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회
77. 공작님의 짧은 휴가 (16)
"힛!"
추억에 잠겨있는데 돌연 손바닥이 간질간질해졌다.
불시에 찾아온 간지러움은 소름을 동반했고, 그 탓에 내 입에서는 이상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며 간지러움의 원흉을 내려다보았다.
세르펜스의 손에는 녀석의 머리카락이 잡혀 있었다. 저 머리카락 끝으로 내 손바닥을 간지럽힌 게 틀림없다.
"뭐해요?"
"그냥, 음···."
세르펜스가 변명조차 못 하고 어물어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상관없다.
녀석이 어째서 그런 장난을 쳐 왔는지,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니까.
내가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걸 눈치채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 반.
먼 곳에 있는 가족들 생각은 그만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그 두 마음이 뒤섞여 충동적으로 내게 간지럼을 태운 거겠지.'
쉽고 간단하게 줄이자면, 세르펜스는 내게 재롱을 부린 거다.
녀석의 의기소침해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기껏 재롱을 부렸는데 돌아온 반응이 시원찮으니 실망했나 보다.
"오구오구, 우리 공작님! 까까 줄까요, 까까?"
"까까···?"
단어를 바로 알아먹지 못했던 걸까?
세르펜스가 멍한 표정으로 내 말을 따라 했다가, 뒤늦게 그것이 '과자'를 이르는 말임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 봉사를 허투로 하긴 했어도 주워들은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접시를 꺼내어 옆에 내려놓고, 여러 가지 맛의 미니 프레첼을 한가득 쏟았다.
세르펜스는 그중에서 초콜릿 코팅이 된 것을 골라서 입안에 쏙 넣었다.
녀석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오독오독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이거 그냥 간식 아니고, 연출용 소품인 거 아시죠? 휴마누스가 깨어날 때까지 남아있어야 하니까, 천천히 드세요."
"···어차피 단단해서 빨리 먹기 힘들다."
세르펜스가 입안에 든 과자를 씹어 삼키느라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단단해서 먹기 힘들다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는지 세르펜스의 손이 바로 접시 위로 향했다.
나는 하얀 소금 알갱이가 박혀있는 솔티 캐러멜 맛 프레첼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고, 세르펜스의 머리를 묶은 머리끈의 매듭을 풀었다.
그리고 녀석의 옆머리를 적당량 잡아서, 그것을 세 갈래로 나누어 천천히 땋았다.
천진난만하게 과자를 집어 먹는 아이와 그런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는 보호자.
문장만 놓고 봐도 평온함이 느껴진다. 해당 장면을 직접 봤을 땐 얼마나 평화로워 보일까.
나는 내 연출이 휴마누스의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오독, 오독, 오도독.
세르펜스가 과자 먹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다른 과자로 바꿔 줘야 하나 싶었으나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착란 상태의 휴마누스가 날뛰려다가도, 저 소리를 들으면 전의를 상실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르펜스. 휴마누스가 너무 안 깨어나는 것 같지 않아요?"
"나도 아까부터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르펜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휴마누스가 타락펜스를 보고 와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건 걱정이 되지만, 늦게 깨어나는 건 그리 걱정스럽지 않은가 보다.
"혹시 세르펜스는 그 이유를 알아요?"
"추측해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첫째는 용사의 무구 능력을 써서 이전 회차의 기억을 불러오면, 기억 속 자아에 잡아먹히지 않고 현재의 자아가 또렷하게 살아있다는 가정이다. 이 경우라면 일주일 이상 간격을 둬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한 번에 최대한 많은 기억을 확보하고자 일부러 버티고 있는 거겠지."
세르펜스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휴마누스의 표정이 마치, 의식적으로 깨어나지 않으려고 용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저 짓을 하는 건 이전 회차의 경험을 그대로 익히기 위해서잖아요? 현재의 의식이 살아있더라도, 이전 회차의 휴마누스가 떠올렸던 생각이나 느꼈던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질 겁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시야 정보는 확실히 전해지겠죠. 폐허가 된 제국 수도를 봤다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휴마누스는···."
"아무 반응도 없지."
내가 하려던 마지막 문장을 세르펜스가 가로챘다.
녀석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첫 번째 가정은 가볍게 던져 보았을 뿐이며, 두 번째 가정이 진짜 본론이라는 걸 의미한다.
세르펜스가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둘째는 용사의 무구 능력을 사용했을 땐,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꿈속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는 가정이다."
"그럼 효율이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효율을 따질 거라면 용사의 무구 능력을 비튼다고 스메른의 섬까지 올 것도 없이, 그냥 내가 성검에 손을 대는 게 훨씬 낫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지."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펼쳤던 손가락을 접은 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고 반듯하게 누워서 설명을 시작했다.
"꿈속의 시간이 아무리 빠르게 흘러가도 뇌는 현실의 시간을 따른다. 1분에 최소 이삼일 분량의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든다고 생각해 봐라. 혼란스러운 것도 혼란스러운 거지만, 뇌에 걸리는 부하도 무시할 수 없다."
"···정신적인 충격만 생각했지, 뇌 문제는 생각 못 했네요."
