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회
76. 공작님과 바다 (16)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병과 수건을 각각 두 개씩 꺼내어, 한 세트를 세르펜스에게 넘겼다.
대충이나마 소금기를 닦아내기 위해서다.
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방에는 욕실이 딸려있지 않았다.
호화 여객선의 객실이라고 하기에는 매트리스가 그다지 폭신하지 않았던 걸 보면, 이곳은 갑판에서 일하는 선원에게 배정된 방이 아닐까 한다.
묵묵히 몸을 닦아내고 옷까지 전부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서려는 찰나, 내가 세르펜스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 그러고 보니 사과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세르펜스는 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신성석을 만들어 줬는데, 그걸 믿고 몸빵한다고 나대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참 빨리도 하는군."
세르펜스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며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게 훅 와닿았다.
치료를 받는 나도 아팠지만, 그런 나를 지켜보며 치료를 진행했을 녀석의 마음은 오죽 아팠을까.
거기다가 녀석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과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반면에 나는 상황이 정리되고 난 지금에 와서야 사과의 말을 꺼냈으니.
내가 어른답지 못했다.
"진짜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내게 미안하다면, 앞으로는 몸을 사려라."
"물론이고 말고요! 저도 아픈 걸 아는 사람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런 고통은 느끼고 싶지 않으니,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예? 그리고, 뭐요?"
"그것 말고. 다짐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지 않았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옷 갈아입고 나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정답을 말하기 전에는 여기서 못 나간다는 듯, 세르펜스가 문을 가로막고 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시간 없다. 빨리 말해라."
"어, 어어···. 그러니까···. 아! 아프면 바로바로 얘기하겠습니다!"
"흐음···. 그래, 한번 믿어보겠다."
믿어보겠다는 말과는 달리, 세르펜스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그런데 윈스톤 혼낼 겁니까? 저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픈 게 낫자마자 바로 남 걱정이군."
"남 걱정이 아니라, 그렇잖아요. 윈스톤은 검으로 막지 못한 공격을 몸으로 맞아가며 저를 지켜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게 힘들어서, 제가 그를 설득했습니다. 세니어의 결계가 있으니까 약해 보이는 공격은 막지 말라고."
"그랬겠지. 선우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
세르펜스가 착잡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녀석에게 못 할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윈스톤 경에게 괜한 화풀이를 할 생각은 없다. 하나 과연 그도 조용히 넘어가길 바랄지, 그게 의문이군."
"끄응···. 그것도 그렇네요."
우리는 대화를 마치고 방을 나와 갑판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행들은 그곳에 없었다. 법숭이의 시체와 메숭이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라면 귀빈실에 모여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니, 눈치 빠른 선원 하나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선원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나는 곁눈질로 세르펜스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신성력이 완전히 바닥나면, 얘도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나 보네···.'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을 기척만으로 구분하고 찾아낸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감각은 단순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 방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내를 마친 선원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귀빈실이라더니, 선원이 가리켰던 방문에는 유독 화려한 문패가 붙어 있었다.
나와 세르펜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구는 부서져서 전부 치웠는지, 텅 빈 방에서 바닥에 이불을 펼쳐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은 일행들이 보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수건돌리기 게임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상큼발랄하지 못했다.
중앙에 놓인 기절한 메숭이와 법숭이 시체 때문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건, 방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문이었다.
"저기는 욕실이긴 한데···. 물탱크가 터져서 물이 안 나오니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내 시선이 향한 방향을 확인한 유지스가 매우 유감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욕실이 있어도 씻을 수 없다니, 심히 안타깝다.
"어서 와서 앉아. 어째 늦는다 싶더라니, 결국 치료를 받고 온 거구나?"
내가 문가에 그대로 서서 낙담하고 있자, 휴마누스가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유지스와 살짝 거리를 두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뼈가 조각나서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더 아플 거라길래, 그냥 치료받기로 했어요."
"그런 얘기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잘도 말하네."
"치료받을 땐 진짜 너무너무 아팠는데, 치료가 끝나자마자 멀쩡해지니까 뭐랄까···. 질 나쁜 악몽을 꾸다가 깨어난 것처럼, 아팠던 게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실감이 안 난다는 말을 하자마자, 세르펜스가 자리에 앉으며 나를 째릿 노려봤다.
"아! 그래도 이제는 다쳐도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절대, 절대! 하지 않으니까 노려보지 마세요, 세르펜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나 보군."
"······."
묵비권을 행사했더니, 세르펜스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하지만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두 배로 혼나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튼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메숭이는 아직도 기절해 있는 겁니까?"
"메숭이가 메로우 악마 숭배자를 말하는 거라면, 잠깐 깨어났었는데 발작을 일으켜서 다시 기절시켜 놨어요."
대답한 사람은 유지스였다.
대화할 때는 상대방을 쳐다보는 게 예의였기에 나와 유지스는 서로를 쳐다보았고, 우리 사이에 앉은 세르펜스의 모습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르펜스의 안색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요?"
유지스가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점을 바로 짚었다.
