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03화 (703/925)

703회

76. 공작님과 바다 (28)

다시 세르펜스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리에나 혼자였다.

"휴마누스 님은 에드나 님과 아니마 님의 방에 들렀다가 오신대요. 그리고 푸로르 님은 저를 간호해 주시다가 이제 막 잠드신지라, 피곤하다고 하셔서 저 혼자 오게 됐어요."

리에나가 푸로르 얘기를 꺼내는 순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숨도 안 자고 자신을 돌봐준 푸로르가 고맙고도 미안했나 보다.

"저, 그래서 그런데···. 푸로르 님이 일어나면 드실 수 있게, 간식을 조금 챙겨도 괜찮을까요?"

정정한다. 그냥 간식을 챙겨가는 게 눈치 보여서 그런 표정을 지었나 보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답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어 진저 쿠키를 몇 개 담았다.

봉투를 건네받은 리에나는 입구를 곱게 접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유지스가 리에나에게 뱅쇼를 한 잔 따라서 건넬 즈음, 휴마누스와 에드나가 도착했다.

이상한 일이다. 에드나가 있는데 아니마가 없다니.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두 사람뿐이다.

"죄송한데 간식을 좀 챙겨갈 수 있을까요? 아니마가 아프다며 방에서 쉬고 싶다고 해서요."

에드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간식을 챙겨가는 것쯤이야, 푸로르 몫의 쿠키도 따로 빼 준 마당에 안 될 건 없다.

그보다 에드나가 뒤에 덧붙인 말이 신경 쓰였다.

'아니마도 아픈가 보네? 전혀 몰랐는데···. 응? 아니, 잠깐만.'

걱정의 씨앗에 물을 줬더니, 엉뚱하게도 의심이 싹텄다.

나와 세르펜스가 잠들었을 때 아니마는 에드나와 함께 우리의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에드나가 아픈 아니마를 끌고 다녔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꾀병이죠?"

"네."

내 질문에 에드나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꾀병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냥 맞춰주고 있다는 뜻이다.

"원래 일부러 아픈 척하고 그런 애가 아닌데···. 세르펜스 님과 시온 씨, 리에나 님의 병문안을 다녀오고 났더니, 돌봄 받는 게 부러웠나 봐요. 원래는 이런 거 다 받아주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아서 이번에는 그냥 봐주려고요."

에드나가 열없이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이다.

세르펜스도 간호받고 싶어서 나를 먼저 치료했다는 점에서, 몸이 진짜로 아픈 것 말고는 아니마와 큰 차이가 없으니까.

만약 꾀병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세르펜스를 간호해 줬을 거다. 에드나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던 거겠지.

나는 에드나와 아니마, 두 사람 몫의 쿠키를 봉투에 담아주었다.

유지스는 휴마누스와 자신 몫의 뱅쇼를 잔에 따른 뒤, 병에 남은 것을 에드나에게 넘겼다.

에드나는 그것들을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후. 잔에 따른 지 오래되어, 거의 식어버린 나와 세르펜스의 뱅쇼를 마법으로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간식과 음료를 야무지게 챙겨놓고 바로 뒤돌아 나가기 눈치 보였나 보다.

"그럼 전 먼저 실례할게요. 아 참! 선우 씨, 리에나 님.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에요. 세르펜스 님도 빨리 나으세요."

에드나가 덕담을 남기며 꾀병 부리는 아니마와 놀아주러 갔다.

그렇게 방에 남은 사람은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 휴마누스, 리에나. 이렇게 다섯이었다.

"악마의 시체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완전히 풀어져서 작심하고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리에나의 눈치가 보였는지, 세르펜스가 공적인 얘기를 대화 주제로 올렸다.

그 질문에 답한 건 휴마누스였다.

"바닷속에 버리는 건 뭔가 찜찜해서 진작 묶어서 배에 고정해 뒀지. 나 혼자 성화로 태워버리기엔 너무 커서. 나중에 너랑 리에나가 완전히 회복되고 나면 같이 하거나, 섬까지 가져가서 메로우 사도들에게 부탁하려고."

휴마누스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저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시선에 부러움과 초조함이 담겼다.

