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회
76. 공작님과 바다 (34)
양치를 하고 전신을 가볍게 씻어내는 동안 욕조에 물이 다 받아졌다.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욕조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물이 가슴 위쪽까지 차올랐다. 딴짓하느라 물을 제때 끄지 못한 탓이다.
갑갑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뜨끈뜨끈한 물이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느낌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그 느낌을 만끽하는 그때.
"선우. 욕조에 들어가면 대화 시작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 말투가 사뭇 조심스럽다.
가족이 떠올랐다는 내 얘기를 듣고 홀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첨벙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말을 건 걸 테다.
녀석의 배려심이 고마웠다.
'그건 그렇고···. 집사가 목욕할 때마다, 걱정되어 욕실 문 앞에서 애처롭게 애옹거리는 고양이가 따로 없네.'
안 그래도 고양이 같던 녀석에게 고양이스러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평소라면 과연 명불허전이라며 웃어넘겼을 테다.
그러나 어째서 녀석이 저리도 전전긍긍하는 건지 알고 있기에 웃을 수가 없다.
겨우겨우 '시온 리벨론'으로서의 삶이 마감하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믿음을 줬는데.
이렇게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당하니, 그간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져버렸다.
그것이 너무 씁쓸하고 허망했다.
"선우? 왜 대답이 없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5초 안에 대답이 없으면 들어가겠다. 5, 4, 3···."
"대화할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무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나 보다.
나는 세르펜스가 마지막 숫자를 입에 담기 전에 서둘러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음, 그렇군.'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서 화제는 떠올렸나?"
안도의 한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바로 말을 붙여왔다.
대화가 끊어질까 봐 불안했나 보다.
사실 대화 주제 같은 건 생각도 안 했기에 '어, 그게···.' 하며 뜸을 들이고 나서야, 가까스로 할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세르펜스는 당대 성검의 주인만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나 때문일 거다."
"왜 또 그런 소릴 합니까? 제가 속상해할 거 알면서."
"음···."
이번에는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녀석은 이내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세상을 지키는 것을 남의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예? 남의 일? 자기가 사는 세상의 일인데도요?"
"자신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것도 상당히 오랜 기간. 그렇게 된 원인은 선우도 잘 알겠지."
"···네, 아주 잘 알죠."
세르펜스가 어째서 본인 때문이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은 성검의 주인이 될 내정자. 즉, 세르펜스를 너무 믿고 의지했다.
녀석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모두의 희망이었다.
대륙에 크나큰 재앙이 닥쳐와도,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 해결해 줄 거라 사람들은 기대했다.
그들의 기대심은 2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 보편적인 상식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다.
성검이 내려온 이래, 악숭이들이 물밑에서 칼을 가는 동안.
사람들은 평화에 찌들었고 그것이 쭉 유지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대 성검의 주인들보다도 월등히 강하고 완벽한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 혼자서 모든 적을 물리쳐 줄 테니까.
'그게 그들의 상식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악숭 세력이 활동하기 시작하자 피해가 발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손바닥 하나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성검의 주인이 아무리 바삐 움직인다 한들, 전 대륙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모두 막기는 불가능하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검의 주인이 평화를 지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려 25년에 걸쳐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상식이었으니까.
'그래서 평화가 무너졌을 때, 그 책임을 성검의 주인에게 묻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거야···.'
1회차의 성검펜스가 온갖 비난의 말들을 들으며 홀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여 망가져 버린 것도.
2회차의 휴마누스가 최소한의 지원만 받으며 싸우다가, 결국에는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을 모두 잃고 동료들의 힘만으로 버텨야 했던 것도.
전부 그래서였던 거다.
선택의 날 이전. 아니, 심지어는 선택의 날 이후에도.
악숭 세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사람들은 세상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긋했다.
휴마누스가 아닌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며 불만을 터트리긴 했으나.
입방아만 열심히 찧을 뿐, 대륙의 안전을 위해 무언가 대비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남 일도 아니고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었던 건.
악숭 세력이 슬쩍 흘린 이간질에 동조하며, 아무런 경계 없이 그 내용을 널리 퍼트렸던 건.
성검의 주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던 건.
'정말로 남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라니···.'
망치로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이론적으로는 대충 알겠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는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욕실 안을 울렸다.
뜨뜻한 물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도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사람들의 시야는 선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좁다. 자신이 보고 듣는 것만이 세상 전부라 여기고, 시야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냥 지나친다. 문제점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남의 일이라면, 가볍게 여기며 쉬이 조롱한다.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며 나서주는 자는 극히 드물지. 그리고 그 문제가 커지고 커져 자신에게 다다르게 되었을 땐···."
