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29화 (729/925)

729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1)

나는 배를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살짝 고개만 들어 올려 배 쪽을 확인하니, 익숙한 청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왜 남의 배를 베고 있어요?"

"선우가 계속 굴러다니길래."

혹시 세르펜스가 아직 자는 건 아닐까 긴가민가했으나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내 배를 자신의 머리로 눌러서 고정해 놨다는 소리였다.

그 대답을 듣고 났더니 곤충 표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집사 배 위에 올라가길 좋아하는 고양이도 아니고···. 깼으면 그냥 일어나서 딴 데 가서 앉아 있어도 되잖아요."

"···야옹?"

"아, 고양이구나. 고양이면 어쩔 수 없죠."

"애옹."

내가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 농담으로 말하자, 녀석이 고양이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아침부터 평화롭고 좋네.

"그래도 일어나긴 해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으음···, 알겠다."

드디어 세르펜스가 사람으로 돌아와서 내 배 위에서 머리를 치워주었다.

나는 상체을 일으켜 앉으며 무심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던 휴마누스와 눈이 마주쳤다.

"······."

정정한다.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거로 보아, 옷을 갈아입다 말고 굳어 있는 중이었나 보다.

"휴마누스는 왜 저러고 있대요?"

"모르겠다."

세르펜스가 안경 줄을 달아 놓은 안경을 쓰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휴마누스는 여전히 굳어있었기에, 나는 공용 욕실로 향하고자 그를 지나쳐서 방 밖으로 나왔다.

세르펜스는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는 구실을 대며.

하지만 사실은 분리 불안 증세 때문에 욕실 문 앞에서 대기하려고 따라 나왔다.

"모르긴 뭘 몰라! 방금 그거 뭔데?!"

방문을 닫으려는 찰나 뒤늦게 휴마누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와 세르펜스는 못 들은 척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머리는 어젯밤 감았으니까, 빨리 세수만 하고 나와야지.'

세르펜스는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씻는데 누가 복도에 서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면 마음이 급해지는 법이다.

내가 후다닥 세안을 마치고 공용 욕실에서 나왔을 때.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이 네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세르펜스고 나머지 셋은 휴마누스, 에드나, 유지스였다.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아니, 뭘 들었는지 알아? 세르펜스가 글쎄···. 선우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며 고양이 울음소리 흉내를 내더라니까?"

"아, 네. 그랬군요."

"와아! 세르펜스와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축하드려요!"

휴마누스가 당혹스럽다는 투로 화제를 꺼냈다.

그에 에드나는 그래서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유지스는 짝짝짝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장담하건대 어느 쪽도 휴마누스가 바라던 반응은 아니었을 테다.

휴마누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왜 복도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막 욕실에서 나온 나를 포함하면 총 다섯이나 되는 사람이 복도에 모인 셈이다.

이 좁은 복도에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으니, 안 그래도 좁은 복도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휴마누스야 세르펜스에게 '야옹'에 관해 따져 물으려고 따라온 걸 테고.

"유지스랑 에드나 씨는 왜 나와 있어요?"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나와 봤죠."

"저는 유지스랑 같이 있다가 따라 나왔어요."

유지스가 먼저 여상하게 말했고, 에드나가 뒤이어 답했다.

에드나가 있는데 아니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굉장히 이상하긴 했지만, 특별한 일이 있어서 모여 있는 건 아닌가 보다.

하긴. 그러니까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야옹 소리에 관해 떠들어 댈 수 있었던 거겠지.

"세르펜스도 얼른 씻고 나와요."

"잠시, 그 전에···."

내가 엄지로 뒤쪽의 욕실을 가리키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잠깐 기다려 달라며 시간을 끌었다.

무슨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의문이 떠오른 순간.

세르펜스의 손이 유지스의 목으로 향했다.

오늘 유지스는 목을 감싸는 형태의 셔츠를 입었는데, 세르펜스의 손가락이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옷 밖으로 나온 녀석의 손가락에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우리 셋이 맞췄던 목걸이를 옷 속으로 숨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옷 속에 세르펜스의 손가락이 들어와 목덜미를 훑었으니.

유지스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건 구태여 짚고 넘어갈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우리끼리 세트로 맞춘 목걸이를 끄집어낸 것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한 손으로 안경 줄을 만지작거리며 유지스를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목걸이를 놓아주었다.

'저거, 유지스한테 꼬리 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우정템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인가? 녀석의 정신 연령을 생각하면 후자 같기는 한데···.'

세르펜스는 의문을 남겨 놓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탁, 욕실 문이 닫히며 생긴 작은 울림이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됐는지 얼음 상태였던 유지스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 바바바바방금, 뭐, 뭐···?!"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걸 보면 입은 아직 덜 풀렸나 보다.

반면에 귀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였다.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진정하세요, 유지스. 세르펜스는 아마 별생각 없이 그런 걸 겁니다. 저 녀석, 제 품 속에서 멋대로 이것저것 꺼내서 가져가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목걸이를 빼냈을 가능성이 99퍼센트입니다."

"그, 그그그, 그런 거겠죠?! 휴우···. 놀랐네요."

