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12화 (712/925)

712회

77. 공작님의 짧은 휴가 (2)

모든 준비 운동을 끝내고, 푸로르는 허약 체질 트리오를 데리고 연무장 구석으로 향했다.

본래 내 훈련 때문에 연무장에 온 것이니만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저쪽 세 사람은 기본자세부터 배워야 하는지라 굳이 넓은 공간이 필요 없기도 했고.

뭐 하나 슬쩍 보니 주먹을 쥐는 방법부터 배우고 있었다.

'···갈 길이 멀어 보이네.'

지금은 남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니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세니어를 맡기고 윈스톤 앞에 섰다.

윈스톤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는데, 평소에 사용하는 사람 키만 한 대검이 아닌.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장검 형태였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목검을 쓴다고 메꿔질 만한 실력차가 아니었으니.

핸디캡이라기보다는 맞을 때 덜 아프도록 배려해 준 거라고 봐야 했다.

'어쨌든 맞는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이걸 배려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고작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나, 무기를 든 거대한 체구의 근육질 사내와 마주 보고 있자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을 작정이오?"

"앗, 죄송합니다!"

윈스톤의 독촉에 나는 서둘러 아공간 주머니에서 목검을 꺼냈다.

요즘에는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한창 세르펜스에게 검술을 배울 당시, 녀석과 대련할 때 사용했던 목검이다.

안쪽에 철보다 무거운 금속으로 만든 심이 박혀 있어서, 일반적인 검과 비슷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내가 목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자마자 바로 공격해 올 줄 알고 바짝 긴장했건만.

어째서인가 윈스톤은 가만히 서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선배는 진검을 쓰는 게 좋겠구려."

"예?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아! 물론 제가 진검을 든다고 해도, 윈스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련은 처음 하는 거고, 혹시 사고가 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일단은 목검을 쓰면서 대련에 익숙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세르펜스와 대련 같지도 않은 대련을 할 때도 목검을 사용했다.

훈련 중 진검을 사용한 건 오직 허공에 휘두르며 검술 동작을 익힐 때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짜고짜 진검을 쓰라는 말을 들어도, 선뜻 검에 손이 가질 않는다.

슬쩍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녀석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런 세르펜스의 모습을 못 본 건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윈스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혹시 사람에게 진검을 휘두르는 게 거북하오?"

"그럼 마음이 편하겠어요?"

"마음이 불편하다면 더더욱 진검을 써야 하오. 그래야 실전에서 망설임 없이 적을 향해 진검을 휘두를 수 있지 않겠소?"

윈스톤의 말인즉, 자신을 대상으로 사람에게 진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라는 뜻이다.

부담감이 배가 되는 소리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위험이 닥치면 알아서 휘두르게 되지 않을까요···?"

"확실한 것도 아니잖소. 가능성 따위에 목숨을 맡기지 마시오."

내 말에 동의할 땐 언제고.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윈스톤의 말이 맞는다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숨을 운운하는 얘기에 마음이 움직였나 보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꼴이 박쥐가 따로 없다.

"후우─. 선배는 실전에 쓸 수 있는 검술을 익히고자, 내게 배움을 청한 것 아니었소?"

박쥐펜스를 흘겨보고 있자니 윈스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쳐다봤다가, 부리부리한 황금빛 눈동자와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화났···나? 하긴. 먼저 가르쳐 달라고 해 놓고, 교육 방침에 태클을 걸면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야차 같은 표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눈썹을 찡그린 채로 가만히 노려보기만 할 뿐인데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쉽게 말해서 조금. 아니, 많이 쫄았다.

"그, 그렇기는 한데···."

"선배는 그냥 적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시간을 끄는 것으로 만족할지 몰라도,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검을 든다면 적도 금방 눈치챌 것이오. 적이 일부러 검에 찔릴 것처럼 달려들면, 선배는 멈칫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게···."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소."

"···없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에 나는 백기를 들며 그의 말이 맞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윈스톤이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평소와 같은 덤덤한 목소리로 '거 보시오.' 하고 말했다.

진짜로 화났던 건 아니고, 그냥 겁을 준 거였나 보다.

"기왕 검을 배울 거라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상대를 죽이겠다는 각오로 검을 드시오."

"네?! 저는 아직 누구를 죽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선배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 중, 선배가 휘두른 검에 죽을 정도로 약한 자는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그건 그거대로 안심이 안 되는데요?"

"그럼 더 노력해서 적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우시오."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불가능할 테니, 마음 놓고 검을 휘두르시오."

"······."

그 엄청난 기적의 논법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윈스톤의 숨겨왔던 말발에 놀랐는지, 푸로르가 이쪽을 보며 '와···.' 하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참고로 리에나와 에드나, 아니마는 눈을 감고 복식 호흡에 집중하느라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왜 숨만 쉬는데 다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거지?'

내가 못 본 사이에 푸로르가 무언가를 시켰었나 보다.

"알겠어요. 윈스톤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까짓, 진검으로 대련하죠 뭐! 그런데 이건 그냥 순전히 호기심에 질문하는 건데요, 날이 있는 진검과 목검이 교차하면 목검이 잘려버리지 않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서 조절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진검의 날 부분과 목검이 맞부딪히지 않도록, 피하거나 검면을 때리거나 흘리거나 하겠다는 얘기다.