"···어째서 그것을 진작 해결하지 못했냐며,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던 이들을 헐뜯고 비난한다. 그렇게 말하려던 거죠?"
나는 세르펜스가 흐린 뒷말을 이어받아 말했다.
문 너머에서 '그래.' 하고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세르펜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말이에요···."
"성검이 내려와 주인을 선택하기까지 걸린 총 25년의 세월 동안. 성검의 주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만든 건, 악마 숭배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네."
"흐음···. 그러한 인식이 처음 생겨난 과정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악마 숭배 세력의 영향이 전혀 없는 건 아닐 듯하군···."
악숭 세력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제 와 그런 건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대륙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뻔한 이유 외에도.'
일행들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쉬어야 할 때 쉬고, 먹어야 할 때 먹어서 최상의 컨디션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가 잘 해내고 있다고 확신하며, 보람을 느끼고 자신감 있게 나아가려면.
대륙은 최대한 온전한 모습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되도 않는 비난을 듣는 일 또한 없어야겠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안 잡힌다.
"선우, 이만 물속에서 나오는 게 좋겠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넌지시 건네진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혹시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흐른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물은 아직 따뜻했다.
"네? 얼마 안 있었던 것 같은데···. 물도 아직 덜 식었고···."
"내 말대로 해라. 지금 선우의 호흡이 너무 불안정해서 그런 것이니."
"······."
세르펜스의 지적에 나는 내 숨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아, 하아. 언제부터인가 가쁜 숨이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일어나다가 현기증이 일면, 혼자서 애쓰지 말고 내게 도움을 청해라."
"···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가슴을 누르던 수압이 사라져 숨 쉬는 건 훨씬 편해졌다.
세르펜스의 우려와 달리 어지럼증 같은 것도 없었다.
가만히 서서 그 사실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욕조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서둘러 구석구석 몸을 씻고 머리까지 감고 나서 옷을 입고, 닫히다 만 문을 활짝 열었다.
문 옆쪽의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앉은 세르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계속 그러고 계셨어요?"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춥다. 몸이 식기 전에 침대로 들어가 있어라. 또 감기 걸릴라."
세르펜스가 내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어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 부정하며,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는 녀석이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닌 원래 방 안에 있던 거다.
"네, 그럴게요. 세르펜스도 빨리 씻고 오세요."
"···그럼 금방 씻고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잠시 갈등하는 듯 보였으나 세르펜스는 결국 욕실로 들어갔다.
탁 소리를 내며 문이 완전히 닫혔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슬며시 1cm가량 열렸다.
나는 작게 실소를 흘리며 침대로 향했다.
아직 잘 시간은 한참 멀었지만, 꼭 잘 때만 침대에 들어가라는 법은 없다.
가까이에서 보니, 두 개의 침대 중 하나가 미묘하게 봉긋 솟아 있었다. 아까 세르펜스가 가리켰던 침대다.
이불을 걷자, 마개를 꽉 닫은 유리병이 몇 개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붉은 보석 같은 것이 들어 있었고, 손을 대 보니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발열석을 넣어 따뜻진 물로 이불을 데워 놓은 거다.
그 덕분에 침대 안은 따끈따끈했다.
하지만 자칫 병이 깨질 위험이 있으니,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옆 침대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하나 남은 병을 품에 안고 침대에 들어가 앉았다. 이불도 몸에 걸쳤다.
세르펜스의 정성 덕분에 훨씬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최고다.
"세르펜스, 고마워요."
"···천만에."
문을 살짝 열어둔 덕분인지 욕실에서 흘러나온 대답이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곧 물소리가 들려왔기에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가만히 눈을 끔벅이며 뭘 할까 고민하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사각 쟁반을 하나 꺼냈다.
무언가를 먹기 위함이 아니다.
무릎을 세워 앉아 허벅지에 쟁반을 기댔다. 얼추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자세가 나왔다.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번에는 종이와 만년필을 하나 꺼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자.'
편지에 쓸 내용은 많았다.
최근 바다에도 빠지고 크게 앓기까지 했으며, 그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까.
진짜 가족들에게 보내지는 거라면, 절대로 편지에 담아내지 못했을 얘기다.
그러나 이 편지가 가족들의 손에 들어갈 일은 결단코 없다. 그저 내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쟁반에 종이를 대고 펜을 쥔 손에 힘을 줘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얇은 종이를 사이에 두고 단단한 쟁반과 펜촉이 부딪혀, 글을 쓸 때마다 '딱딱딱딱···.' 하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