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회
76. 공작님과 바다 (32)
난데없이 대화를 끊고 들어온 낯선 목소리에 상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휴마누스의 머리칼을 확인한 순간, '허업!'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자지러질 듯 놀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휴마누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돌연히 웃음을 뚝 멈추고 정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바다에 악마 숭배자들은 없으니, 안심하고 배를 띄워도 될 걸세."
휴마누스가 자신들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상인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걸까?
일어나거나 바닥에 무릎 꿇고 빌 생각조차 못 하고, 상인들은 의자에 앉은 채로 굳어버렸다.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착한 친구인 휴마눈새가 아닌.
황태자 휴마누스는 지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면면을 쭉 훑어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애타게 나를 찾는 이들을 우연히 만나고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쉽구나.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 내 조언 하나 해 주겠네. 보아하니 상인인 듯한데 입이 너무 가벼운 듯하여 걱정이 되는군. 계속 그 일을 하다가는 언젠가 패가망신할 조짐이 보이니,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나을 걸세."
휴마누스는 자신의 흉을 보다가 걸린 이들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는 상인들은 그의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다.
'얼굴을 기억해 뒀으니까, 앞으로 상업 활동을 이어나가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의 귀족 화법이라 여기겠지.'
실제로 훼방을 놓거나 압력을 가할 생각만 없을 뿐.
휴마누스도 자신의 말이 협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긴 할 거다.
제국의 황태자는 말의 무게를 잊지 않고, 단어 하나조차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니까.
'그 정도 위협은 해야 한다고 판단했나 보네.'
사실 이 정도면 굉장히 온화한 축에 속했다.
만약 성질 더러운 권력자가 비슷한 험담을 들었다면, 앉은 자리에서 놈들의 목을 뎅겅 잘라 버릴 수도 있다.
하물며 지금은 범 대륙적 전시 상황이 아니던가.
이곳이 제국이 아닌 타국이라는 건, 장해도 아니다. 더구나 저들은 이곳 스메른의 주민인 메로우조차 아니다.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하에 헛소리를 떠드는 놈들에게 즉결 처분을 내린다 한들.
그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다.
'평판이 좀 나빠지기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철혈 군주 이미지 메이킹을 하면 해결된다. 결단력과 과단성으로 포장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휴마누스가 지향하는 길은 그쪽이 아니기에,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휴마누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벌벌 떠는 상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제야 상인들이 굳어있던 몸을 움직여, 죄송하다는 말을 비명처럼 외치며 부리나케 도망쳤다.
아마 저들은 배를 띄워 육지에 다다르자마자 상단을 정리하지 않을까 한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난 상태로 상업 활동을 해 봤자, 그간 모아온 재산을 축내고 빚더미에 오를 뿐이니까.
휴마누스는 상인들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 없겠지만, 놈들이 그 생각을 알 리가 만무하다.
상인들이 도망치며 거칠게 문을 밀고 나간 탓에, 문에 걸려있던 작은 종이 딸랑딸랑 흔들렸다.
그 종소리의 여운이 거의 가셨을 즈음.
"헉, 계산!!"
휴마누스의 등장으로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식당 주인이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계산대를 박차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털레털레 걸어들어왔다.
상인들을 못 잡았나 보다.
"나 때문에 도망친 것이니, 계산은 내가 대신 하겠네."
"아, 아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그냥 팁이라 생각하고 받게나."
"그,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휴마누스가 빳빳한 100만 아스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자, 가게 주인이 꾸벅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돈을 받아든 가게 주인은 계산대로 돌아가는 대신에 주방으로 향했다.
우리의 음식을 특별히 더 신경 쓰라고 말하러 간 게 아닐까 싶다. 겸사겸사 돈 자랑도 하고.
그렇게 소란이 가라앉고.
휴마누스는 기존 성검 일행이 아니던,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일행을 돌아보며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는 이런 모습 보는 거 처음이지? 괜히 민망하네, 하하···."
방금까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온몸으로 주장하듯, 위압적인 기세를 흩뿌리던 권력자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순박한 청년만이 남아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조···, 좋지 않은 상황이 자주 있어요?"
에드나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자체 순화하며 손을 들어 올려 질문했다.
그 물음에 대답한 건 휴마누스가 아닌 푸로르였다.
"너무 잦아서 일일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야. 성질 같아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죄다 쥐어 패버리고 싶은데···!"
푸로르가 치를 떨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을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쳐야 했던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쌓인 게 많은가 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휴마누스가 욕을 먹을 땐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입만 살았네 싶을 테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성검의 주인]에서 푸로르가 막 성검 일행에 합류했을 때.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휴마누스가 말릴 새도 없이 그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던 전적이 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랬던 푸로르가 지금은 참기만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화가 나서 날뛰는 그녀를 말린 건 휴마누스였다.