왜냐하면 녀석의 손에는 아직 내가 맡긴 잔이 들려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것까지 포함하여 양손이 묶여있던 탓이다.

나는 녀석에게 맡겨뒀던 잔을 되찾아 왔다.

세르펜스는 한 손의 자유를 되찾았고, 팔을 쭉 뻗어서 굳이 멀리 있는 쿠키를 힘겹게 집어 들었다.

바로 제 앞에 쿠키가 있는데도 말이다.

참고 자료용으로 산 만큼 쿠키에 올라간 아이싱이 미묘하게 전부 달랐으니.

(스물)일곱 살의 세르펜스가 보기에, 쿠키 중 어느 하나가 유별나게 맛깔스러워 보여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이 집어 든 쿠키는 어린아이에게 만족감을 줄 만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눈과 안경과 활짝 웃는 입이 전부인. 심지어 그조차도 그냥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심심하기 그지없는 모양의 쿠키였다.

'알록달록 귀엽게 꾸며진 것도 많은데, 왜?'

마치 시간에 쫓겨서 대충 안경만 그리고 끝낸 듯한 쿠키를 소중히 들고, 세르펜스는 무언가를 쟁취해낸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내가 원래는 안경을 썼고 눈동자가 검은색이라고 말해줘서 그런가?'

내가 떠올렸지만 매우 합리적인 가설이다.

기껏 쿠키를 집어 든 주제에 좀처럼 먹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거로 보아, 그냥 정답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고작 쿠키에 별 의미 부여를 다 하네···.'

무엇이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확 그냥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쿠키를 뺏어 먹을까 하다가, 어린애 간식을 뺏어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 대신 아무 쿠키나 집어서 한 입 베어 먹고 뱅쇼를 홀짝 들이켰다.

짐작했던 대로 맛의 조화가 꽤 괜찮았다.

"기왕 섬까지 옮기게 되었으니, 그냥 메로우 사도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세르펜스는 차마 쿠키의 머리를 와그작 씹어 먹지 못하고, 휴마누스와 나누던 대화를 잇는 쪽을 택했다.

본래의 나와 닮은 부분이라고는 검은 눈과 안경을 썼다는 점뿐인데도 말이다.

"그래? 너라면 직접 나서서 확실하게 처리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수많은 메로우들이 희생되었잖습니까. 그러니 그들의 손으로 끝을 맺는 게···. 위로는 될 수 없어도, 감정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응, 그것도 그렇겠네."

휴마누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화가 끊기며 방 안에 숙연한 분위기가 깔렸다.

'세르펜스가 엄청 기특한 생각을 했네···?'

손에 쿠키를 소중하게 들고 있지만 않았어도, 하마터면 스물일곱 살의 성인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런데 그 쿠키, 먹으려고 집은 거 아니야?"

"이건···, 아껴둘 겁니다."

"왜?"

"······."

세르펜스가 휴마눈새의 말을 무시하며, 안경 쓴 쿠키를 자신의 앞에 고이 모셔 두고 다른 쿠키를 집어 먹었다.

유지스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눈새눈새는 멀뚱멀뚱 쿠키를 관찰하다가 헛소리를 해댔다.

"아!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 너, 안경 잃어버렸지?"

안경 쓴 쿠키를 빼둔 게, 안경을 새로 사는 걸 잊지 않기 위한 메모 같은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 기막힌 발상에 유지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 악마에 관해서 선우 님께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급기야 리에나까지 휴마누스를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휴마누스의 말에 반응하느라 대화가 산으로 가느니, 그냥 악마에 관한 주제나 계속 이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 보다.

"예, 말씀하세요."

"선우 님께서도 바다에서 악마가 소환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신 것 같던데, 그 이전 회차···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그때는 바다에서 악마가 소환되지 않았나 봐요?"

예상 밖의 상황에서 적에게 공격을 받았고, 메숭이에게 그것이 함정이 아니었다는 자백을 받았으니.

진작 받아야 했을 질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질문이 이제서야 받게 된 건.

내 몸 상태를 걱정한 일행들이 날 쉬게 해 주려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질문을 삼간 덕택이다.

"제가 모든 정보를 아는 건 아니라서요. 전 회차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가 인지한 것,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휴마누스는 첫 번째 시련을 받을 때 외에는 바다에 안 갔어요."