아찔한 얘기다.
경험자인 세르펜스가 하는 말이니 짐작이 아닌 사실로 봐야 한다.
그런데도 녀석과 휴마누스가 괜찮았던 건, 두 사람이 신성력 보유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신성력이 뇌의 처리 속도를 올려주지는 못하더라도. 뇌를 유지 및 보수할 수는 있으니까.
만약 두 사람의 능력이 신성력이 아닌 다른 거였다면 분명 큰 사달이 났을 테다.
"휴마누스가 늦게 깨어나는 건 나쁜 징조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세르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초조한 마음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결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겠네요."
나는 기특한 세르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비시시 웃음을 흘렸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제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무릎냥이가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츄르랑 비슷하게 생긴, 짜 먹는 요거트 같은 간식이 있으면 딱인데!'
아쉽게도 이 세상은 포장 기술이 그렇게까지 발전하지 않아서, 짜 먹는 액상 식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르펜스에게 유사 츄르를 짜 먹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성싶다.
"어?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 예전에 절대로 제 무릎에 올라오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왜. 제온이 처음 공작저에 방문하고 그다음 날이었던가? 아무튼 마차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선우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다. 나는 츄릅거리지 않겠다고 했을 뿐, 무릎에 올라가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무릎도 포함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다. 선우가 잘못 이해한 거다."
세르펜스가 뻔뻔한 표정으로 우기기 시작했다.
사실을 인정하면 무릎베개를 평생 압수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다.
"더군다나 지금 이건 올라탄 것도 아니잖은가? 그저 머리를 대고 있을 뿐이지."
"아, 예. 그렇다고 칩시다."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공작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
세르펜스가 조용히 옆으로 돌아누우며 입안에 프레첼을 넣고 연신 오독거렸다. 삐졌나 보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 간지럼을 태웠다.
"하, 핫···! 자, 잠깐···.아핫, 아하하!"
내 간지럼 공격에 당한 세르펜스가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상체를 가볍게 비틀었다.
정말 못 참을 정도라면 얼마든지 내 행동을 저지하거나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얌전히 당해주며 좋다고 웃어대는 걸 보니, 내 행동을 하나의 놀이로 인식한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서 놀아주는 것이 어른의 도리다.
"으하하하! 아까의 복수다! 간질간질간질!!"
"하핫, 아, 핫···! 훗, 하하핫!"
세르펜스가 발을 바동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반응이 좋으니 간지럼 태우는 나도 흥이 난다.
보통 아이들은 너무 오래 간지럽혔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지만, 세르펜스라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괜찮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중간 점검을 해 보는 게 좋으려나?'
나는 잠깐 손가락 움직임을 멈추고 세르펜스의 상태를 살폈다.
녀석이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더 해도 될 것 같다.
다시금 세르펜스의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전전긍긍 불안해하며 기다리길 바란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웃음소리 사이로 어처구니없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가락을 멈췄고, 세르펜스도 바동거리던 다리를 얌전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휴마누스의 뚱한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간지럼 태우고 노는 사이에 휴마누스가 깨어나 버리다니.
타이밍이 안 좋았지만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변명거리가 있었으니까.
나는 세르펜스의 겨드랑이에서 손을 빼내며 정색했다.
"이게 다 휴마누스를 위한 쇼였는데 너무하다뇨? 휴마누스야말로 너무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요? 휴마누스가 저희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 수 있게, 당황할 만한 장면을 연출하겠다고 예고 했잖아요."
"대체 언제?"
"와, 시치미를 떼도 유분수지! 그때 잘 부탁한다고 대답까지 해 놓고!"
"아, 설마···?"
눈치는 없으나 기억력은 있는 휴마누스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내고, 겨우 내 말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억울함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야, 그건···. 그게 이런 뜻인 줄은 몰랐지!"
"몰랐으면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얘기했어야죠. 옛말에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나,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자, 어서 부끄러워하세요!"
"후우···. 정신이 번쩍 드는 게 아니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휴마누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말장난은 이쯤 하고 끝내야겠다.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요?"
"아니, 괜찮아."
"그럼 달달한 간식이라도 먹을래요?"
"됐어."
"그것도 싫으면 머리 쓰담은 어때요?"
"그거야말로 됐어. 누가 내 머리를 만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머리 쓰담이 싫다는 휴마누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세모 모양으로 벌렸다.
어떻게 그게 싫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냥 따뜻한 물 한 잔이면 돼."
내가 머리 쓰담 이상의 것을 권하기라도 할까 봐 겁이라도 먹은 걸까?
휴마누스가 서둘러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어 그 안에 발열석을 빠뜨리며, 세르펜스가 베고 있는 무릎을 가볍게 들썩였다.
은근슬쩍 계속 누워있으려 했던 세르펜스가 일어나 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간지럼 놀이 때문에 엎어진 접시를 발견하고는 다시 정위치로 돌려놓았다. 이불 위에 흩어진 프레첼도 한데 모았다.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뒷정리하다니 몹시 기특하다.
그렇게 녀석이 놀고 난 자리를 치우는 사이.
나는 데워진 물을 잔에 따라서 휴마누스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