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회
76. 공작님과 바다 (26)
나는 세르펜스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윈스톤을 바라보았다.
윈스톤은 잘 됐다는 축하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 대신.
"선우 선배가 먼저 제안한 것이니, 힘들다고 그만둘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미리 겁을 줬다. 벌써부터 고난이 예상되는 바다.
하지만 윈스톤의 말대로 내가 부탁한 것이니 한 입 가지고 두말할 생각은 없다.
열심히 배워서 내 한 몸 지키겠다고 말해 놓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두면, 아이 보기에도 부끄럽다.
"그런 걱정이라면 접어 두세요. 전 이래 봬도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소. 그리고 가끔은 안 해도 될 행동도 해서 탈이란 것 또한 알고 있소."
"윈스톤은 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요. 본래라면 입막음을 해야겠지만, 윈스톤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특별히 봐 드리겠습니다."
"······."
윈스톤이 '선배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무시했다.
세르펜스나 유지스였다면 이런 즉흥 설정극에도 훌륭한 연기로 받아쳐 줬을 텐데.
이것이 바로 일루미나티 간부와 일반 단원의 수준 차이인가 보다.
애석함을 느끼며 쯧쯧 혀를 차는 그때.
"으음···, 이제 신성력도 꽤 모였으니 치료하겠다. 괜찮겠지?"
모인 신성력의 양을 가늠한 건지, 세르펜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꺼냈다.
세르펜스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잡담을 떠든 게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거였다.
"치료를 하자마자 바로 탈진하는 건 아니겠죠?"
"아주 약간이지만, 신성력이 남긴 할 거다."
"좋아요, 그럼 치료해 주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세르펜스가 내 쪽으로 상체를 틀고는 내 가슴 중앙에 손을 얹었다.
이미 한쪽 손을 잡고 있었기에 그대로 신성력을 밀어 넣을 줄 알았건만.
하기야 감기 몸살을 치료하려면, 아무래도 손보다는 흉부 쪽에 손을 얹는 게 더 효과적이겠지.
신성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니 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나 보다.
"그럼 시작하겠다."
세르펜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스르륵 눈꺼풀을 닫았다.
녀석의 손바닥을 통해 따뜻한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몸속을 헤집는다기보다는 어루만지는 것 같다.
신성력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몸살을 앓느라 저릿했던 근육이 신성력이 스며들자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엉망이던 컨디션이 정상으로 되돌려지는 과정이기 때문일까?
나른한 듯하면서도 활력이 차오르는 모순적인 기분이 들었다.
발목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아파서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멀뚱멀뚱 앉아있기만 하니 괜스레 뻘쭘해졌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보니, 안경을 끼지 않은 세르펜스의 민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기다란 속눈썹이 평소보다 더 분명하게 보였다. 후- 하고 불면 살랑살랑 흔들릴 것만 같다.
하지만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테니까, 실행으로 옮기지는 말고 생각에서 끝내야겠다.
다행히도 치료는 금방 끝났다.
세르펜스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내 가슴에 올렸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몸 상태는 어떻지?"
"당연히 최고죠! 누가 치료해 준 건데."
"그렇다니 다행이군."
본인은 아직도 아픈 주제에, 녀석은 방긋방긋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건강해져서 기쁜 와중에 칭찬까지 받은 데다가, 이제 내게 간호받을 시간이 왔으니.
기쁨과 기대가 섞여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과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전 침대에서 내려가 볼 테니 손 좀 놔 주세요."
"······?!"
이게 대체 무슨 충격 받을 일이라고.
세르펜스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뜨자, 맑은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간호를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하시죠."
"···그래, 알겠다."
잠시 망설임이 있었으나 녀석은 잡고 있던 손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손을 잡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간호를 받는 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어느 쪽을 택하는 게 이득인지는 (스물)일곱 살 꼬마도 알 만큼 쉬운 문제였다.
"그럼 저는 유지스 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아, 윈스톤 경."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는 윈스톤을 불러 세웠다.
"말씀하십시오."
"한숨도 못 자면서 저와 선우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지스를 부른 뒤, 다시 돌아올 필요 없이 다른 방에 가서 주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윈스톤이 세르펜스가 권하는 휴식을 거절했다.
딱 잘라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예의상 사양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세르펜스가 자신을 간호 놀이에 끼워주지 않고, 따돌린다고 생각해서 저러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윈스톤의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혼자 구석에 찌그러져 땅을 파면 팠지, 자신도 끼워 달라며 적극적으로 주장할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답은 하나다.
앓아누운 세르펜스를 보며, 귀를 파닥거리며 흥분한 유지스를 위협 요소라 판단했던 게 틀림없다.
"윈스톤, 잠깐 나가지 말아봐요. 유지스를 부르기 전에 세르펜스의 차림새를 단정하게 손질해 놓읍시다."
"그러는 게 좋겠소."
윈스톤이 내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동의를 표했다. 추측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대화에 세르펜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 그렇게 지금 내 모습이 엉망인가···?"
세르펜스가 부끄럽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급한 대로 손가락을 세워 머리칼을 빗질했다.