"그럼 혹시 '아와티니아'라는 악마에 관한 건···."

"그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메숭이와 계약만 하고 소환된 적은 없는 건지, 소환된 후 계약자가 있는 바다에서만 활동해서 휴마누스가 몰랐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요."

"아···, 그렇군요···."

전부 '모른다'로 귀결된 내 대답에 리에나가 탄식했다.

아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 아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다른 회차에서는 성검의 주인이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악마가 많이 소환되었구나. 그리고 그 정도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랬을 뿐이니까요."

내 사과에 리에나가 양손을 내저으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괜히 자신이 눈치를 준 것처럼 느껴져서 되레 미안해졌나 보다.

그렇게 나와 리에나가 서로 사과하며 분위기를 우중충하게 만든 그때.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유지스가 '짝!' 하고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상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만약 다른 회차에서도 바다에 악마가 소환된 거라면, 다행이라고 봐야겠네요! 본래라면 소환된 악마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텐데, 지금은 그분들을 구해낸 셈이니까요."

맞는 얘기다.

이미 없던 일이 되어버린 시간대에서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냥 유지스의 말대로, 현재의 시간대에서 구해낸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뻐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촉수 악마에 관해 미리 알았더라면, 현재의 시간대에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없는 장소에서 일어난 우리가 모르는 사건으로 인해 죽은 이들까지 전부 우리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같이 슬퍼할지언정, 부채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유지스 덕분에 어두운 분위기가 싹 걷혔다.

우리는 더 이상 악마에 관해 얘기하는 건 그만두고, 다른 얘기를 하며 간식 시간을 제대로 즐기기로 했다.

마침 떠들고 놀기에 딱 좋은 주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세르펜스에게 새 안경을 골라주는 것이다.

"어때요, 이 안경도 엄청나게 잘 어울리죠?"

나는 크레아토가 만들어준 안경이 든 보석함을 꺼내어, 세르펜스에게 이것저것 씌워보았다.

안경을 선물 받았던 날 한 번씩 전부 씌워봤었지만, 다시 보니 또 새로웠다.

그때는 세르펜스가 비협조적이어서 대충 쓰고 벗길 반복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세르펜스는 주는 대로 안경을 쓰고 마음껏 감상하라며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정말요! 안경을 쓸 때마다 이미지가 바뀌는데, 안 어울리는 게 하나도 없어요!"

유지스가 세르펜스의 안경이 바뀔 때마다 호들갑을 떨어댔다.

크레아토가 자신에게 선물했던, 오렌지색 보석이 박힌 연녹색 안경까지 세르펜스에게 씌워보며 즐거워했다.

"대체 무슨 안경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 거야?"

"세르펜스가 너무 아름답다며 드워프 장인이 선물로 줬습니다."

"아르케 왕국에서 침대를 샀을 때도 느꼈지만, 세르펜스는 정말 드워프에게 인기가 많구나···?"

내 대답에 휴마누스가 감탄을 흘리며 안경을 뒤적거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그러고 보니 안경을 하나하나 안경집에 담은 것도 아니고 한 통에 다 모아놨는데, 안경알에 흠집 난 게 하나도 없다.

일반적인 유리로 만든 안경알이 아닌가 보다.

"리에나 님도 가만히 있지 마시고, 무언가 감상을 말해 보세요!"

유지스가 리에나를 붙들고 함께 세르펜스 주접을 떨어보자며 제안했다.

공작저에서 하던 버릇이 튀어나온 거다.

조용히 음료와 쿠키를 먹으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듯 보였던 리에나가 움찔했다.

"그게···. 아! 테라룸 왕국에 같이 못 가서 다행인 것 같아요. 만약 같이 가셨다면, 드워프 사도분들께 엄청나게 시달리셨을 테니까···."

리에나가 말끝을 흐리며 나와 유지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꼭 '이렇게 하면 되는 거 맞나요?'라고 질문하는 듯했다.

"아주 훌륭합니다! 리에나는 재능이 있어요!"

"···참 고맙네요."

내가 짝짝짝 박수를 치며 칭찬해주자, 리에나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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