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87화 (687/925)

687회

76. 공작님과 바다 (12)

배 꽁무니부터 천천히 잠기고 있으니, 당장 위험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다.

'그래, 아직은 말이지···.'

조금 전, 에드나가 리에나에게 잠깐이라면 배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선을 옮기자, 두 마법사들이 집중하여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에드나는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린 반면, 아니마는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두 개의 마법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두 배가량 컸고 세 배 이상 복잡했다.

심지어는 일부가 지워졌다가 다시 그려지길 반복하며 수정되고 있었는데, 그 탓에 계속 보고 있으면 어지럽기까지 했다.

'뭐 하는 마법인지는 몰라도, 엄청 어려운 마법인 것만은 확실해 보이네.'

배를 들어 올리기 위해 새로운 마법을 쓰려면, 기존에 준비하던 마법은 엎어버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오는 마력 손실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준비 중인 마법을 얼른 완성해버리고 배를 띄우는 게 낫나?'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밤바다에 잠겨가는 배의 후미가 보였다. 야금야금 어둠에 갉아 먹히는 것 같다.

어쩐지 정신이 아찔해져서 다시 고개를 올렸다.

잡힐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촉수를 피하며 악마의 이목을 끄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따금 비틀거리기까지 하는데도 잡히지 않자, 악마가 더 약이 올라 씩씩대며 촉수를 내뻗었다.

신경이 세르펜스 쪽으로 쏠린 덕분에 배로 휘둘러지는 촉수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정확도 또한 떨어졌다.

그래도 배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는 그런 눈먼 공격조차 위협적이다.

휴마누스가 동분서주하며 악마의 촉수로부터 배를 지켰다.

어느덧 배가 1/3가량 물에 잠겼다.

세니어의 결계가 물을 막아준 걸 보면, 배를 감싼 리에나의 결계 또한 물을 막아줄 테다.

그러니 배 안의 선원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물이 새는 것도 아닌데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 조금 의문스럽긴 하나, 밑에서 끌어당기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넘겼다.

'그보다 문제는 푸로르랑 리에나인데···.'

뱃머리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나와는 달리.

배가 기우는 순간, 푸로르는 공교롭게도 배의 뒤쪽에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다.

그 탓에 푸로르와 리에나는 벌써 허리까지 바닷물에 잠긴 상태였다.

"리에나는 제게 맡기시고, 이 밧줄을 잡으세요!"

정령의 도움으로 떠 있는 유지스가 푸로르에게 밧줄을 내밀었다.

눈으로 그 밧줄을 따라 올라가니, 반대쪽 끝은 뱃머리에 묶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마워!"

푸로르가 리에나를 유지스에게 넘긴 뒤, 밧줄을 잡고 뱃머리 쪽으로 올라갔다.

윈스톤은 배의 중간 지점에 매달려 있었는데, 지금은 내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한쪽 팔의 힘만으로.

반동을 이용해 몸을 끌어 올린 뒤 잽싸게 더 높은 위치를 붙잡으며,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올라온 것이다.

'그냥 검을 검집에 넣고 두 손을 쓰는 게 훨씬 편할 것 같긴 한데···.'

무기를 놓으면 촉수가 날아와도 대응을 할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저런 힘든 방식을 택한 듯하다.

어느새 배가 절반이나 바다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급격하게 지쳐갔다.

수십 개의 촉수가 지치지도 않고 사방팔방에서 공격해 오는데,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체감상 몇십 명의 적과 끝없는 싸움을 지속하는 것처럼 느껴질 테다.

'차라리 상급 악마가 더 상대하기 쉽겠네!'

세르펜스가 촉수에 붙잡히는 가슴 철렁한 일도 벌어졌다.

휴마누스가 재빨리 녀석을 구해내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배를 지키던 휴마누스가 자리를 이탈하자, 방어에 구멍이 뚫려 악마의 촉수가 우리에게 휘둘러졌다.

그래도 피해는 없었다.

푸로르가 밧줄에 몸을 의지하며. 바닥이 아닌 벽이 되어버린 갑판을 딛고 달려, 두 마법사를 위협하는 촉수를 뻥뻥 걷어찼다.

내 쪽으로 휘둘러진 촉수는 윈스톤이 검으로 베어냈다.

"악마한테서 떨어져!!"

마침내 마법이 완성된 것인지, 아니마가 크게 소리쳤다.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자, 두 개의 마법진이 빛을 내며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저런 것도 가능해?!'

두 명이 각자 마법을 써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거라면 모를까. 저렇게 하나로 합쳐질 수도 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합동 마법 같은 건 언급조차 없었다.

일행 중 최연장자인 유지스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함께 펼치는 마법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인가 보다.

- 쿠르릉···!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콰광!' 소리를 내며 악마의 몸에 벼락이 꽂혔다.

그러고 나서도 하늘 위 마법진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며, 여전히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콰르릉! 꽝! 콰과광!!

연거푸 벼락이 쏟아졌다.

어쩐지 마법을 준비하는 데 유난히도 오래 걸리더라니.

악마가 회복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번개를 내리쳐서 감전사에 다다르게 할 생각인가 보다.

{ 그가가가가가각, 가각, 크악, 칵-! }

번개의 집중 공격을 받은 악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악마의 몸과 그 주변의 바닷물까지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던 그때.

"으악!"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중력의 방향이 뒤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고자, 필사적으로 난간을 붙들고 버텼다.

귀에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내 착각인 것 같기도 하다.

콰릉거리는 천둥소리 때문에 확실하지가 않다.

흔들림이 멎어 들고 잔잔함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배는 안정적으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고, 나는 난간을 붙잡은 채로 갑판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헉···, 허억···."

