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94화 (694/925)

694회

76. 공작님과 바다 (19)

이어질 뒷말을 고대하며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순간.

메숭이가 돌연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메숭이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휴마누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용케 물러서지 않고, 여차하면 성검을 뽑아 메숭이의 숨통을 끊어 버릴 기세로 검 자루를 굳게 잡았다.

휴마누스를 믿긴 해도 이런 급작스러운 사태에 멀뚱히 앉아서 관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를 포함하여,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일행이 벌떡 일어났다.

비전투원인 나와 마력을 전부 소진한 에드나와 아니마, 신성력이 바닥난 리에나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반대로 앞으로 나선 사람도 있었다.

푸로르의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적갈색 털이 자라나는 듯하더니, 양팔이 곰의 앞다리 형태로 변화했다.

그리고 세르펜스, 윈스톤, 유지스는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세르펜스도 신성력을 다 썼으면서 거기서 뭐 합니까?! 위험하게시리!"

나는 세르펜스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끌어당겼다.

녀석이 서 있던 자리는 윈스톤의 든든한 등으로 메꿔졌다.

"아, 아아···?"

당황하며 놀란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메숭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에서 멎었던 피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리고 코에서도, 귀에서도. 심지어는 목 부근의 아가미에서도 피가 새어 나왔다.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흐르면 흐를수록 검붉은 피는 점차 검어졌고, 종래에는 먹물보다도 새까맣게 변질하였다.

메로우 특유의 연녹색 피부에도 검은 핏줄이 돋았다.

"아, 아으···. 아와, 티니아··· 님···. 자, 잘못···, 끄르륵···."

울걱 울걱, 메숭이가 핏물을 토해내면서도 무어라 말을 하려 애썼다.

목구멍에서 들끓는 피 때문에 내뱉는 한 어절, 한 어절이 무척이나 힘겹게 느껴졌다.

아와티니아.

메숭이는 그 악마의 이름을 간절하게 쥐어짜 냈다. 그리고 몹시 절실하게 사죄했다.

현재 메숭이의 몸에서 일어난 일과 아와티니아라는 악마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휴마눈새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으리라.

- 끽, 끼긱-. 쩌적···.

메숭이의 목에 채워 놓았던 마력 구속구의 이음매가 뒤틀리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새까만 핏물이 이불을 물들이며 넓게 퍼졌다.

느낌이 심상치가 않다.

그때 폭신한 무언가가 얼굴에 닿으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세르펜스가 내 어깨에 둘러진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까지 덮어버린 탓이다.

"휴마누스! 어서 저자의 목숨을 끊고, 즉시 신성력으로 정화하십시오!"

이 목소리는 세르펜스의 것이다.

휴마누스가 녀석의 말대로 따랐는지, 메숭이의 목에서 나던 그륵그륵 핏물 끓는 소리가 멎었다.

"설마하니···, 악마가 그 메로우를 통해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건 아니겠죠?"

"그랬다면 이자가 정보를 흘릴 마음을 먹었을 때 곧바로 손을 쓰지 않았을까?"

유지스와 휴마누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메숭이의 몸에서 이변이 생긴 타이밍이 타이밍인지라, 두 의견 모두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악마가 지켜보다가, 메숭이의 입에서 자신의 정보가 나오려는 순간 직접 조처를 한 걸 수도.

아니면 메숭이가 자신에 관한 정보를 발설하려 했을 때. 자동으로 트리거가 발동되도록 선조치를 취해 둔 걸 수도 있다.

그렇기에 딱 잘라서 누가 옳다고 손을 들어주기가 모호했다.

"그 메로우는 알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적었습니다. 그러니 역으로 이쪽의 정보를 파악하고자, 일부러 심문을 당하도록 놔두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르펜스 나리가 신성력을 전부 소모했다는 말도 들었을 텐데, 큰일 난 거 아닙니까?!"

조심성 많은 세르펜스는 유지스의 의견에 지지를 표했다.

그에 푸로르가 '헉!' 하고 헛숨을 집어삼키며 굳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일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전부 써버렸다고 말한 건···, 나잖아?!'

그냥 약해진 세르펜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깊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결과, 모두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게 되었다.

'심지어 일행 중에서 제일 위험해질 사람은 바로···.'

1회차에서는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아 엄청난 무위를 떨쳤던.

2회차에서는 악숭 세력의 참모로서 지략을 떨치고, 결정적인 순간 배신하여 마왕의 힘을 가로챘던.

여차하면 휴마누스 대신 성검을 쥐어, 그보다 더 강한 적이 될 게 분명한.

그리고 내가 보호하고자 했던.

'···세르펜스겠지.'

그 사실을 알면서 내가 어떻게 변명 따위를 늘어놓겠는가.

이 와중에도 폭신한 이불에 감싸여 보호 받는 현실에, 나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딴 이불, 그냥 치워버리고 싶은데 차마 치워낼 수가 없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여 대비는 해야겠지만, 적이 습격해올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다고 생각합니다."

이불 너머로 조곤조곤한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위로하고자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지, 잘 분간이 안 간다.

"아무리 저희가 지쳐있다고 한들. 어지간한 자들을 보내 봐야, 전력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마왕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더군다나 저희는 어디까지나 지친 것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테고요."

"예. '일반적으로' 신성력이 전부 회복되는 데 이틀가량 소요되니, 공격해 온다면 오늘이나 내일 중일 겁니다."

"새로운 악마를 소환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네요."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대화를 주고받으며, 악숭 세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추론해 나갔다.

