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회
76. 공작님과 바다 (29)
"어? 여기 안경 줄도 있네?"
보석함을 뒤적거리던 휴마누스가 안경 줄을 발굴해냈다.
그러고 보니 저게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안 그래도 녀석에게 안경 줄을 사 줄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내가 인정한 최고의 장인인 크레아토가 만든 안경 줄이 있으니, 굳이 살 필요가···.
"수도에서 생활할 때라면 모를까, 여행 중에 그렇게 화려한 안경 줄은 쓸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세르펜스가 선수를 쳤다.
그러면서 안경 골라주기 놀이는 이제 끝이라는 듯 보석함에서 안경을 직접 골라 썼다.
녀석이 선택한 건 보석함 속 안경 중에서 가장 심플한 은테 안경이다.
자세히 보면 얇은 테에 화려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긴 했으나,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 이상 티가 잘 안 났다.
결과적으로 안경다리에 작은 녹색 보석이 박혀있다는 것만 빼면, 원래 쓰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안경알도 똑같이 둥글었다.
'평상시에도 세르펜스의 얼굴에 자신의 작품이 올라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데일리용 안경이려나?'
나는 크레아토의 제작 의도를 넘겨짚으며 보석함을 닫았다.
자고로 예쁜 것에 예쁜 것을 더하면 곱빼기로 예쁜 것이 나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르펜스는 미친 미모를 자랑했다.
그런 녀석의 얼굴에 화려한 안경과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안경 줄까지 더해지면, 시선만 끄는 정도로는 절대 끝나지 못하리라.
'여차하면 순식간에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오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세르펜스에게 더 화려하고 예쁜 안경을 씌울 수 없다는 건 좀 아쉽긴 했지만.
그런 건 녀석의 말대로 공작저로 돌아가고 나서 실컷 씌우면 그만이다.
나중을 기약하도록 하자.
'그리고 안경 줄은···, 심플한 거로 하나 사 줘야겠네.'
내가 인정한 최고의 장인이 만든 안경 줄을 놔두고 기성품을 사야 한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내가 속으로 아쉬움을 삼키고 있던 그때.
"그런데 세르펜스는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니면서 안경을 왜 쓰는 거야? 싸울 때 방해만 되잖아."
휴마누스가 툭 던지는 듯한 말투로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한때 나도 그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안경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컨셉질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그보다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주제에, 이제 와서 그걸 물어보는 건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휴마누스가 눈치 없었던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던가.
그냥 휴마눈새답게 별생각 안 하고 지나쳤던 거겠지.
지금은 세르펜스가 안경을 쓰는 이유가 더 궁금하니까, 휴마누스의 뒷북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유지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세르펜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안경을 쓰게 된 계기는···. 갑작스레 가주가 되고 난 후, 제가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경을 쓴다고 눈이 가려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르펜스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완전한 진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애초에 '갑작스레 가주가 되었다.'라는 전제부터 거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철저한 계획하에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를 살해했으니까.
'리에나의 눈치를 보느라 거짓을 살짝 섞은 거겠지.'
그래도 제 감정을 숨기고 싶어서 안경을 썼다는 말은 진짜일 테다.
세르펜스의 말을 듣자 하니, 녀석이 안경을 쓰기 시작한 건 가주가 된 직후인 듯하다.
제 손으로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에 녀석의 자기혐오가 극에 달했을 때다.
'어떻게든 자신을 숨기고 싶은데, 도망칠 수 있는 곳이 겨우 투명한 유리알 너머뿐이었다니.'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녀석의 어린 시절 얘기는 몇 번을 들어도 가슴이 아릿하다.
"지금도 그래?"
"지금은···, 괜찮습니다."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의 물음에 대답하며 힐끔 내게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서 이제는 그런 이유로 안경을 쓰는 게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따스하고 보드레한 미소를 지었다.
무척이나 다정한 녀석이다.
"그럼 이제 안경은 안 써도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안경을 벗겨내려 손을 뻗었다.
세르펜스가 그 손길을 피하며 안경을 벗길 거부했다. 계속 안경을 쓰고 싶은가 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10년도 넘게 안경을 써 왔으니, 갑자기 벗고 다니라고 한다면 거부감이 들 만도 하다.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쪽쪽이 끊기' 미션을 받은 아기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쪽쪽이와 다르게 안경은 오래 끼고 있어도 나쁠 게 없고, 패션 요소도 있으니. 억지로 끊어야 할 이유 또한 없다.
불편하면 자기가 알아서 벗고 다니겠지.
그러한 생각에서 나는 세르펜스의 편을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입을 뗐다.
"냅둬요. 안경캐가 안경을 벗는 건, 안경캐를 애정하는 분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장발캐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엄청난 배신이라고요!"
"뭔 소리야, 그게?"
"세르펜스의 개성을 인정해주자는 뜻입니다."
"지금 나만 얘 말을 이해 못 했던 거 아니지?"
휴마누스가 세르펜스, 유지스, 리에나. 세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에 리에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휴마누스의 말에 동의했으나, 나머지 두 사람의 뜻은 달랐다.
