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06화 (706/925)

706회

76. 공작님과 바다 (31)

"대답이 없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아하니, 정말 그런 거였나 보군. 이번에도 몰랐다는 말로 넘어갈 생각인가?"

"네! 잠은 무의식의 영역이니까요!"

"······."

내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는지, 세르펜스가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본들 해결되는 건 없다.

세르펜스도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고 조용히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쓸쓸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 편히 잘 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신발을 신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돌연 몸을 홱 틀어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서 모른다고 대답하면 녀석은 제대로 생각해 보라며 화를 낼 게 뻔하다.

'지금쯤이면 누군가는 일어나서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같이 아침 먹자고 부르러 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말 한마디 하자고 방음 스크롤을 찢는 건 좀 아니올시다 싶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어 글로 적었다.

[ 이대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 진짜 눈동자 색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어서. ]

글을 읽은 세르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래서 사실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나도 좀 기대고 싶어서 밝히기로 했다.

"혹시 부담스러워요?"

"그럴 리가.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

세르펜스가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설픈 위로보다 낫다.

만약 녀석이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소리라도 했다면 정말 상처받았을 거다.

[ 아도르가 진짜 나를 알고 싶어 하고, 알아봐 줘서 정말 기뻤어. ]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바래는 법이고, 사람은 쉽게 적응을 하는 생물이다.

언젠가는 머릿속으로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 '유선우'가 아닌 '시온 리벨론'의 얼굴이 나타나게 될 테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는 나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 본모습을 잊어버린다는 건 역시나 두려웠다.

그것이 두렵다고 자각하는 것조차 겁이 나서 아예 무의식 저편으로 묻어버릴 만큼.

누군가를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건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잊어버린다는 건, 내 정체성의 일부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내 얼굴에는 내 가족들의 모습 또한 담겨 있으니까···.'

그냥 작은 조각 하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크게 도려내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그들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남처럼 느껴지면 어쩌나, 무서웠다.

그래서 고작 눈동자 색이 같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똑같다는 것에 안도한 모양이다.

[ 내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도록 붙잡아줘서. 그리고 나 스스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줘서, 내가 더 고마워. ]

온점을 찍어 문장을 끝맺음 짓고, 종이를 세르펜스에게 건네며 선물이라 말하였다.

세르펜스는 속이 복잡한 듯한 표정으로 내가 건넨 선물 아닌 선물을 받아서 읽었다.

"나는 그저···, 선우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선우를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나라는 알량한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모르는 선우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도 선우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겁니다. 저는 그 관심 덕택에 힘을 얻은 거고요. 그러니 나쁘게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선우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세르펜스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아공간 주머니 속에 고이 챙겨 넣었다.

아무리 기분이 씁쓸해도 수집품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아침 먹자고 누군가 부르러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회중시계는 바다에 빠졌을 때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내 배꼽시계가 식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누가 부르러 오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와 세르펜스는 간단하게 씻은 후 외투를 챙겨 입고 갑판으로 향했다.

일행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있었다.

"일어났어? 안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슬슬 부르러 갈까 했는데."

"참고로 식사는 배에서 내린 후에 하기로 했어요."

가장 먼저 나와 세르펜스를 발견한 휴마누스가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주었고, 유지스가 나를 위한 참고 사항을 덧붙였다.

어쩐지 식사 시간이 다 되도록 깨우러 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당장 아침을 먹는 게 아니니, 최대한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느라 그랬나 보다.

"그보다 아팠던 건 좀 어때?"

"이제 다 나았습니다."

"그래? 잘 됐다!"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몸 상태가 어떤지 물어, 건강하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환하게 웃었다.

유지스는 그 대화를 듣고 나서도 영 불안했는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직접 세르펜스의 이마를 짚어서 열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윈스톤은 특별한 행동을 취한 건 아니나, 표정으로 안도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으며.

푸로르와 리에나는 세르펜스에게 건강해져서 다행이라는 평범한 인사말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에드나는···.

"세르펜스 님이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에요, 시온 씨."

건강해져서 다행이라는 내용은 앞의 두 사람과 비슷했으나, 청자(聽者) 선택이 남달랐다.

아니마는 그런 에드나의 옆에 꼭 붙어서 '다행이네.' 하고 메아리처럼 말했다.

'에드나에게 귀댁의 자녀분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똑같이 말해 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꾀병이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겨서 관뒀다.

