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회
77. 공작님의 짧은 휴가 (10)
* * *
휴마누스가 돌아왔어도 새벽 훈련은 거를 수 없었다.
그동안은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한 자세로 따라 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오늘은 그간 배웠던 동작들을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이곳에서 훈련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네.'
실질적으로 머무른 날수는 얼마 되지도 않고 심지어 어제는 쉬기까지 했는데.
1분이 10분처럼 느껴지는 고된 훈련을 거듭하여,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갑옷을 구하기 전까지 격투술의 기본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푸로르가 진도를 급하게 뺀 탓에 배운 게 많아서 더 그런 것 같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더 빡세게 해 보자!"
스메른 섬의 신전에서 머무르는 게 마지막인 거지,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심지어는 오늘 오후에도.
매일매일 훈련을 할 거면서, 푸로르가 오늘만 훈련하고 나면 더는 안 할 것처럼 나를 속이려 들었다.
그런 말장난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속든 안 속든, 푸로르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엄격하게 지도에 임했다. 그에 따라 훈련 강도 또한 덩달아 뛰었다.
덧붙여 윈스톤은 그냥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일관적으로 엄격했다.
'그래도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해 왔고, 단순한 반복 운동이 아니라 격투술을 배우는 중이라 목적의식이 확고했으니까.
뚝뚝 끊기던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지면 나름 성취감도 느껴지고.
반면에 윈스톤에게 굴려지는 세 사람.
리에나, 에드나, 아니마는 체력을 쥐어짜 내며 온몸의 근육들을 골고루 혹사시켰다.
그들은 평생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다가, 이제야 막 단련을 시작한 햇병아리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윈스톤은 그들을 굴리고 굴리고 또 굴렸다.
단련에 큰 뜻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못 해 먹겠다고 드러눕고도 남았을 테다.
그런데도 저 세 사람이 버티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리에나는 오후에도 구르지만, 두 마법사는 새벽 훈련만 참가한다.
양심적인 에드나는 리에나의 눈치가 보여 먼저 포기 선언을 할 수 없다. 에드나가 버티고 있는데, 아니마가 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리에나가 버티는 이유는 아마도, 푸로르가 격투술을 배워보라고 권유하며 했던 말 때문이겠지.'
아무런 능력이 없는 나도 노력하고, 치료와 결계 방면으로 재능이 없는 휴마누스도 노력한다는 그 얘기가.
리에나의 마음속 무언가를 자극한 게 아닐까 한다.
그렇게 새벽 훈련을 마치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앉은 유지스와 휴마누스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대화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를 포함한 훈련생 넷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가서 앉았고, 세르펜스와 윈스톤, 푸로르는 우리 몫까지 음식을 받으러 갔다.
그 모습을 본 유지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갔다.
"방금 유지스에게 너희가 훈련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정말 열심히 하고 있구나···?"
휴마누스가 놀랍다는 듯 말하며 감탄했다. 우리가 많이 지쳐 보이긴 했나 보다.
고개를 끄덕거릴 기운도 없어서, 나는 대충 '예에···.' 하고 대답한 뒤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 음식을 받으러 갔던 네 사람이 돌아왔다.
이내 모두의 앞에 음식이 든 쟁반이 하나씩 놓였다.
그러고 나서야 휴마누스가 먼저 받아 놨던 음식에 손을 댔다.
모두와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휴마누스는 언제 온 거야?"
"어젯밤에."
"그럼 부르지 그랬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불러모으기 뭐해서 그랬지. 너무 배가 고프기도 했고. 다 함께 둘러앉은 자리에서 나 혼자 뭔가 먹고 있으면, 기분이 좀 그렇잖아."
"아하하하! 그것도 그렇네. 먹는 거 구경 당하는 느낌이겠다!"
휴마누스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푸로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를 이어가며 격 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그보다 그 검집···. 아니, 첫 번째 용사의 무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거 써 봤어?"
"아직이야. 어제 바로 써 보려고 했는데, 세르펜스가 하루 정도는 쉬라고 해서."
"세르펜스 나리가 옳은 말씀 하셨네!"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푸로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살짝 스쳤다.
휴마누스가 일행들 몰래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고 나서, 멀쩡한 척하는 걸까 봐 걱정했나 보다.
'그만큼 휴마누스가 무리하고 있는 게 겉으로 티가 난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휴마누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얹어지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의 짐을 덜어줄 거다.
하지만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오직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현재를 지키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그가 자처한 일도 있다.
이전 회차의 기억을 엿보고, 그 시간대에 쌓았던 경험을 되새기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괴로웠던 기억을 보면서까지 강해진다고 한들, 알아주는 이는 우리들뿐이다.
세르펜스만 해도 성검을 통해 성검펜스의 기억을 보게 된다면.
혹은 아예 저번처럼 성검펜스를 머무르게 하여 그의 기술을 익힌다면.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다.
'타락펜스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위험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건 일단 덮어두고.'
아무튼 그래도 녀석에게 그런 짓을 강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말리면 말렸지.
딱히 세르펜스라고 특별 취급하는 건 아니다.