유지스는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매만지며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딱 봐도 내가 장발과 안경 쓴 캐릭터를 선호한다고 착각한 모양이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녀석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기 위해 정정하지 말고 내버려 둬야겠다.
"뭐야, 그렇다는 건···. 세르펜스는 장발에 안경 쓴 사람을 선호하는 특정 집단의 취향을 만족시키고자, 안경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아요, 휴마누스 님."
"선우의 본래 육체가 안경을 썼다는 말을 듣고, 따라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오늘도 헛소리하는 휴마누스의 행태에 리에나가 딱 잘라 부정했고,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정곡을 찔렀다.
세르펜스가 살짝 놀란 눈으로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선우가 원래 안경을 썼다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세르펜스가 일부러 먼 곳에 놓인 쿠키를 집어가서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죠. 선우와 관련된 게 아니면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유지스가 세르펜스 앞에 놓인 쿠키의 안경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속내를 전부 들킨 게 민망했는지 세르펜스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휴마누스가 그딴 걸 어떻게 아느냐며 혼자 투덜거렸으나,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나마 휴마누스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리에나 정도였지만.
"환자분도 계시는데,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이만 나가 볼 테니, 푹 쉬세요."
애석하게도 리에나는 빨리 이 방을 나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리에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눈치는 없어도 배려심은 있는 휴마누스가 따라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잠잠한 걸 보면 세르펜스 네 예상대로 적들은 안 올 생각인가 보네. 이젠 여차해도 메로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가 신성력이 모이는 대로 치료부터 해."
휴마누스와 리에나는 나갔고 유지스는 남았다.
두 사람이 나가자 세르펜스는 쿠키를 눈에 잘 띄는 곳에 신줏단지처럼 모셔두고, 침대에 편히 누웠다.
내가 보기에는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으나 세르펜스 본인은 무척이나 만족한 듯 보였다.
나는 애써 쿠키를 못 본 척하며, 아까 자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동화책을 꺼내어 읽어주었다.
유지스는 물수건을 짜서 이마에 얹어주며 성심성의껏 세르펜스를 간호해 주었다.
세르펜스의 표정이 점차 나른하게 풀어지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선원이 저녁 식사라며 머쉬룸 크림 리조또를 가져왔다.
이제 두 번째 약속을 지킬 차례다.
"슈우우웅~! 리조또 들어갑니다, 아 하세요!"
"세르펜스, 이쪽도 있어요!"
나와 유지스가 양옆에서 세르펜스에게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세르펜스는 가만히 앉아서 조심스럽게 쿠키를 손에 쥔 채, 리조또를 받아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인형도 아니고 쿠키는 좀···, 그렇지 않나?'
슬슬 위생적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놈의 쿠키를 버리든지 먹어치우든지 해야지 안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며 쿠키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때.
드르륵, 의자 미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지스가 빈 식기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도 슬슬 가 봐야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세르펜스, 선우."
"벌써 가시는 겁니까···?"
세르펜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유지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녀석의 표정에 유지스가 귀를 파닥거리며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결국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세르펜스의 미련 가득한 시선이 닫힌 방문으로 향했다.
"이제 세르펜스도 잘 준비 합시다. 그 쿠키 안 먹을 거면 이리 주시고요."
"이건 먹는 게 아니다."
"그럼 뭔데요?"
"미니 선우다."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놓은 대답을 듣고,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제대로 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본 적이 없었던 탓일까?
잠깐 사이 쿠키에 저만큼이나 정을 붙인 걸 보니 기가 막히다 못해 딱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저건 아니지.'
나는 세르펜스가 미니 선우라 우기는 쿠키를 쳐다보았다.
감정이 메마른 듯 하이라이트 하나 없이 까맣고 동그란 눈과 반대로, 입은 활짝 벌어져 웃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조금 섬뜩해졌다.
저런 것을 미니 선우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미니 선우든, 미선이든! 어딜 봐서 그게 절 닮았다는 겁니까? 보면 볼수록 무서운 데다가, 심지어 그 쿠키는 머리카락도 없는 대머리잖아요!"
"이런 간략한 모습이라서 선우라고 이입할 수 있는 거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인 형태가 갖춰졌다면, 오히려 선우를 연상시키지 못했을 거다. 선우를 본떠 만든 것이 아니란 걸 아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녀석이 저 생강 쿠키에 꽂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과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녀석이 과연 내 생김새에 관심이 없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그리고 안경이라는 키워드만으로는 구체적인 외양을 떠올릴 수 없다.
끽해봐야 시온의 얼굴에서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바꾸고, 안경을 씌운 모습을 상상하는 게 최선일 테지.
하지만 그게 진짜 나와 같은 모습이 아니란 걸 녀석도 알고 있을 거다.
몰랐다면 진작에 검은색 염색약을 주문 제작해서 내 머리에 들이부었겠지.
녀석이 성의 없이 생긴 쿠키를 보고 나를 연상하게 된 건, 바로 몇 없는 특징이 내 설명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리라.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그냥 생략된 거라 생각하고 넘기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