었으니.

괜한 것으로 트집 잡을 생각은 없나 보다.

아니마는 그런 유치한 말싸움을 걸어오는 대신, 조용히 새로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면 써먹을 마법을 미리 준비하는 듯하다.

"그래서 마법은 누구에게 걸면 되죠?"

"그야 당연히 휴마누스죠! 방어구 형태의 용사의 무구를 둘이나 가지고 있잖습니까?"

"네, 그럼 대상자는 휴마누스 님으로···."

에드나가 곧바로 마법진 그리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엉?'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가 보다.

"나, 욕 같은 거 할 줄 모르는데···?"

"꼭 된소리 나는 과격한 비속어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상대방이 들으면 화낼 것 같은 말을 하는 거로 충분해요."

"오늘 처음 본 악마가 무슨 말에 기분 나빠하는지 어떻게 알고?"

"정 떠오르는 게 없으면, 마왕 욕이라도 하세요. 그건 통하겠죠."

"으, 응···. 노력해 볼게."

세상에 이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휴마누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력 같은 소리를 해댔다.

아무래도 이 곱게 자란 황태자님은 노래만 안 불러본 게 아니라, 욕도 안 해보고 살았나 보다.

"준비 끝났어요!"

"그럼 황태자님, 욕해 주세요!"

에드나가 완성한 마법진이 빛나고, 그 빛은 곧 휴마누스에게 흡수되었다.

나는 휴마누스의 첫 욕설을 기다리며 하늘에 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으나 황금빛 날개가 조명이 되어, 긴장과 난감함이 뒤섞인 휴마누스의 표정이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

원래 평소 하던 짓도 자리를 깔아주면 공연히 긴장되고 어색한 기분이 드는 법이다.

그런데 27년 평생 해본 적 없는 욕을.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악마와 홀로 분투하는 세르펜스를 도울 수 있는 건 휴마누스 뿐입니다! 마왕을 비난하든 비하하든, 세르펜스가 지쳐서 촉수에 붙잡히기 전에 악마 놈을 끌어내야 합니다!"

"······!"

내 절실한 호소에 휴마누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드디어 욕을 할 결심이 섰나 보다.

"야, 야아···! 네가 모시는 마왕이 개새끼라며?!"

휴마누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껄렁거리며 빈정대는 투로 말해도 도발이 될까 말까 한 내용이건만.

목소리만 크지,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결여됐고 맥아리가 없었다.

그런 휴마누스의 소심한 욕설은 악마가 아닌 다른 이를 욱하게 했다.

"그게 뭡니까?!"

"그게 뭐예요?!"

나와 에드나가 동시에 언성을 높였다.

저런 걸 욕설이라고 할 줄 알았다면, 그냥 대본을 써서 휴마누스에게 넘겨줄 걸 그랬다.

"그, 그렇게 별로였어?"

"당연하죠! 마왕을 개새끼라고 지칭하는 건, 그냥 사실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습니까! 그 정도로 어디 화나겠어요?!"

"맞아요, 그런 건 욕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나와 에드나의 기세에 눌린 휴마누스가 깨갱하며 목을 움츠렸다.

"그,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마왕과 악마, 악숭이들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다니면서 해줄 욕이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실로 의문이다.

욕에 재능이 없는 휴마누스를 위해, 나와 에드나는 도발용 대사를 제안해 주기로 했다.

"마왕을 욕할 거면 더 확실하게! '마왕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건 룩스메아를 향한 열등감 때문이라던데, 진짜냐? 과연 룩스메아보다 빨리 태어났으면서, 이제야 겨우 반신의 경지에 턱걸이한 열등한 놈답네. 백날 발악해 봤자 거기가 한계니까, 괜히 힘쓰지 말고 그 시간에 잠이나 자라고 전해 줘라!' 뭐 이런 식으로 비꼬아 줘야죠!"

