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30화 (730/925)

730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2)

"메로우분들께는 저와 에드나가 가서 부탁해 볼게요. 세 분께서는 식사라도 하고 계세요."

늦은 기상으로 인해 오후가 되도록 한 끼도 먹지 못한 우리 셋을 배려하여, 유지스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내가 갑판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세르펜스는 매우 만족한 반면.

휴마누스는 그래도 자신이 성검의 주인인데, 함께 가서 부탁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것 같다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일단 우리는 옷부터 갈아입을까요?"

나는 세르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옷이라 해 봤자 셔츠에 바지 차림이고 어디 나갈 것도 아니긴 했지만, 이따가 훈련해야 하니까 미리 튼튼한 옷으로 갈아입어 두는 게 좋겠지.

세르펜스와 방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후.

우리는 어제저녁 다 같이 밥을 먹었던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음식 몇 가지를 꺼내어 식탁 위에 늘어놓았고, 세르펜스는 포크와 물잔을 세 개씩 놓았다.

그러고 나서 막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휴마누스가 돌아왔다.

"어? 금방 왔네요?"

"응. 말을 꺼내자마자 메로우들이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더라."

"잘됐네요.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은 어쩌고···. 아! 아까 푸로르가 메로우들과 얘기가 끝나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으니까, 통신 중이려나?"

"어. 상황을 보니까 통신이 길어질 것 같길래, 나만 먼저 내려왔어."

휴마누스가 내 말에 대답하며, 나와 세르펜스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왜요? 무슨 일 있대요?"

"그런 건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는 메로우들이 고향에 하고 싶은 말이 있대서. 통신구 너머에서 리에나가 그 말을 받아 적고 있거든. 어차피 배를 더 빌려야겠다고 양해를 구하러 이곳의 신전에 다시 들르긴 해야 하니까, 그 김에 메로우들의 소식도 스메른 섬에 전해 달라고 부탁해 보겠대."

"하긴···. 우리를 연방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원래 예정일보다 훨씬 늦게 스메른에 도착할 테니까,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미리 안부를 전하고 싶었나 보네요."

"그렇겠지."

휴마누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포크를 들어 올려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괜히 목이 타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포크를 집었다.

고귀한 신분의 두 사람,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식기 소리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그 결과 내가 만들어 낸 달그락 소리만 외로이 울려 퍼지며, 조용한 식사가 이어지는 도중.

"그러고 보니···. 윈스톤 경은 다른 회차에서 '흑기사'라고 불렸댔지?"

휴마누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갑자기 그가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야 뻔하다.

푸로르가 언급한 '아스페르 연방국'이라는 단어 때문에 어젯밤 꿈을 통해 본 2회차 기억이 떠오른 거겠지.

"맞아요. 꿈에서 봤겠네요?"

"응···. 엄청 살벌하더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까지는 못 봤지만, 분위기는 느껴지잖아. 그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윈스톤 경은 굉장히 순하게 느껴져서, 미리 얘기를 못 들었으면 그냥 체격이 비슷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거야."

나는 흑기사 윈스톤을 글자로만 접했을 뿐이지만, 휴마누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구태여 '흑기사' 시절의 그가 어땠는지 떠올리고자, [성검의 주인] 내용을 되짚을 필요조차 없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만 떠올려도 충분했다.

지금의 윈스톤은 투기장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전 주군 가문에서 구르며 쌓아온 독기까지 모조리 빠진 느낌이다.

당연한 일이다.

'모시는 주군이 천지 차이니까.'

사람 학살하는 악숭 세력이든 술과 도박을 일삼는 망나니 도련님이든.

그딴 놈들의 뒤를 봐주는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이 절로 피폐해지고, 도덕 관념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다 보면 멘탈이 바스러져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반면에 우리 공작님은 힐링 그 자체지!'

어지간히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사람은 방긋방긋 웃는 아기 혹은 귀여운 동물을 보면, 예민하던 신경이 누그러지며 성격이 둥글둥글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세르펜스는 응애도 하고 야옹도 한다.

지켜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흐뭇한 마음이 들며, 성격이 절로 온화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세르펜스 같은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면 누구나 순해질 수밖에 없죠."

"하하하! 그렇긴 해. 대륙의 기사들이 가장 주군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괜히 세르펜스를 손에 꼽는 게 아니지. 그만큼 훌륭한 주군이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내가 떠올린 이유와 휴마누스가 떠올린 이유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휴마누스를 붙들고 그 차이점을 설명할 시간에 다른 얘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2회차 때는 암흑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바로 연방을 건드렸었는데, 이번에는 꽤 늦춰졌네요?"

"당시 흑마법사들을 호위하던 흑기사가 현재는 사라졌잖은가. 선우가 윈스톤 경을 구할 수 있도록 정보를 준 덕분에 말이지. 더구나 선우의 존재로 나 또한 악마 숭배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나를 대신할 만한 자를 포섭하느라, 연방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한다."

세르펜스가 봉골레 파스타 속 조갯살을 포크로 콕 찍으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공왕이 포섭된 게 [성검의 주인]으로 따지면 딱 그 시기였다.

