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회
76. 공작님과 바다 (18)
"적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본인의 잘못을 직시하십시오."
"아, 아니···야. 내가, 죽인 게···.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나는 안 죽였어, 커그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책망하는 세르펜스의 말에 메숭이가 아니라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봐도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다.
"저, 전부 다 너희 때문이야. 나는 잘못 없어, 나는 잘못이···."
"어째서 그쪽이 저희에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목숨을 위협해오는 악마와 싸웠을 뿐입니다. 악마가 먼저 공격해 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그쪽이 진정으로 탓해야 할 대상은 저희가 아닌. 다짜고짜 저희를 공격해 온 악마입니다. 그쪽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세르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는 척,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남을 탓하는 것이 마음 편한 게 당연하다.
한껏 구석으로 몰아붙이다가 슬쩍 도망갈 길을 열어주자, 메숭이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 그래 맞아! 하필이면 그런 성급한 악마가 소환되는 바람에···."
서로 목숨을 빼앗는 것이 당연한 적군과 거하게 트롤링을 해버린 아군 중, 원망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아군이다.
가령 예를 들어 팀을 이뤄 경쟁하는 게임을 한다고 치자.
상대 팀이 게임을 잘한다고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그 얘기는 곧 자신의 실력이 그들보다 못하다는 뜻이며, 패배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아군 팀에 엄청난 트롤러가 한 명 있다면 어떨까?'
모든 패배의 원인이 그 트롤러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갑자기 그자의 부모님 안부가 궁금해지기 시작할 테다.
고작 게임에서도 그러할진대, 목숨이 걸린 현실에서는 오죽할까.
악마가 소환되자마자 말도 없이 성검의 주인과 그 일행들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더라면.
적의 도발에 걸려들어 물 밖으로 나가지만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그 이후에라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힘을 합쳐 싸웠더라면.
그 외 기타 등등.
수만 가지의 가정이 메숭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그 악마는 자신을 이 대륙에 소환해 준 흑마법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목숨까지 위협하던데···."
세르펜스가 순진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척, 메숭이의 원망에 기름을 퍼부었다.
메숭이는 어디까지나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서 악숭 세력에 가입했을 뿐. 진심으로 악마를 숭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악마를 향한 적개심을 쉽게도 불태웠다.
"그 악마만 아니었어도···. 나는 커그와, 행복하게···."
"처음부터 악마 따위를 소환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악마는 절대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부수고 짓밟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악마와 엮인 순간 불행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악마 소환을 도왔기 때문에, 커그가 죽은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메숭이가 눈을 부릅뜨고 세르펜스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핏발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지만 마기에 물들어 검게 변한 안구는 그 붉은색마저도 묻어버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저···. 음···.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
세르펜스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메숭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고민하는 연기를 펼쳤다.
휴마눈새가 그런 녀석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녀석의 행동이 메숭이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밑 작업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혹, 그자는 어린 시절부터 악마 숭배 세력에서 흑마법사로 교육받지 않았습니까?"
세르펜스가 너무 당연해서 질문 같지도 않은 것을 질문으로 던졌다.
마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10살 전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안정적인 그릇을 만들 수 있다.
닼숭이처럼 악마와 계약하여 강제로 그릇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 경우 기반이 무척이나 불안정하여 큰 성과를 이룩하기 힘들뿐더러, 흔한 케이스도 아니다.
가끔 일반 마법사가 흑마법사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악숭 세력의 법숭이 중 95% 이상은 처음부터 흑마법을 배운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가 악숭 세력의 일원이었거나, 어렸을 적 악숭이에게 납치되었거나.
이 둘 중 하나다.
"그, 그렇다고 듣기는 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95% 확률의 찍기는 적중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메숭이의 모습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나···. 악마 소환은 그쪽이 사랑하던 사람의 숙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악마를 섬기고 봉사하며 희생하도록 세뇌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삶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이용당한 겁니다."
세르펜스의 말은 이간질이었으나, 어느 정도 진실이기도 했다.
악숭 세력에 '숭배'라는 말이 괜히 들어있는 게 아니다. 놈들은 종교 색채를 띤 집단을 구성하였고, 그 정체는 사이비다.
'사이비가 달리 사이비인가? 신이 아닌 걸 신이라고 우기며 숭배하면, 그게 사이비지.'
그리고 사이비 종교의 특징은 바로, 이득을 보는 건 정점에 올라선 한 명과 그 바로 아래의 소수뿐이라는 점이다.
흑마법사도 나름 악숭 세력에서 높은 위치이기는 하나 그래 봤자다.
이득을 취하는 극소수의 자리는 마왕과 악마들이 전부 꿰찼으니까.
그런데도 악숭 세력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악마들의 말에 현혹된 탓이다.
열심히 마왕과 악마를 숭배하면 자신의 노고를 알아줄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인정되는 종교인 까닭이다.
"악마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들을 숭배하며 마음을 바치고, 종래에는 악마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다니···."
세르펜스가 법숭이의 시체에 힐끔 눈길을 던지며.
목소리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메숭이가 악마를 적대해야 할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메숭이는 진작에 이성적 판단 능력을 잃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했을 때부터 그러했을 거다.
그리고 그 잘못이 다른 존재에게 있다는 세르펜스의 말에 동의한 순간, 생각의 주도권까지 함께 넘겨버렸다.
"아, 아아아─! 불쌍한 나의 커그···!"
이번에도 메숭이는 세르펜스의 말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실핏줄이 터진 건지, 탄곡하는 메숭이의 두 눈에 검붉은 피눈물이 흘렀다.