신성력이 방전되어 세르펜스가 비실댔던 게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저 신성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탓에 지친 것뿐입니다.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방전펜스가 못내 신경 쓰였는지, 유지스가 말끝을 흐렸다.
눈치 빠른 유지스가 저러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걱정스러워졌다.
"리에나도 그렇고, 세르펜스 나리도 그렇고···. 어째 신성력을 쓰는 사람 중, 멀쩡한 건 휴마누스 밖에 없냐?"
푸로르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 얘기를 듣고 리에나의 상태를 살펴보니, 과연 세르펜스 못지않게 안색이 안 좋았다.
가만히 있다가 지목당한 리에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좀 춥지 않아요?"
"글쎄? 난 추위를 잘 안 타서. 꼬맹이 지금 추워?"
질문을 받은 아니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푸로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르펜스는 그나마 신체가 잘 단련되어 있지만, 리에나는 신성력이 없으면 그냥 일반인인 나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 리에나가 춥다고 하자, 푸로르는 리에나의 이마를 짚었다.
"으응···. 열은 안 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몸을 따뜻하게 해 두는 게 좋겠다. 아니마, 아공간 주머니에서 남는 이불 있으면 하나 꺼내 줘."
푸로르의 말에 아니마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불을 두 채 꺼냈다.
하나는 리에나에게 덮어주는 용도였고, 다른 하나는 에드나와 함께 덮기 위함이었다.
'아니마는 안 춥다고 하지 않았었나···?'
황당함을 느끼고 있는데, 돌연히 어깨에 묵직한 무언가가 얹혔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이불이었고, 내게 그것을 덮어 준 누군가는 세르펜스였다.
"아니마가 에드나 씨와 함께 이불을 덮는 모습을 보니까 부러워서 그래요?"
"선우는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데다가, 바다에도 빠졌잖은가.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다."
내가 이불을 살짝 들쳐서 같이 덮을 거냐는 제스처를 취하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 의사를 표했다.
모두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니마만큼 대놓고 어리광을 부릴 생각은 없는가 보다.
'그나저나 이거 덮고 있으니까 좀 더운 것 같은데···.'
그래도 고작 이불 하나 덮어서 세르펜스가 안심할 수 있다면야.
앞서 녀석을 걱정시켰던 게 미안했기에 그냥 덮고 있기로 했다.
"빨리 저 메로우를 깨워서 물어볼 거 물어보고, 얼른 쉬러 가는 게 좋겠어요."
"그러게. 다들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여."
유지스의 제안에 푸로르가 혀를 쯧쯧 차며 동의를 표했다.
지쳐서 힘들어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고도, 기절한 메숭이가 알아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자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제로 깨우자는 주장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세르펜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스크롤을 꺼내어 찢었고, 휴마누스는 어째서인지 방패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깨우지?"
"물 뿌려요, 물! 원래 물에서 살던 존재니까, 물을 뿌리면 정신을 차리겠죠."
"···너, 기절한 세르펜스를 깨울 때도 물 뿌리지 않았어?"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의견을 말하자 휴마누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달리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그는 내게서 물병을 받아갔다.
그러고는 졸졸졸, 메숭이의 얼굴에 물을 흘렸다.
'그냥 면상에 확 뿌려버리지.'
저렇게 온건한 방식으로 과연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의외로 반응이 있었다.
메숭이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허억! 헉, 헉···. 꾸, 꿈이 아니야···? 아아악-!! 네 놈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다 죽여 버리겠···!"
- 꽝!!
휴마누스가 길길이 날뛰며 펄떡거리는 메숭이의 뒤통수를 방패로 냅다 후려갈겼다.
그 결과 메숭이는 다시 기절했다.
메숭이를 깨우러 가면서 방패는 왜 챙긴 건지 궁금했었는데, 비로소 그 의문이 해결되었다.
"아, 미안. 소리를 지르며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해대길래 반사적으로 그만···."
"아직 살아 있긴 한 거죠?"
"응."
이곳에 악마와 계약한 자의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우리 중 가장 마음씨 고운 성직자 리에나조차 살아있으면 됐다며 넘어갔다.
'아니지? 룩스메아 교단 기준에서는 이단이니까, 넘어가는 게 당연한가?'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기 때문인지, 세르펜스도 선한 대외펜스 연기는 때려치웠다.
"제가 예전에 만들어 둔 성수가 있습니다. 저자는 악마와 계약한 존재이니만큼, 성수를 뿌리면 조금이나마 기운이 빠지지 않을까 합니다."
"세르펜스 너, 선우에게 너무 물든 거 아냐?"
"으음···, 감사합니다."
"왜 수줍어하며 고마워하는 거야?"
눈새눈새가 의아해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신이 만든 성수를 꺼내 갔다.
"내가 뿌릴게, 이리 줘."
신성력을 다 쓰고 약해진 세르펜스가 메숭이에게 다가가는 게 불안했는지,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손을 뻗어 성수를 받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졸졸졸, 메숭이의 얼굴에 성수를 흘려보냈다.
"끼에에에엑-!"
메숭이가 죽인다는 협박 대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펄떡펄떡 힘차게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