흑기사를 방패막이로 세워 놓고 흑마법을 펑펑 쏴대며 연방을 휘젓고 다니는 한편, 타락펜스와 손잡고 제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을 때.

현재의 시간대에서는 공왕을 스카우트하여 휴마누스를 공국으로 유인했다.

"반대로 공왕이 악마와 계약하여, 마인이 된 이후에는 마물을 이용해서 손쉽게 연방을 칠 수 있으니. 적기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 테지."

"지금이 바로 그 적절한 시기란 말이죠?"

"그래. 우리가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으로 들어갔잖은가. 정보를 접하기 힘들뿐더러, 용무를 마치고 육지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릴 터이니."

"악숭 세력은 그렇게 확보한 시간만큼 더 많은 제물을 모으는 게 가능하다, 그 얘기죠?"

"그래."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감으며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검집에 깃든 용사의 무구 기능을 살짝 변경하고, 촉수 악마를 잡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일루미나티 소속은 육지에 남고 성검 일행만 바다에 나왔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그랬다면 성검 일행은 촉수 악마한테 당해서 성검과 함께 바다에 수장됐을 거야.'

같이 와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우리가 다 함께 스메른의 섬으로 향한 건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섬에 가 있는 동안 소모된 시간을 만회할 만한 수단도 남아있지."

"배 타고 가는 거요?"

"···그래."

세르펜스가 조개를 먹다가 모래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단순히 기분이 나빠져서 표정을 구긴 것 같긴 했지만, 혹시 몰라서 손수건을 펼쳐 들고 녀석의 입 앞에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뭐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방금 입에 넣은 조갯살을 씹어 삼켰다.

처음 예상대로 그냥 배를 더 타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인가 보다.

나는 손수건을 도로 접어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확실히. 기차도 멈춘 마당에 육로로 가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겠네요. 우리가 있는 마르가리타 해안은 대륙의 남쪽에 위치하고, 아스페르 연방국은 북서쪽에 있으니까. 게다가 중간에 사막도 건너야 하지 않아요?"

"···잘 알고 있군."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자꾸 물어보냐는 듯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굴 가득 불만이 덕지덕지 붙었다.

만약 내가 언급한 이유들만 없었으면, 이 녀석이 배에 얌전히 타고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로를 통해 연방으로 가자고 일행들을 설득했을 게 뻔하다.

"선우. 휴마누스를 비롯한 성검 일행은 배를 타고 가게 두고, 우리들은 육로로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통신 마법이 있으니, 그편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륙의 정세에 대응하기 편할 것 같은데···."

"어, 어?! 그냥 같이 가면 안 돼?!"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은근슬쩍 나를 떠보려 들었고, 괜히 죄 없는 휴마눈새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안 될 이유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같이 배를 타야 할 이유만 한가득했다.

"괜한 변명하지 마세요. 그러면 뭐 사막은 정보 구하기 쉬워요? 사막 횡단과 배에 타서 가만히 옮겨지는 것 중 고르라면, 저는 무조건 배를 고를 겁니다."

"······."

시들펜스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세르펜스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휴마누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건 그렇고 휴마누스."

"으, 응?!"

"기억 본 거, 실력 향상에 보탬이 될 것 같아요?"

"아!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야.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건 여전한데, 정신이 뒤섞이지 않으니까 전투의 흐름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보는 게 가능해지더라고."

내 물음에 휴마누스가 마치 충동구매를 했다가 인생템을 만난 사람처럼 반응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템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

그렇게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자, 세르펜스가 언제 시들거렸냐는 듯 불쌍한 척 연기를 그만두고 통상 모드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휴마누스가 저렇게나 들떠서 얘기하는 걸 보면, 2회차의 기억이 꽤 유용하다는 거겠지?'

잘된 일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간접 경험도 무시할 수 없으니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그래봤자 얼마나 되겠어?' 하는 생각이 없잖아 있었다.

다만 시도해 보기도 전에 초치기 싫어서 눈치껏 넘겼을 뿐.

"보기만 해서 실력이 느는 건 아니고, 그 경험을 완벽히 소화해 내려면 따로 노력하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얼추 보이는 것 같아."

"휴마누스라면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응원 고마워."

괴로운 기억들도 함께 보게 될 텐데.

하지만 현재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인지, 휴마누스는 특유의 상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는지, 진중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세르펜스. 육로는 포기하고, 같이 배를 타고 가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대련해 주면 안 될까?"

"배 위에서 싸울 수는 없으니 공중전이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결점 하나를 없앤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할게."

휴마누스가 결의에 찬 두 눈을 빛내며 세르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육로는 진작 포기했던 세르펜스가 괜히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으음···, 휴마누스가 그렇게까지 바라신다면야···. 네, 그리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 세르펜스!"

"만약 휴마누스가 성검을 쓰지 않고도 저를 이길 수 있게 된다면, 1회차의 저보다 더 강해지실 겁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예, 기대하겠습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살짝 45도 각도로 기울이며 곰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장담하건대 100퍼센트 연출된 표정이다.

휴마누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했다.

'아무튼 둘 다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니까, 잘 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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