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회
76. 공작님과 바다 (23)
"저를 먼저 치료해서 본인 마음은 편해지고,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에 제가 반성하도록 하며, 그와 동시에 제게 간호를 받으면서 어화둥둥 달래지려 하다니! 그런 무시무시한 계획을 잘도 세웠군요."
"···그,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세르펜스가 소심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이미 전부 탄로 나 버린 거,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굳혔나 보다.
어떻게 해서든 내게 간호를 받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애초에 세르펜스는 도대체 왜, 자연적으로 신체를 회복하는 데 쓰이는 신성력을 붙들어 둘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신성력이 바닥날 때까지 굴려지고, 병이나 상처를 얻어도. 다음날이면 멀쩡한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그런데 돌봐주거나 치료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보통은 그냥 쉬면서 자연 회복을 기다리거나, 신성력을 지닌 다른 사람에게 치료를 부탁했을 텐데.
이 불쌍한 녀석은 그게 안 되었던 거다.
아플 때 혼자 있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다는데.
녀석은 항상 혼자 앓아야만 했고, 그것을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숨기자 세르펜스가 다소 강압적으로 행동한 건.
혹시 자신의 과거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래서 더 속상하고 화가 났던 게 아닐까?
'그래도 지금은 달라졌지.'
이제는 아프면 옆에서 간호해 줄 수 있는 보호자가 생겼다.
마침 배 위라서 앓아누워도 일정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나 보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계속 무리하면 더 아파질 텐데, 그래가지고 간호받는 기분을 제대로 낼 수 있겠어요? 끙끙거리며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간호를 받아 봤자, 기억에 남는 것도 없습니다. 적당히 아파야 엄살떨며 귀염도 받아보죠. 안 그래요?"
"그런···, 건가?"
"아이고,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더니. 모르셨구나?"
내 말에 설득력을 느꼈는지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많이 아프지 않고 엄살을 떨어도, 지극정성으로 돌봐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나 보다.
"네. 그러니까 일단은 쉽시다. 휴마누스도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르펜스가 지금보다 덜 아파지면, 저부터 치료해도 안 혼낼게요."
"···간호는?"
"그거야 당연히 해 드려야죠."
"정말로···?!"
별로 믿기 힘든 얘기도 아니건만.
세르펜스는 눈을 빛내며 정말이냐며 재확인을 요구했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녀석의 얼굴에 화악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빨리 인수인계 끝내고, 잘 준비 하세요."
"윈스톤 경, 이제 자세를 풀어도 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고개를 휙 돌려 윈스톤을 향해 말했다.
꽤나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다리가 저리지도 않는지, 윈스톤은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아공간 주머니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 가까이 다가온 윈스톤을 향해, 세르펜스가 질문을 건넸다.
"반성은 하셨습니까?"
"그, 그건···."
반성이 됐을 턱이 없다.
이 충성스러운 기사님은 주군의 물음에 차마 거짓말로 대답할 수가 없었는지, 쭈뼛거리다가 고개를 툭 떨궜다.
"그럼 머리는 좀 식으셨습니까?"
"···예."
윈스톤이 세르펜스의 두 번째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을 내놓았다.
침대에서 무릎 꿇고 손들기라는 해괴한 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나와 세르펜스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으니.
현타가 와서 냉정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주군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에 절치부심하며, 벌을 내려달라 청하는 건.
적어도 이곳 기준에서는 충성스러운 기사의 귀감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거기에 대고 세르펜스는 무릎 꿇고 손들기형을 내렸다. 이는 기사도를 모욕하는 행위에 가깝다.
세르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윈스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기사인 윈스톤 경에게는 모욕적인 벌이었을 텐데···."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한 건 접니다. 사과를 거두어 주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진심으로 경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잘못에 합당한 벌을 떠올릴 수 없어서, 그런 벌을 내렸던 겁니다."
"······."
세르펜스의 말에 윈스톤이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나 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이마에 올려둔 수건이 미지근해진 것 같아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물에 담갔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행동이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세르펜스와 윈스톤은 분위기 따위보다는 내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할 테다.
"윈스톤 경. 경이 없었다면, 저는 휴마누스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악마와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경이 있었기에, 전투가 마무리될 때까지 신성석의 힘이 버틸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에 결계가 깨지고, 선우가 바다에 끌려들어 갔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괴로운지 세르펜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건을 물에서 건져 짜내려던 순간이었다.
세르펜스가 수건을 가져가서 비틀어 짜낸 뒤 내게 돌려줬다. 나는 그것을 이마에 올리는 대신 목에 가져다 대었다.
"어쨌든 그러하니, 경께서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윈스톤 경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경 또한 제게 있어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앞으로는 받지 않아도 되는 벌을 자청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군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윈스톤이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그를 용서하며, 설풋 미소를 지었다.
"선우는 벌을 내리고 난 뒤, 제 팔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
"하지만 그건 경께서 부담스러워하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세르펜스의 말에 윈스톤이 흠칫 근육을 부풀렸다가, 이어진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에 들어갔던 힘을 뺐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 가끔은 손가락으로 콕 찔러보고 싶지만, 나도 예의란 게 있는 사람이니까 참는다.