휴마누스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않았으면 모두 말렸을 거다.
기껏해야 성검을 내려줄 뿐.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방임주의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신이 무려 세상의 흐름을 건드렸다.
그러고도 답이 안 나와서 다시 한번 뒤엎으며 외부 인사까지 초청했다.
세상 꼴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그랬을까.
그러한 세상을 지키고자 앞장섰던 성검의 주인은 얼마나 처절한 나날을 보냈을까.
심지어 일행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1회차 성검의 주인을 목격했다.
2회차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의 상태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는 결말이 각색된 것임을 몰랐다면, 지금보다는 덜 걱정스러웠을 텐데···.'
휴마누스가 이전 회차 꿈을 꾸고 일어나면 무슨 기억을 봤는지 매번 꼬치꼬치 캐물어서, 막바지에 다다르기 전에 그만 보도록 설득해야겠다.
'특히 마왕펜스를 상대한 최후의 결전은 절대 보면 안 돼.'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던 친구를 포기하고, 타인으로 인식하며 심장에 칼을 꽂는 게 '해피 엔딩'이 되도록 각색한 결과물이라니.
그딴 걸 두고 해피 엔딩이라 말하려면 진짜 결말은 도대체 얼마나 끔찍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는 성검 일행은 생사조차 불명확하다.
휴마누스는 성검의 주인이기 전에, 제국의 황태자이기 전에.
정 많고 착하고, 은근히 어리숙한 면도 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휴마누스가 아무리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한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 이상 버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옮기다 보니, 어느새 그릇이 비어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바로 떠날 거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공왕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내가 던진 질문을 받은 건 휴마누스였다.
공왕 얘기는 또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동안 그 얘기를 나눈 건가? 아니면 어젯밤 물에서 나왔을 때, 신관에게 얘기를 들었나?
"아까 식당에 오면서 마주친 신관님께 들었는데, 교단 측에서 미리 배를 확보해 뒀대요. 그러니 떠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언제든지 얘기해 달라고 하셨어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발언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육지에 도착하는 대로 공왕에 관한 소식도 모아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는 게 좋겠지? 다들 식사 끝났으면 이만 일어날까?"
휴마누스가 테이블 위의 빈 그릇들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우리는 빈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일어나 퇴식대에 가져다 놓고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한가해 보이는 신관 하나를 붙잡고 떠날 예정이라 말하니, 우리를 항구가 아닌 섬의 뒤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형 선박 하나와 세 명의 메로우였다.
한 명은 셀라피엘이었고, 나머지 둘은 모르는 얼굴이다.
눈동자가 일렁거리지도 않고 백색도 아닌 걸 보니, 사도는 아니고 일반 메로우인 듯했다.
"얘네 둘이 육지까지 데려다줄 거야. 사도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이들이니, 안심해도 좋아."
셀라피엘이 그렇게 말하며 두 메로우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메로우들이 조용히 고개를 까딱여 목인사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셀라피엘이 다시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잘 가. 만약 또 섬에 오게 되면, 신전에 '저번에 만났던 사도'를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 거 잊지 말고."
다시 섬에 방문하게 되면 꼭 자신을 만나고 가라는 말을 참 이상하게도 한다.
우리는 셀라피엘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네고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르펜스에게 떠밀려,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곧장 선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녀석의 그런 유난스러움에 푸로르가 혀를 내두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일 넓고 수련하기 좋은 곳은 갑판인데."
"갑판에서의 수련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다 선우가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메로우들이 건져주겠죠."
푸로르가 옳은 소리를 했지만, 세르펜스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체했다.
메로우들이 물속에서 대기하고 있는데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가 보다.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세르펜스가 우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푸로르는 녀석을 설득하려 드는 대신, 수련을 할 만한 공간이 있는지 선내를 돌아보겠다고 나섰다.
'어차피 메로우들이 배를 옮겨주는 거면, 그냥 우리가 섬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돛이 부러진 배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연회장까지 갖춰졌던 거대한 여객선을 떠올리자, 보통 크기의 중형 선박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파된 그 여객선을 타는 건 그거대로 세르펜스의 불안함을 자극할 것 같다.
하루 정도면 육지에 도착하니까 좁고 불편해도 그냥 참자.
"그건 그렇고 배에 타자마자 바로 또 수련에 들어가는 거야? 새벽에도 훈련했다면서. 너희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나는 오늘 하루 그냥 쉴 생각이었는데, 괜히 부끄럽네···."
휴마누스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아주 중대한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벽 훈련을 끝내고 아침을 먹은 뒤. 오전 시간대는 분명 자유 시간이었다.
'하마터면 쉬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수련에 돌입할 뻔했잖아?!'
열심히 하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휴식 없이 몰아치기만 하는 수련은 지치기만 할 뿐 효과가 반감되는 법이다.
나는 수련의 효율을 위해 쉬기로 마음먹으며, 가장 가까이 있는 선실 문을 열었다.
'···오늘은 휴마누스까지 셋이서 한 방을 써야 하는데, 여긴 너무 좁지 않나?'
쉬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 밤 잘 곳부터 물색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