푸로르에게 얻어맞던 자들은 자신이 휴마누스에게 용서받았다며 멋대로 생각했고.
그 모습을 본 누군가는 휴마누스가 놈들의 헛소리를 인정한 거라고 곡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내서 속이 후련해지는 건 잠깐이고, 결과적으로 답답함만 늘어날 뿐이라는 걸 직접 경험한 까닭이다.
성검 일행은 모르는 척할 수 있으면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최선이고, 넘어갈 수 없다면 휴마누스가 입조심 하라고 경고하는 게 차선이란 결론을 내렸다.
"정말 다들 너무하네요. 휴마누스는 대륙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걸 몰라주는 걸까요?"
유지스가 울적한 표정으로 귀를 축 늘어뜨렸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더구나 휴마누스는 황태자인데, 다들 너무 서슴없이 비난하는 거 아닌가?"
"그건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휴마누스를 비난하는 자들이 소수였다면, 지금처럼 가볍게 입을 놀리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세르펜스가 평소보다 살짝 큰 목소리로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얘기가 분명했다.
혼자였다면 조용히 닥치고 있었을 주제에, 머릿수만 믿고 함부로 떠든다며 꼬집어 말한 거다.
녀석도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다.
"성검의 주인은 영예를 등에 업고,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질 줄 알았는데. 함께 다니며 옆에서 보니 고생만 더럽게 하고, 인정은 못 받고. 뭐 이런 게 다 있냐···. 어휴!"
부조리한 현실에 푸로르가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휴마누스는 쓴웃음을 머금었고, 그를 제외한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푸로르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제 음식도 나왔으니까, 그런 얘기는 그만하자."
일행들의 불만이 더 커지기 전에 휴마누스가 말을 돌렸다.
확실히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한탄을 늘어놓는 것도 보기에 안 좋을 것 같다.
가만히 보호만 받는 이들은 아무 장소에서나 떠들어 대는데,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전 대륙인들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며 시시비비를 가릴 것도 아니고.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했다가, 몇몇 양심 없는 자들이 반발하고 나서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악화될 거다.
그래서 입을 다물긴 했는데 쉽게 진정될만한 기분이 아니다.
마침 직원이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도 속에서 타오른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세르펜스, 역대 성검의 주인도 다 이랬어요?"
나는 옆에 앉은 세르펜스에게 귓속말로 질문했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상관없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을 때.
모든 것은 휴마누스가 못 미더워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라며, 사람들이 또 헛소리할 기회를 잡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역대 성검의 주인들이 쓴 일지를 포함하여,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르펜스도 귓속말로 대답했다.
즉 당대에 와서 처음 터진 문제라는 뜻이다.
성검펜스도 비슷한 고난을 겪었으니 휴마누스의 문제는 절대 아니고.
그냥 현재의 대륙 사람들이 유난히 이간질에 잘 휘둘리고 있다는 거겠지.
'대체 왤까?'
고민하는 동안, 테이블 위로 음식이 담긴 접시가 하나둘 놓였다.
레몬 드레싱을 뿌린 상큼한 연어 샐러드, 관자 버터구이, 풍부한 해산물에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를 더 해 끓여 만든 스튜인 부야베스 등.
해산물 퍼레이드가 따로 없다.
요리는 맛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왜?'라는 물음과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반도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질문했다.
"벌써 그만 드시는 겁니까?"
"네, 입맛이 없네요."
정작 본인도 별로 먹지 못했으면서, 내 대답에 세르펜스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가게에서 먹지 말고 포장해서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입구에는 신관 한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신전 중앙에 있는 샘에 도착했다.
저 샘은 바다와 연결된 일종의 통로다.
[성검의 주인] 속 휴마누스는 저 샘을 통해 첫 번째 시련 장소로 향했다.
길 안내를 맡았던 메로우 사도는 무뚝뚝한 말투에, 짓궂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는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서, 휴마누스가 숨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켜고 난 뒤에야 조처했다.
본격적인 시련에 앞서, 정신력과 인내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드워프 사도들의 뺑뺑이보다는 낫나?'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히익 소리를 내며 세르펜스의 뒤로 숨어버렸다.
안 그래도 갑툭튀에 약한데, 깊은 물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점 때문에 곱절로 놀란 것 같다.
"어, 뭐야. 놀랐나 보네."
고의로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지, 하얀 눈동자의 메로우 사도가 긴 손톱으로 볼을 긁적이며 멋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뻘쭘해져서 세르펜스의 뒤에서 나왔다.
세르펜스가 미련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더 숨어 있어도 되는데···.' 하고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