내 말에 유지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기서는 안도할 것이 아니라 아까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뭐.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히히 웃는 걸 보면 유지스는 나름대로 만족하는 것 같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굳이 짚어내서 아쉬움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어···? 뭐야, 그 목걸이? 세르펜스의 안경 줄이랑 디자인이 똑같은데? 설마 둘이 세트로 맞춘 거야?"

이제껏 유지스가 내내 목걸이를 드러내 놓고 다녔건만.

휴마누스가 오늘 처음 발견했다는 듯 반응했다.

"아니요, 선우의 시곗줄까지 포함해서 셋이서 맞췄어요."

"네, 우정의 징표죠."

"···셋이서만?"

유지스와 내 대답을 들은 휴마누스가 자기 건 없냐는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없다. 있었으면 진작 줬겠지.

나는 휴마눈새에게서 신경을 끄고, 에드나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니마는 어디 두고 왔어요?"

"제가 두고 온 게 아니라, 아니마가 절 두고 간 거예요."

"예에?! 아니마가 에드나 씨를 두고 갔다고요? 아, 아니. 그보다 어딜 가요? 이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아차! 말씀드리는 게 늦었네요. 저희 항구에 도착했어요."

이어진 에드나의 설명에 따르자면, 오늘 새벽 훈련 때문에 윈스톤이 우리 방에 찾아왔었다는 모양이다.

노크했는데 아무 대답도 없고, 휴마누스가 이전 회차 기억을 보겠다고 예고해 뒀으니.

그냥 알아서 깨어날 때까지 자게 놔두기로 했다나 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휴마누스를 제외한 성검 일행이 먼저 배에서 내려 공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러 갔다고 한다.

'수집이라고 해 봤자, 신전에 들러서 교단이 모아 놓은 정보를 받아오는 것뿐이겠지만.'

룩스메아 교단이 멀쩡하니 이런 점이 참 편하다.

신전이 대륙 곳곳에 퍼져있다 보니 정보를 모으기에 상당히 유리하다.

'그리고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방문하여 악숭이. 혹은 악숭이가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건을 제보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 또한 크나큰 장점이지.'

성직자 납치 사건 때문에 조심하느라 사실 조사가 더뎌지긴 했으나, 교단의 존재가 유명무실했던 [성검의 주인] 때와 비교하면 이보다 편할 수 없다.

그땐 정말 최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정보의 부재는 특히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극 후반부에는 휴마누스를 지지해주던 몇 안 되는 단체마저 모두 망한 탓이다.

그냥 망하기만 했으면 다행이고, 심한 경우 전원 죽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성검 일행이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모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미 대륙 전역에서 악숭이들이 날뛰고 있는데, 어디가 가장 중요한 곳인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성검의 주인]에서 마왕이 소환된 장소가 끝끝내 밝혀지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타락펜스라면 알고 있었겠지만.

세르펜스가 2회차의 꿈을 꿨을 때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성검의 주인]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누실된 정보 중 하나일 터.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다.

내가 다른 회차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마왕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타락펜스에게 뒤통수 맞았던 아픈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 소환되는 건 마왕도 싫겠지.

"그런데 윈스톤은요?"

"윈스톤 경은···. 아, 잠시만요."

에드나가 설명을 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그녀의 브로치가 빛을 내며 웅웅 진동했기 때문이다.

{ 언니, 언니! 너무 보고 싶어! }

{ 조금만 참아, 곧 볼 테니까. 그건 그렇고 너희 아직 배에서 안 내렸지? }

푸로르가 아니마를 달래는 한편, 통신기 너머에 있는 우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언니 껌딱지인 아니마가 에드나를 두고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여차했을 때 즉각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점이다.

"네, 아직 안 내렸어요. 세 분 다 깨어나셔서, 마지막으로 씻으러 들어가신 세르펜스 님께서 나오시면 내릴 예정이었는데···. 아! 마침 나오셨네요."

타이밍 좋게 세르펜스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귀가 밝은 녀석이니 씻으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다 들었을 테다.

세르펜스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고, 말없이 나와 유지스 사이에 서서 푸로르의 답변을 기다렸다.

{ 만약 내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그럼 메로우들에게 아스페르 연방국까지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줄래? }

"연방이요? 설마 공왕이 나타났다는 곳이···."

{ 응,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

"네, 알겠어요. 얘기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 그래, 그럼 일단 그쪽에서 연락을 먼저 끊어줄래? 꼬맹이는 절대 끊으려 하지 않···. }

{ @^%#^&@$%···!! }

푸로르와 아니마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브로치에서 흘러나왔다.

어차피 연결되어 있어도 대화가 안 되니 에드나는 지체 없이 통신 마법을 종료했다.

그리고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이었다.

"윈스톤 경은 선우 씨의 갑옷을 사러 가셨어요. 연락 문제 때문에 성검 일행분들과 함께 다닌다고 하셨으니, 다들 돌아오려면 시간이 다소 걸리겠네요."

"제 갑옷을 사러요? 윈스톤이 제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요?"

"갑옷을 맞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어차피 이런 곳에서 파는 거면 제대로 된 건 없을 테니까, 임시로 쓸 만하면서도 대충 사이즈가 비슷해 보이는 게 있으면 사 오겠대요."

사이즈는 모르지만, 어림짐작으로 사 오겠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임시용이라면 괜찮겠다 싶어서 굳이 연락해서 말리지는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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