정말로 이유를 모르나 보다.
이런 순진펜스를 상대로 애먼 상상을 하는 유지스의 취향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설마 배덕감을 즐기는 타입인가?'
이런 건 아직 (스물)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세르펜스에게 절대 알려줄 수 없다.
말을 하는 순간 휴마눈새와 같은 레벨이 되는 거다.
그렇다고 세르펜스가 울적해 하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녀석이 좋아할 만한 얘기를 해 줘야겠다.
"기다려요, 저부터 옷 갈아입고 도와줄 테니까."
"도와준다니···. 옷을 갈아입혀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네, 바로 맞췄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아팠을 때, 부모님께 받은 그대로 세르펜스에게 돌려줄 테니 기대하시죠."
"······!!"
내 비장한 말에 세르펜스가 솔깃한 표정을 짓더니, 방금 자신이 빗었던 머리를 다시 헝클어트렸다.
이따 빗질도 다시 해 달라는 뜻이리라.
'이 자식, 어리광 좀 부릴 줄 아는데?'
나는 서둘러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윈스톤에게 거울을 들려준 뒤 대충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세르펜스에게 다가갔다.
현재 녀석이 입은 상의는 팔을 끼우고 단추를 잠가 입는 셔츠가 아니라, 머리부터 끼워 넣어서 입는 튜닉 셔츠였다.
이런 옷이라면 '그걸' 할 수 있다.
대충 견적을 뽑아낸 뒤, 나는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서 갈아입힐 옷을 미리 꺼냈다.
그리고.
"세르펜스, 만세!"
"마, 만세···?"
내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나를 따라서 양팔을 하늘 높이 곧게 뻗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녀석의 상의 밑단을 잡고 위로 쭉 들어 올렸다.
눈 깜짝할 새에 반 벌거숭이가 된 세르펜스가 몸을 움츠렸다.
"아이고, 추운가 보네! 금방 끝나요, 금방!"
나는 세르펜스를 잘 달래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혔다.
어지간한 귀족은 옷 시중을 받는 게 무척이나 당연한 일일 텐데도.
녀석은 공작씩이나 되는 주제에 옷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무척이나 어색해했다.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장하다, 우리 공작님! 이제 머리만 빗으면 끝나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빗을 든 채 윈스톤에게 손짓하자, 그가 체념한 표정으로 거울을 들고 세르펜스를 비췄다.
거울 속 세르펜스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배실배실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새로운 경험에 재밌어하는 걸 테다.
"자, 다 됐습니다! 어차피 누워야 하니까 머리카락을 묶는 건 생략할게요."
이 정도면 유지스가 정신줄을 놓고 흥분하는 일은 없으리라.
윈스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게 거울을 반납하고 유지스를 부르러 나갔다.
나는 침대 헤드 보드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두 개의 베개를 쓰러트려 겹쳐 놓고, 세르펜스를 반쯤 앉듯이 비스듬하게 눕혔다.
그러고 나서 윈스톤이 앉았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물에 적신 수건을 있는 힘껏 꽉 짰다.
손바닥이 벌게질 정도로 용을 쓰는 내 모습에 세르펜스가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서 손을 꼼지락대는 게, 대신 짜 주고 싶은 눈치다.
"수건을 짜는 임무는 유지스에게 맡길게요."
"아주 좋은 생각이다."
세르펜스의 얼굴에서 걱정이 걷히며 확 밝아졌다.
나는 그런 녀석의 이마에 촉촉한 수건을 올렸다. 그러자 녀석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또 졸려요? 유지스더러 좀 나중에 오라고 할까요?"
"아니다. 그냥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르펜스의 감긴 눈이 뜨이는가 싶더니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서 꿈이 아니라는 건 확인하셨습니까?"
"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애초에 이건 꿈일 수가 없으니."
"꿈일 수가 없다고요? 왜요?"
"어린 시절 방에서 홀로 아픈 몸을 추스를 때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주지 않을까. 그리고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참 빈곤하기 그지없는 상상이지만, 그것조차 사치였기에 그 이상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 시절이 너무 힘들었다며 한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치고는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웠으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이렇게 불쌍하니까 동정해 달라며 갈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저런 평온한 표정은 짓지 않았겠지.
"그랬는데···. 선우는 언제나 내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는군."
세르펜스가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나와 눈을 맞췄다.
녀석이 힘들이지 않고 과거 얘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건, 그만큼 현재가 행복하기 때문일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테니, 앞으로는 꿈을 더 크게 가지세요."
"그래, 꼭 그래야겠군."
내 호언장담에 세르펜스가 후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높여 들어오라고 말하자, 유지스와 윈스톤이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세르펜스, 병문안 왔어요! 열은 좀 어때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세르펜스가 수건을 치워 이마를 드러내며 말했다.
유지스가 양손으로 자신의 이마와 세르펜스의 이마를 각각 짚으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열이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네요. 아까 들렀을 땐 엄청 아파 보였었는데,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유지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일말의 사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담백한 그 반응을 확인하고 나서야, 윈스톤이 안심하며 세르펜스에게 자러 가겠다고 보고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