그 대신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흔한 인사말을 건네고, 고개를 돌려 뱃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섬이 수평선을 뚫고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스메른 왕국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이기도 한, 저 섬에는 '카티오빌'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스메른의 섬' 혹은 그냥 '섬'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스메른 왕국의 유일한 영역이었으니까.

메로우들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저 섬이 스메른 왕국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엥?"

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세르펜스였다.

"너무 난간에 가까이 붙지 마십시오."

"지금도 대충 세 발짝가량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최소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있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희게 질려있었다. 내가 또 바다에 빠질까 봐 불안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선원들을 의식하여 존댓말을 쓰는 걸 보면 얘도 참 대단하다.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두 발짝 뒤로 물러나서 섬이 아닌 바다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새까맸던 그 날의 밤바다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보이는 바다는 한없이 푸르렀다.

그 때문인가 의외로 괜찮았다.

하지만 어두운 밤바다를 보면 나도 겁먹지 않을까 싶다.

'아, 아니다···.'

무심코 머릿속으로 떠올린 밤바다의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겁먹을 게 확실하다.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까만 물속에서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모습을 숨긴 그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내 발목을 채갈 것 같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내가 두려워하는 건 바다가 아니라 나를 끌고 간 촉수인가 보다.

촉수 악마의 시체는 배의 뒤꽁무니 쪽에 묶여있다고 하니, 그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그건 그렇고 한동안 문어숙회 같은 건 못 먹겠네.'

쫄깃쫄깃한 그 식감을 떠올려 보며, 아쉬움에 긴 한숨을 푸욱 내뱉었다.

정 먹고 싶어지면 눈을 가리고 다른 사람에게 먹여달라고 해야겠다.

배가 나아갈수록 섬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냥 큰 섬처럼 보였던 것이 점차 커지며, 수평선을 밀어내고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윽고 섬에 다다라 배가 멈추자 휴마누스가 난간 너머로 상체를 내밀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간과 너무 멀어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배를 옮겨 준 메로우가 대답한 걸 테다.

휴마누스는 메로우들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눴다.

식사를 마친 뒤 신전으로 찾아가겠다는 것과 악마의 시체에 관하여, 메로우 사도에게 미리 말해 달라는 내용이다.

메로우가 물속으로 들어갔는지 풍덩 소리가 들려왔고, 휴마누스가 아래를 내다보느라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제 내리자."

우리는 앞장선 휴마누스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배가 고물을 넘어 완전히 폐물이 되었는데도, 우리를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선장과 선원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휴마누스가 보상을 두둑이 챙겨 주기로 약속했나 보다.

'그보다 이곳의 식당은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나? 부디 그래 줬으면 좋을 텐데···.'

이런 내 소원이 빛을 발한 건지 영업 중인 식당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육지에서 찾았던 식당과는 반대로 이곳에서는 육고기를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섬을 나가는 대로 얼마든지 찾아 먹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아쉬워하기는커녕 기쁘게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거래를 위해 섬을 찾았다가, 활개 치는 메숭이에 관한 소식을 듣고 발이 묶여버린 상인이나 선원들인 것 같다.

그중에서도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유독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내버려 두고 악숭 세력을 씹고 뜯기 바빴는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다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까지 건드리기에 이르렀다.

"대체 성검의 주인은 악마 숭배자들도 안 잡아가고,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성검의 주인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그들의 뒤에 있는 테이블에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섬에 메로우들만 있었다면 아르케 왕국에서 그러했듯, 괜히 눈치 보며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손님들도, 가게 주인도, 아마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까지도.

어디를 보든 전부 인간뿐이었다.

"성검의 주인씩이나 되어서, 바다에 악마 숭배자가 나타났다는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건가?"

상인씩이나 되어서 바다에 악숭이가 나타났다는 정보도 입수하지 못하고, 냅다 배를 띄운 게 누군데.

사돈 남 말하고 앉았다.

이곳에 휴마누스가 절대 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가만히 두면 더 험한 말이 나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선을 넘는 건 순간이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은 머지않아 섬 전체에 퍼질 테다.

제법 큰 섬이지만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행적까지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다.

결국에는 휴마누스가 모르는 척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고, 관용을 베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될 거다.

'황태자라는 신분상, 얕보여서는 안 되니까.'

휴마누스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기 전에,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가 눌러 쓴 후드를 젖혔다.

"나를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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