나는 두 사람의 침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있자니 묘하게도 불안감이 서서히 가라앉는 듯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이 망망대해 한복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동력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예상할 수 있는 적은 공왕과 그녀가 부리는 마물과 사병들. 혹은 한 번도 모습을 본 적 없는 세 번째 악마 정도겠네요."

"하지만 공왕이 부리는 군단은 많은 제물을 모으기에 적합하고, 세 번째 악마의 혈액은 신성력을 억제하는 물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니. 확실히 이길 거라는 보장 없이 투입해도 좋을 인력이 아닙니다."

악숭 세력이 그들을 보낼 일은 결코 없을 거라며 세르펜스가 단언했다. 어찌나 단호하게 말하는지, 녀석의 목소리에서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그에 휴마누스가 의문을 표했다.

"초를 쳐서 미안한데···. 네가 신성력을 전부 소진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으니까, 나머지 인원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공격해 올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아?"

"그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선우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나 성립하는 것이잖습니까?"

"···어? 선우가 거짓말한 거야?"

세르펜스의 말에 휴마누스가 의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쓰고 있어서, 휴마누스가 이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손을 내저어 거짓말한 게 아니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한 방울이라도 쥐어 짜낼 수 있는 신성력이 남아있었다면, 세르펜스는 망설임 없이 내 몸에 남은 멍을 치료하는 데 썼을 거다.

게다가 귀빈실에 모여있는 일행의 기척조차 못 느껴서 갑판에도 다녀왔는데, 퍽이나 신성력이 남아있겠다.

"선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공왕의 마물 군단과 세 번째 악마는 악마 숭배 세력의 유용한 인력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대륙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저희는 그자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치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유인해내어 없앨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즉, 적들은 선우의 말이 거짓말이며 우리가 함정을 판 거라고 의심할 거라는 뜻이지? 맞지? 그렇지?"

거듭 확인 질문을 던지는 휴마누스의 목소리가 자신감 넘쳤다.

이미 답이 전부 나온 거나 다름없기에, 눈치보다는 지능의 영역이었거늘.

휴마누스는 눈치 없게도 본인의 눈치가 늘었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예, 틀림없이 그러할 겁니다."

"완전히 확신하는 모양이네?"

"메로우와 계약한 악마는 선우가 다쳤다는 것과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제가 모든 신성력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아! 그러게? 선우가 바다에 끌려 들어가기 전에 메로우가 기절해 버렸으니까!"

세르펜스가 정답을 떠먹여 주는 질문만 골라서 던지자, 휴마누스가 신나서 대답했다.

유지스라면 아예 결론까지 맞춰버렸을 텐데.

그 정도 눈치를 휴마누스에게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인가 보다.

'그래도 자잘한 성공 경험을 통해 모인 성취감은 성장의 밑거름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겠다.

그보다 세르펜스가 친구의 성장을 도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자랐다는 게 놀랍다.

녀석의 입에서 '응애' 소리가 나온 게 불과 엊그제 같거늘. 시간 참 빠르다.

"또한 저와 선우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그자가 잠깐 깨어나서 도로 기절시켰다고 하셨잖습니까."

"응, 그게 왜?"

"깨자마자 억지로 기절시키더니. 다시 강제로 깨워서 눈을 뜨자, 자리에 없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만 골라서 환자 대하듯 이불을 뒤집어씌워 놓은 것도 모자라. 제가 무력화되었다는 얘기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의심의 영역을 넘어, 불신의 경지에 다다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세르펜스가 말 한 세 가지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수상할 것 하나 없다.

여럿이 모이다 보면 늦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추워져서 이불을 덮을 수도 있고.

상황이 급박하다 보면 말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이게 전부 사실이기는 한데···.'

모아놓고 보니 묘하게 수상하다.

괜히 나와 세르펜스가 작전을 짜느라 늦게 온 것 같고.

이불을 뒤집어쓴 것도 '감기 기운이 올라오지만, 치료조차 못 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할까 봐, 세르펜스의 신성력이 똑 떨어졌다는 얘기를 은근슬쩍 흘린 것 같지 않은가.

"그,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할까요···?"

"할 겁니다."

반신반의하는 리에나의 물음에 세르펜스는 확언했다.

평소에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세르펜스가 저렇게나 자신하는 이유.

마왕이 우리의 사소한 행동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하나하나 전부 의심하며 분석할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의 원천.

그건 바로 [성검의 주인] 시기, 타락펜스의 행보 그 자체다.

'심지어 방금 전에도 메숭이를 말재주로 꼬드겨서 배신을 부추겼잖아?'

아와 어쩌고 하는 악마와 함께 실시간 감상 중이었든, 아니면 따로 보고를 받았든.

녀석이 메숭이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알게 되었다면.

마왕은 세르펜스와 타락펜스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머리에 새겨 넣었으리라.

'타락펜스를 쭉 지켜보았고, 신뢰를 내어 줬다가 뒤통수를 후려 맞은 전적이 있는 만큼. 사소한 것 하나조차 의심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나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기에 녀석의 주장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이불 밖에서 눈이 있는 부분을 손으로 잡듯이 꾹 눌러, 아까 흘린 눈물을 닦아내며 이불을 끌어 내렸다.

"뭐···. 세르펜스도 완전히 방심해도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냥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지. 다른 건 몰라도, 적들이 공격해 온다면 오늘이나 내일이라는 말에는 다들 동의하시죠? 그럼 내일까지는 조심하면서,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거로 합시다. 아! 일단 다 같이 식사부터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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