중상급 악마를 소환할 정도로 수많은 생명을 죽인 메숭이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이용당한 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아니, 정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게 맞기는 맞을까? 자신의 것이어야 할 존재가 타인에 의해 망가진 것에 화가 난 건 아닐까?"
어느 쪽이든 이해하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역겹고 가증스럽다.
"죽은 연인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 하고 싶어···!"
세르펜스가 은밀하면서도 그윽한 목소리로 질문하자 메숭이는 갈급히 대답했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절하게 세르펜스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섬뜩하다.
어쩐지 세르펜스가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 분위기다.
"응? 연인? 아직 고백 전이라니까, 죽은 흑마법사는 저 메로우와 사귄 게···."
"서로 사귀자고 말만 하지 않았지 사귀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을 겁니다!"
나는 재빨리 휴마눈새의 말을 끊었다.
원래 스토커들은 상대방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사귀는 중이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부류라고.
세르펜스도 그것을 알기에 일부러 맞춰준 거라고 휴마누스에게 설명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면, 여태껏 세르펜스가 메숭이를 구워삶은 게 헛수고가 될 테니 참는다.
"그런 걸 용케 알아챘네. 아니, 내가 너무 눈치 없는 건가···?"
휴마누스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눈치 없다는 발언에 동의해 주고, 시선을 옮겨 메숭이를 살폈다.
다행히도 메숭이는 휴마누스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커그의 복수를 하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은 악마 숭배 세력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아는 건 커그를 통해 들은 내용뿐이라서···."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건, 법숭이 쪽이었나 보다.
1년 넘게 법숭이와 둘이서 악마 소환을 준비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메숭이는 법숭이에게 반해서 악숭 세력에 들어가 악마와 계약했고, 악숭 세력은 점조직으로 대륙 이곳저곳에 흩어져 숨어서 활동한다.
그러니 메숭이는 법숭이 이외의 악숭이는 만난 적도 없겠지.
따라서 아는 것도 없을 테다.
"세력의 크기나 본거지는 커그도 모른다고 했고···. 커그가 간부 자리에 올랐다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을 텐데···."
"간부 자리는 미끼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쪽이야 물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메로우이자, 악마와 계약한 마인이니 이용 가치가 있어 살려뒀겠지만. 흑마법사는 대체품이 많으니, 악마를 소환하고 나면 갖은 이유를 대며 그자를 죽였을 게 분명합니다."
메숭이가 과거를 회상하느라 꾸물거리는 게 답답했던 걸까?
세르펜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정 지어 말하며 다시 메숭이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악마가 아까 커그를 죽이려 했던 거구나!"
"네, 틀림없습니다."
"으으···, 간악한 악마 놈들···! 아아, 복수하고 싶어. 하지만 아는 정보가 없어, 아아악!"
짜증이 확 솟구쳤는지 메숭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짝사랑 상대의 시체를 곁에 두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데다가, 분노로 머리가 굳어버렸으니 떠오르는 게 없을 만도 하다.
그런 메숭이를 향해 세르펜스가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어서 달래듯 말했다.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좋습니다. 어떻게 제물을 모아서 악마를 소환한 것인지. 주변에 다른 악마 숭배자들은 없는지. 악마 숭배 세력은 무슨 계획으로 바닷속에서 악마를 소환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그쪽과 계약한 '아와티니아'라는 악마는 어떤 악마인지···. 그 외에도 떠오르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무언가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라는 것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다.
그러던 와중 세르펜스가 구체적인 질문을 제시하자, 메숭이의 히스테리가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풍랑이 심한 날만 골라, 배를 몰고 나온 사람들을 사고인 척 가장하여 죽였지. 그러다가···."
메숭이가 세르펜스의 물음에 하나씩 답변했다.
제물을 모은 방식이야 메숭이가 직접 한 것이니만큼 고민 없이 답이 술술 나왔다.
짐작하던 것과 엇비슷한 내용이라 대충 흘려들었다.
"바다는 나와 커그, 둘만의 공간이야. 다른 악마 숭배자들은 없어."
두 번째 질문 또한 메숭이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르펜스가 이런 쉬운 질문들을 앞쪽에 껴 넣은 건, 메숭이의 입을 쉽게 열기 위해서일 거다.
그 증거로 메숭이는 세 번째 질문까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바닷속에서 악마를 소환한 이유는 제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랬어. 바다를 지배하여 스메른을 고립시키면, 효율 떨어지게 혈옥으로 뭉칠 것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살아있는 제물을 바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안정적인 수급처를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커그가 말했지."
이제까지 메숭이가 떠들어댄 얘기 중, 가장 악숭이다운 소리다.
"왜 다들 그런 눈으로 쳐다봐? 메로우인 내가 메로우를 제물로 쓴다는 게 이상해? 어째서? 악마 숭배자의 대부분은 인간들이고, 제물로 가장 잘 쓰이는 것 또한 인간들인걸?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너희 인간들은 툭 하면 전쟁을 벌이며 서로 죽고 죽이잖아. 그런데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악숭 세력을 배신하여 정보를 술술 불고 있다고는 하나, 메숭이 또한 악숭이었다.
"···이제 그쪽이 계약한 악마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아···, 아와티니아 님은 현명하면서도 두려운 분이셔. 물을 지배할 수 있는 나에게, 바람까지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 그 덕분에 커그가 나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지만. 그분도 결국은 악마. 내가 커그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커그가 이용당한다는 걸 알려주지 않으셨어. 바닷속에서만 지내서 바깥소식을 모르는 우리에게, 성검의 주인이 다가왔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으셨어. 명백한 배신이야."
이번에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던 걸까?
메숭이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두려움을 묻어두기 위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는지 메숭이가 서두를 뗐다.
"그러니까 말할게, 아와티니아 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