"그럼 윈스톤 경, 저와 선우가 자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분의 수건과 물은 여기서 꺼내 쓰면 됩니다."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윈스톤에게 내 아공간 주머니를 넘기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침대를 꺼내어, 사이에 의자 하나 들어갈 공간만 남기고 내 침대와 바짝 붙여 놓았다.
'이제야 나도 맘 편히 잘 수 있겠네.'
나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물이 든 대야 속에 집어넣고 다시 누웠다.
세르펜스도 침대에 들어가 누웠고, 녀석이 앉았던 의자에는 윈스톤이 앉았다.
그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몸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윈스톤의 뒷모습이 보였다.
열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중간에 깰 줄 알았는데, 윈스톤이 제때제때 수건을 갈아준 덕분인지 푹 잘 수 있었다.
이마에 올려진 수건을 살짝 치우고 손을 갖다 대 보았다.
뜨겁지는 않은데, 이게 젖은 수건이 열을 흡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손에 열이 있어서 그런 건지, 혹은 열이 내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내가 깨어나며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세르펜스의 땀을 닦아주느라 몸을 돌리고 있던 윈스톤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깼소?"
"저, 마실 물 좀···."
나는 윈스톤에게 물을 건네받아서 바짝 메마른 목구멍을 적셨다.
그러고 나자 세르펜스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신성력에 자체 회복 기능이 있다니까, 나보다 빨리 정신을 차릴 줄 알았건만.
녀석은 미간까지 찡그려가며 눈을 감은 채, 열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혹시 세르펜스가 도중에 일어나서, 모아둔 신성력을 저한테 쏟아붓고 다시 잤어요?"
"그냥 처음부터 세르펜스 님의 열이 더 높았을 뿐이오. 세르펜스 님께서 종종 깨시긴 했지만, 선우 선배가 자는 모습만 확인하고 바로 주무셨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세르펜스의 상태가 더 안 좋았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바다에 가장 오래 들어가 있던 것도 녀석이었고, 내 다리를 치료하느라 젖은 옷을 장시간 입고 있었으니.
녀석이 나보다 아픈 것도 당연했다.
그런 주제에 쉬지도 않고 신성력을 모아서 나를 치료하려 했다는 게 괘씸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신 거요."
옆 침대의 세르펜스를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걱정을 읽었는지, 윈스톤이 묻지도 않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세르펜스가 멋대로 윈스톤에게 빌려줬던 내 아공간 주머니다.
"정신이 들었으면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소."
귀찮긴 했지만, 윈스톤이 권한 대로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찝찝한 건 둘째 치고 땀으로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나을 병도 안 낫는다.
최대한 몸 상태를 좋게 만들어 놔야,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덜 쓸 테고. 그래야 녀석도 빨리 나을 수 있다.
아공간 주머니를 들고, 부스스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
"서, 선우는?!"
갑자기 세르펜스가 벌떡 일어나서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녀석의 시선은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다가 잠깐잠깐 깰 때마다 내가 잘 있는지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안 보이니 많이 놀랐나 보다.
"선배라면 저쪽에 있습니다."
"저 여깄어요."
윈스톤과 내 목소리를 듣고, 세르펜스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제자리에 없어서 놀라게 만드는 거냐며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죽을 뻔했지?'
지금은 잘 살아있긴 하지만.
내가 바다에 빠졌던, 나를 영영 잃을 뻔한 그 순간은 녀석에게 엄청난 공포로 각인되었을 터.
악몽을 꾸었을 게 분명하다.
심지어 몸이 아프기까지 하니, 얼마나 정신이 불안정할까.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살짝 죄책감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냥 털어 보내기로 했다.
이런 거로 미안해하고 사과하면 세르펜스가 화만 낼 뿐이라는 걸 아니까.
바다에서 건져진 뒤로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고, 아프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 챙겨줘도 늦지 않다.
"세르펜스도 일어난 김에 옷 갈아입고 주무세요."
"음···."
세르펜스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나는 먼저 옷을 다 갈아입고 내 침대가 아닌 세르펜스의 침대에 누웠다.
돌아온 세르펜스가 멀뚱멀뚱 서서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침대 쪽으로 향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다.
"이리 와요. 자는 동안 손잡아 줄 테니까."
"···침낭에 들어가는 게 아니면, 나와 같이 안 자 주는 거 아니었나?"
"전 잠 다 깼는데요? 뭐, 누워서 눈 감고 있다 보면 다시 잠들 것 같기는 한데···. 윈스톤이 지켜봐 주니까 괜찮겠죠. 설마하니 제가 세르펜스를 깔아뭉개는 걸 가만히 지켜보겠습니까?"
"그렇군."
세르펜스가 실실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냉큼 내 옆자리에 누워 손을 잡았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뻐 보였다.
"동화책도 읽어 줄까요?"
"이따가. 선우가 다 낫고 나서···."
그 말을 끝으로 세르펜스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