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10화 (710/925)

710회

76. 공작님과 바다 (35)

그렇게 두서없는 글을 얼마나 써내려갔을까?

- 벌컥!

물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펜스가 욕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씻고 나오겠다 장담했던 대로 욕조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샤워만 하고 나왔나 보다.

심지어는 옷도 반쯤 입다 말았다.

녀석은 셔츠에 팔을 끼우며 내가 앉아있는 침대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러고는 펜을 쥔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손이 떨리고 있길래."

"······."

일행들이 싸우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을 때.

그리고 물에 빠진 뒤. 발목 부상을 뒤늦게 알아채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몸살로 앓아누웠을 때.

떠올렸던 생각과 느꼈던 감정들을 배출하듯 써 내려가다 보니, 감정이 많이 격해졌나 보다.

아니, 격해졌다.

따뜻한 물병을 배 위에 올려두고 포근한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음에도, 손발이 차게 식고 몸이 떨렸다.

그러던 와중 세르펜스가 손을 잡아 주어 차가웠던 손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단단하게 붙잡은 녀석의 손에 의해 떨림이 멎었다.

"···괜찮은가?"

부드럽게 묻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온갖 설움이 밀려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내 반응에도 세르펜스는 침착했다.

내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느린 박자로 등을 토닥거렸다.

안정감이 들자 울음이 터져나왔다.

씻자마자 급하게 나오느라, 채 말리지 못한 녀석의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경 쓰이긴 했으나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만큼 내가 걱정되어 급하게 와줬다는 뜻이니 오히려 고마웠다.

"으음···."

세르펜스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내가 쓰고 있던 편지를 읽고 있나 보다. 어차피 녀석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던지라, 그냥 읽게 놔뒀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아프거나 힘들면 말하기로 약속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감정을 글로 옮겨놓은 직후인데도 녀석에게 말하자니 입이 안 떨어졌다.

그런데 방금 쓴 편지는 수신자만 세르펜스가 아닐 뿐.

모두가 싸울 때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바다에 빠졌던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고, 이후에는 생각할 게 많아서 묻혀버렸던 두려움 등.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다.

편지에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날것 그대로 써재끼며 부모님과 누나에게 실컷 투정 부렸다.

그 내용을 세르펜스가 읽는다고 생각하니 살짝 부끄러워지긴 했으나 후회되지는 않는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상호 교류는 필수다.

편지를 써서 감정을 갈무리하는 건 가능해도, 전화는커녕 편지조차 보낼 수 없는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또 외롭고 서러워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무서운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

세르펜스가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다고 대답해야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거짓말하는 게 되어버리니까.

정말 무서웠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통틀어 가장 무서웠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세미타 거리에서 스크롤 한 장만 들고 악숭이들에게 쫓겼을 때도 아찔하긴 했지만, 세르펜스가 나타나서 구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르펜스가 구하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세미타 거리에서는 발목에 촉수가 감겼을 뿐이고, 이번에는 촉수에 잡혀서 바다에 끌려가 의식을 잃었다.

진짜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거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그때도 촉수에 발목을 잡혔었네?'

촉수에 노이로제가 생길 것 같다.

전생에 촉수와 원수라도 졌나 싶지만, 대체 어떻게 살아야 그런 것과 원수가 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길 관뒀다.

"···선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나를 떼어 놓고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갑자기 진정된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엉뚱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군. 대체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야,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게 가능한 거지?"

두 번이나 나를 위협했던 촉수에 치를 떨고 있었는데 엉뚱한 생각이라니. 굉장한 오해다.

나는 변명을 하려다가, 울음과 섞여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 대신 더 위로해 달라는 의사 표현으로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내 어리광에 만족했는지, 세르펜스는 자세히 캐묻길 포기하고 다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나는 선우의 그런 점 또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진지하지 못하다며 눈살을 찌푸릴지 몰라도.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내가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는 건, 선우의 그런 점 덕분이다."

나긋나긋한 세르펜스의 미성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딱히 신성력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마음이 탁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일이 녀석의 세 치 혀에 놀아나 매달리듯 의존하려 든 것도 이해가 갔다.

이렇게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데, 어떻게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선우는 항상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니까, 전투 중 아무것도 못 했다며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윈스톤 경도 선우는 보호 대상이 아닌, 함께 싸워나가는 동료라고 말했잖은가? 벌써 그 얘기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문댔다.

기억하고 있다.

다른 일행들은 악숭 세력과 싸우고자 소중한 사람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본인만 소중한 이를 곁에 끼고 다닌다며.

세르펜스가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칭하고 자책했을 때, 윈스톤이 했던 얘기다.

그걸 세르펜스가 이럴 때 인용하여 말하다니. 낯짝 한번 두껍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적들과 싸우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선우가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는 건, 선우가 내 뒤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위기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선우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세르펜스 혼자 으쌰으쌰 힘냈다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긴 했다. 무척이나 고마운 말이다.

내 존재만으로 힘이 난다는 말을 들으니, 나 또한 힘이 났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약속해다오."

"노력···해 볼게요."

"노력하다가 안 되면 말해라. 어떻게든 설득해 줄 테니."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펜스가 설득해 준다고 말하니, 신뢰도가 장난 아니다.