놀라서 두근대는 심장 탓에 호흡까지 가빠졌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된다.

멍하니 주저앉은 채로 숨을 좀 가누고 나서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법숭이와 메숭이, 아까 바닷속으로 들어갔었지?'

악마의 몸을 타고 바다에 스며든 전류에 감전되어 죽었거나 의식을 잃었나 보다.

그리고 부력을 가진 물체를 억지로 눌러서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가, 손을 놓으면 튀어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가 탄 이 배도 바닷속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사라지자, 튀어 올랐다가 제 위치를 찾은 게 아닐까 한다.

- ···쾅! ···콰릉!

천둥소리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부양 마법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이번 마법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것일까?

두 마법사는 더 이상 공중에 떠 있지 않았다.

아니마는 두 발을 갑판에 붙인 채로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고 있었고, 에드나는 그 발치에 엎어져 있었다.

{ 큭···, 크롸···, 캬악···! }

이 징글징글한 악마 놈은 아직도 살아있나 보다.

악마가 있는 곳은 내가 붙어있는 난간 쪽이 아닌 반대 방향이었다.

주저앉은 상태로는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라?"

세니어의 버프가 있으니 이럴 리가 없는데.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고 있는데, 나를 보호한 신성 결계의 빛이 평소보다 흐릿해 보였다.

그제야 세니어에 담긴 신성력은 무제한이 아니란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면 엄청나게 잘 버텼지···.'

두 악숭이들은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는 몰라도,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악마의 숨통만 확실하게 끊으면 된다.

"···악마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은데?"

휴마누스가 하늘에 떠 있는 상태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리치는 벼락이 뜸해지자, 악마가 특유의 재생력을 발휘하여 서서히 회복하고 있나 보다.

이쯤 되면 악마가 아니라 좀비 같다.

아니마의 마력도 이제 곧 바닥날 것 같고.

이제 남은 것은 악마의 급소를 찔러 즉사시키는 방법뿐이다.

- 꽝···! 꽈르릉···.

악마가 완전히 무력화되어서, 지금이라면 촉수의 방해 없이 공격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놈의 급소를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다.

"두족류의 급소라···. 세르펜스, 뭔가 아는 거 없어요?"

"으음···. 볼타 산맥에는 두족류 형태의 마물이 존재하지 않는지라···."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죽여보라고 가져온 마물 중, 두족류 마물은 없어서 그 약점은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산에 해양 생명체가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 세르펜스가 모르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다.

"으···.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요리 프로에서, 요리사가 어딜 쿡 찌르니까 오징어 색이 하얗게 변하고 그러던데···. 거기가 어디더라···? 혹시 누구 해산물 손질에 대해 잘 아시는 분?!"

{ 크···, 아악···. 가, 감히···. }

악마가 비명이 아닌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게 생겼다.

"글쎄? 강에서 잡은 물고기라면 가끔 요리해 먹곤 했지만···."

"해산물은 비싸서, 요리해 본 적이 없어요···."

푸로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리고 에드나는 엎어진 채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튼 둘 다 두족류를 손질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머지 일행들도 대답만 안 했지,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

돌연, 유지스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때맞춰 '콰과광!' 하고 번개도 쳤다.

"왜요? 뭐 떠올랐어요, 유지스?!"

"선원분들께 물어보고 올게요! 바다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들이니 아실 수도 있어요!"

{ 나, 나는···. 해산, 물이···. 극, 그극···! }

유지스가 리에나를 푸로르 옆에 내려놓고, 선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음물에 담가서 기절시키거나 두 눈 사이를 찔러서 신경을 끊은 뒤, 머리를 까뒤집어 나온 내장을 제거하면 된대요! 그리고 소금으로 문질러서 점액질을 제거하라는데···. 그것까진 안 해도 되겠죠?"

당연한 소리다. 두족류 악마 초무침 같은 건 절대 먹고 싶지 않다.

{ 그, 그런···, 모욕적인, 죽음으, 으은-. 시, 싫···. }

"그거···, 내가 해야 하는 거겠지?"

휴마누스가 꺼림칙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또한 당연한 소리다. 성검의 주인이 악마를 죽이지 않는다면 누가 죽이겠는가.

휴마누스도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고 말을 꺼낸 게 아니라 단순 한탄이었는지,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성검을 들어 올렸다.

{ 아, 아아···. 이대로, 혼자 죽을 수는···. }

- 콱!!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악마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앉아서 쉬었더니 다리에 힘이 조금씩 돌아왔지만, 휴마누스의 악마 해체쇼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계속 앉아있어야겠다.

에드나처럼 편하게 누워버릴까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지만, 세르펜스가 보면 걱정할 것 같아서 난간에 등을 기댔다.

세르펜스가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모를 악숭이들을 수거하여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죽었으면 그냥 내버려 뒀을 테니, 산 거려나? 아니다. 소지품을 확인하려고 주워 온 걸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무사함을 알리기 위해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려는 그 순간.

- 쩌엉···!

흐릿한 빛을 겨우 유지하던 세니어의 결계가 산산이 부서지더니, 투명한 무언가가 내 발목을 휘감았다.

자세히 보니 완벽히 투명한 건 아니고 공간이 살짝 왜곡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보호색을 띤 생물처럼.

그것을 인지한 순간.

"악!!"

나는 외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 바다로 끌려 들어갔다.

너무 갑작스럽게 물에 빠져버린 탓에 숨을 제대로 머금지도 못했다.

붙잡힌 발목이 너무 아파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있던 숨도 모조리 뱉어버렸다.

괴롭다.

하염없이 몸이 가라앉는 감각이 느껴졌다. 먹먹해진 귀로 부글부글 물거품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은색의 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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