"혹은 '중상급 악마들은 가벼운 도발에도 눈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 조절 기능에 문제가 있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아, 이런 얘기 하면 오기가 생겨서 참으려나? 꼴뚜기 주제에 자존심은 있는가 봐?' 하고 악마 본인을 모욕하는 방법도 있고요."

"기왕 꼴뚜기라고 부른 김에 라임을 맞춰서, 뒤에 '꼴에?'를 덧붙이는 건 어때요?"

"그거 좋네요! 그리고 '푸훗-!'하고 비웃음을 넣으면 효과적일 것 같···."

나와 에드나가 열띤 토론을 하며, 대사를 개량해 나가는 그때.

- 촤아아악!!

대략 10여 km 떨어진 부근에서 거대한 촉수 괴물 같은 게 튀어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배를 향해 돌진해왔다.

저런 집채만 한 괴물과 부딪히면 배가 무사하지 못하리라.

리에나의 결계가 버틴다고 하더라도, 뒤집히는 건 피할 수 없을 테다.

그런 놈의 움직임을 저지한 건, 아니마의 마법이었다.

높은 파도의 벽이 일어나 돌진해오는 촉수 괴물을 덮쳤다.

흥분한 악마가 득달같이 달려들 것을 예상하여, 반대로 놈을 밀어내어 멈출 수 있는 마법을 준비했나 보다.

{ 크롸롸라라-!!!! }

아니마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파도에 휘말려, 악마가 바다에 잠시 잠겼다가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괴성이 그치고 난 이후에도 웅웅 이명이 들리고 귀가 먹먹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겨우 모습을 드러낸 촉수 악마의 모습을 살폈다.

기본적인 형태는 두족류와 비슷해 보였으나, 휴마누스의 말대로 촉수가 너무 많았다. 족히 일백은 넘을 것 같다.

길이도 두께도 제각각인 촉수가 꿈틀거리고, 거기에 다닥다닥 붙은 빨판은 없던 환형 공포증도 만들어 냈다.

묘하게 번들거리는 몸통도 기분 나빴다.

징그럽다 못해 혐오스러운 모습이다.

'저딴 걸 꼴뚜기에 비교하다니···.'

에드나가 정말 너무 했다.

내가 대신해서 꼴뚜기에게 사과하고 싶다.

{ 감히 마왕님을 모독하고, 나를 꼴뚜기라 부른 것들이 누구냐!!! }

꼴뚜기라고 불렸으면, '이토록 징그러운 저를 그렇게 작고 귀여운 생명체에 빗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촉수 악마 놈이 주제도 모르고 화를 냈다.

마음 같아서는 양심을 마계에 두고 온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놈의 분노를 감당하며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휴마누스를 가리켰다.

"쟤가 그랬어요!"

{ 목소리를 듣자 하니, 둘 중 하나는 네놈이로구나!! }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을 걸 그랬다.

괜히 일렀다가 마왕 욕을 한 게 나라는 사실만 들키고 말았다.

악마의 촉수가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재빨리 윈스톤이 내 앞을 가로막아, 오러가 가득 담긴 검으로 그것을 잘라냈다.

일단은 악마의 신체인데 생각보다 쉽게 잘린다고 생각하는 찰나.

새로운 촉수는 순식간에 자라났고···.

- 쿵, 쿵, 쿵!

잘린 촉수가 펄떡거리며 갑판을 감싼 신성 결계를 때렸다.

"으악! 개징그러워!"

생긴 것도 징그러운 게, 움직임까지 징그럽다. 촉수 악마의 몸에 붙어있을 때보다 더 징그럽다.

나는 소름 끼쳐서 근처에 가기도 싫은데, 윈스톤은 용케도 그것을 발로 걷어차서 배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펄떡거리는 잘린 촉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하다.

그러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 잠깐만. 마왕을 열등하다 욕한 것과 꼴뚜기 발언을 저놈이 어떻게 알지···? 설마 휴마누스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나와 에드나가 한 말까지 전부 들은 거야?!'

생긴 거랑 다르게 귀가 아주 밝은 놈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드나에게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하지 말 걸 그랬다. 괜히 마력만 낭비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