녀석이라면 진짜로 나를 설득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녀석에게 의지하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수 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겠다.

"이제 좀 진정이 됐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내 울음이 완전히 멎고 나자 세르펜스가 넌지시 물어 왔다.

울음을 다 그쳤는데도 계속 기대고 있기 뭐해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덕분에요."

내 대답을 듣고, 세르펜스가 안도한 표정으로 '후···.' 하고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걱정이 많았나 보다.

"그런데 이 편지 말인데, 계속 쓸 생각인가?"

"일단 마무리는 지어야겠죠?"

"···괜찮겠는가?"

세르펜스가 눈썹을 오므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편지를 써 내려가던 내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마무리 인사랑 보내는 사람 이름, 추신 정도만 적고 끝낼 겁니다. 그래도 고향의 언어로 다시 적는 건 패스하려고요. 이걸 쓰면서 감정이 정돈되긴 했는데···. 여기에 적힌 게 여러 번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라서요."

"그래, 잘 생각했다."

세르펜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완전 어린애를 대하는 태도가 따로 없다.

녀석이 나를 어린애로 여겨서 이러는 건 아니고, 녀석이 아는 위로 방법이 내게 배운 것뿐이라서 그렇다.

그걸 알기에 녀석의 위로 방식이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기껍고도 뿌듯했다.

"세르펜스, 진짜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편지를 마무리 짓게 손 좀 놔 주실래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게 해 다오."

내가 손을 떼어내려 하자, 세르펜스가 아예 반대 손까지 동원하여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간절하기까지 한 행동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나도 노력하겠다. 선우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그렇다고 이제껏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더욱 노력하겠다."

"네, 고마워요. 그치만 노력하다 안 돼도 자책하진 마세요. 세르펜스나 다른 사람들은 항상 목숨을 내놓고 싸우잖아요."

"그런 말은···."

"저도 노력할게요! 어느 정도의 위험은 스스로 막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음.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죠?"

나는 재빨리 말을 이어서 세르펜스의 말 허리를 뚝 끊어냈다.

세르펜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선우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해야겠군."

"그렇게 도발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보다 수건은 왜 안 들고나온 겁니까? 머리카락 좀 말려요. 무슨 놈의 물이 끝도 없이 떨어지네! 아니, 잠깐만. 지금 보니 옷도 다 젖었잖아?! 빨리 갈아입고 와요."

내가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자, 그제야 세르펜스가 손을 놓아주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로 향하는 세르펜스의 뒷모습을 보며, 그래도 단추를 잠그기 전이라 귀찮음을 덜어서 잘 됐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공간 주머니 속에 산처럼 쌓여 있는 빨랫감들이 떠올랐다.

'방금 씻을 때 쓴 수건이랑 같이 내놓으면 신관들이 싫어하려나···?'

옷과 수건뿐이면 모를까.

제대로 씻지 못하여 소금기 가득한 몸으로 뒹굴뒹굴한 침구류까지 빨아야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이불 빨래를 시키면 나 같아도 싫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자.

"선우? 편지를 마무리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새 상의를 갈아입은 세르펜스가 수건으로 긴 머리카락을 감싸며 질문했다.

쓴다던 편지는 왜 안 쓰고 가만히 앉아 있냐는 물음이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빨래를 해 주는 도구는 이 세상에 없겠죠?"

"그런 도구는 없지만, 돈을 주면 빨래를 해 주는 사람은 널렸지."

어째서 이 세상에 세탁기가 발명되지 않았는지 설명해주는 대답이었다.

마법으로 세탁기를 만든다고 해도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건 돈 많은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돈으로 사람을 부리기 때문에 세탁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 누구도 세탁기를 만들려 하지 않았던 거다.

즉, 이 세상에 세탁기가 없는 건 세르펜스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왜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몰라요."

나는 '흥!' 하고 콧바람을 내며, 다시 쟁반에 종이를 받치고 편지를 이어 쓸 자세를 취했다.

물론 행동만 그러할 뿐. 정말로 녀석에게 삐지거나 화난 건 아니다.

[ ···힘든 일은 많지만, 그래도 곁에서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당장 돌아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친구 복 하나는 끝내주게 타고난 막내 선우가 -

p.s. 나를 따라 하며 성장해가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뿌듯하면서도 마음이 훈훈해져. 엄마 아빠도 나를 키우며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

다 쓴 편지를 세르펜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의외의 부탁을 해 왔다.

"혹시 괜찮다면, 나도 이 밑에 한 줄만 적어도 되겠는가?"

"네? 뭐, 안 될 건 없는데···."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 내가 말을 물리기라도 할까, 세르펜스는 내게서 펜을 뺏어 들고 잽싸게 무언가를 적었다.

[ 추신 :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선우>는 꼭 지키겠습니다. ]

"대체 무슨 말을 쓰시는 겁니까?! 저는 죽으면 돌아갈 뿐이지만, 세르펜스는 그냥 끝이잖아요? '최선을 다해서'로 고치세요."

"으음···."

세르펜스가 목숨을 어쩌고 부분에 고침표를 써 내용을 수정한 뒤, 내가 시켜서 고친 거라고 사족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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