나와 윈스톤의 실력 차이가 극명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만약 선배가 이 목검을 벨 수 있게 된다면, 그때부턴 내가 날이 서지 않은 가검을 들겠소."

"엑, 그럴 땐 보통 상으로 뭔가를 주겠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소?"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요."

"그렇다면 그만 떠들고 빨리 검이나 드시구려."

"그만 떠들라니···. 윈스톤 방금 본심이 살짝 튀어나온 거 아닙니까?"

"······."

가볍게 농담을 던져봤는데, 윈스톤이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진짜로 본심이 튀어나온 거였나 보다.

여기서 더 떠들면 그가 목검을 휘두를 때, 감정이 실릴지도 모르니 그만 입을 다물어야겠다.

'세르펜스가 세니어를 충전해 놓지만 않았어도, 그냥 세니어를 들었을 텐데···.'

남의 대련을 구경할 뿐인데도 결계를 치고 버프까지 부여하며, 오두방정을 다 떠는 세니어가 내 대련이라고 해서 얌전히 있을 턱이 없다.

오히려 더 과보호하려 들겠지.

하는 수 없이 나는 기마 자세로 반쯤 죽어가는 아니마에게 다가갔다.

휴마누스에게 빌려줬던 내 옛날 검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꺼내 달라 부탁하자, 아니마가 환희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드나에게만 보여주던 얼굴을 내게 보여주다니···. 어지간히도 기마 자세가 힘들었나 보네.'

하나 기마 자세를 풀어도 된다는 아니마의 희망은 몇 초도 안 되어 무너져내렸다.

팔을 내리며 굽혔던 무릎을 살짝 펴는 순간, 푸로르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니마, 자세 원위치! 누가 바로 서도 된다고 했어?"

"그···치만, 검···. 꺼내 줘야···."

아니마가 우는 얼굴로 낑낑거리며 부질없는 반항을 시도했다.

그 모습에 에드나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아니마를 쳐다봤다가, 푸로르에게 정면을 보라며 혼이 났다.

"내가 꺼내 줄 테니까, 자세 계속 유지해. 복식 호흡도 잊지 말고."

"끄응···."

"딱 1분만 더 버티자, 할 수 있지?"

"못···해···."

푸로르가 아니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기어코 그녀의 옷을 뒤져서 아공간 주머니를 찾아냈다.

검술 선생님만 해도 너무 엄해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거늘. 이쪽 선생님도 만만찮게 엄한 것 같다.

'윈스톤과의 대련이 끝나면 푸로르의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나는 푸로르가 건네준 검을 받아들고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왔다.

"먼저 공격하시오."

"제가 세르펜스와 대련할 땐 수비밖에 안 해봐서, 선제공격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소. 검을 휘두를 줄 알고 달릴 수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소."

윈스톤의 저 말은 거짓말이다.

내가 달려나가며 휘두른 검은 그냥 허공을 가르게 될 테고, 나는 윈스톤의 목검에 맞고 쓰러지게 될 테다.

"안 올 거요?"

"갑니다, 가!"

윈스톤의 재촉에 나는 뻔히 보이는 미래를 애써 외면하며, 야아압 하고 기합 소리를 내며 땅을 박찼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나는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윈스톤이 휘두른 목검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선우!!"

내가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세르펜스가 소리쳤다.

아무리 연무장에 있는 게 우리뿐이라지만, 그래도 바깥인데 조심성 많은 녀석이 내 본명을 부르다니.

정말 어지간히도 많이 놀랐나 보다.

윈스톤과 내가 대련을 하게 된다면 이렇게 되는 건 예정된 결과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놀란 걸 보면, 상상했던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가 컸나 보다.

"회피와 방어는 배웠다고 하지 않았소?"

"공격을, 안 해 봐서···. 반격당하는 건, 상정 못했···."

내가 옆구리를 움켜잡고 변명하자, 윈스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진짜로 그러한 것을.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유지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세요, 세르펜스. 윈스톤 경이 어련히 힘 조절을 잘 했겠죠."

"하지만 선우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깐 쉬면서 다시 맞으러 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겠죠."

"다시, 맞으러···."

"선우가 바라는 거잖아요. 우리는 조용히 '유자 판나코타'나 먹으면서, 지켜보고 응원해 주기로 해요."

유지스가 칭얼거리는 세르펜스를 부드럽게 달랬다.

달래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째 말하는 게 이상하다.

마치 내가 맞고 싶어서 윈스톤에게 대련을 신청했다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굉장히 찜찜해졌다.

"윈스톤, 저는 맞는 걸 즐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심으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헛소리로 시간 끌 생각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기나 하시오."

윈스톤이 내 결백을 믿어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더 쉬지 못해서 불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검을 주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오시오."

"방금 제가 한 그 공격에 대한 코멘트 같은 건 없어요?"

"머리로 익힌 것은 마음이 다급해지면 잊어버리기 쉬우니, 몸으로 익혀야 하오."

가르치는 사람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이 악물고 다시 달려들 수밖에.

당연히 결과는 아까와 같았고, 나는 세르펜스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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