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32화 (732/925)

732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4)

세르펜스는 울먹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대련이 끝나서 그런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제자리에 멈춰 선 상태였다.

휴마누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녀석을 놓아주었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가까이 와도 된다고 손짓하려다가 말았다.

걱정을 덜 시키려면 멀쩡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많이 놀랐어요?"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세르펜스가 침울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으음'인지 '으응'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래도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잘 참으셨네요."

내 말에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안다. 세르펜스가 잘 참은 게 아니라 휴마누스가 잘 붙잡았다는 것쯤은.

그래도 지금은 우리 애를 달래는 게 우선인지라, 휴마누스의 표정을 못 본 척했다.

"···맞은 곳은 괜찮은가?"

"치료해 줄래요?"

칭찬을 받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세르펜스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안 아프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니 녀석이 화를 낼 테다.

하지만 앓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에둘러 대답했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머리에 얹힌 내 손을 잡아내려, 양손으로 꼬옥 붙잡으며 내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녀석의 신성력이 손을 통해 들어와서 팔을 타고 몸통에 다다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윈스톤을 걷어찼던 정강이와 목검에 맞았던 허벅지.

그리고 바닥을 굴러다닌 탓에 전신에서 느껴지던 아릿한 통증이 단번에 사라졌다.

"매번 고마워요, 세르펜스."

"음···."

내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하자, 세르펜스는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또 내리깔았다.

감사 인사를 받아도 순수하게 기뻐할 만한 기분이 아닌가 보다. 이해한다.

녀석과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장소가 좋지 않다.

나는 땀 때문에 얼른 씻고 싶다는 진심 섞인 핑계를 대며, 녀석을 데리고 창고를 나왔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눌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욕실로 들어갔다.

윈스톤의 살기에 노출되었던 여운이 아직 남아서, 혼자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르펜스에게 몸만 치료받지 말고, 정신 케어까지 부탁했으면 해결되었을 일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가만히 심호흡을 반복하니, 이제야 좀 진정되는 것 같다.

이래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폭포를 맞으며 명상에 잠기나 보다.

'아까는 윈스톤의 공격을 머리로 받을 뻔한 줄 알고 정말 아찔했는데···.'

그땐 살기 때문에 겁에 질려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머리로 다시 곱씹어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윈스톤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그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나를 공격했다고 한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머리만큼은 함부로 노리지 않을뿐더러.

그는 한 번도 전력을 다해 공격한 적이 없었다.

만일 내가 실수로 휘둘러지는 목검에 머리를 들이민다 하더라도, 공격을 멈추거나 방향을 틀 여력이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았다.

내가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검을 내뻗은 걸 테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여 내가 필사적으로 대련에 임할 수 있도록.

'세르펜스도 지금쯤이면 눈치를 챘겠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씻어내다가, 그대로 얼굴을 덮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윈스톤에게 미안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 불평을 쏟아낸 것이 부끄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주군인 세르펜스에게 밉보일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건 윈스톤의 트라우마이기도 할 텐데···.

그런데도 그는 나를 엄히 지도하며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아무리 오러로 보호할 수 있다지만, 자신에게 날붙이를 들이밀어도 된다며 혹시 모를 위험까지 감내했다.

'내가 진정으로 위험에 빠졌을 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순전히 나를 위한 거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검을 가르쳐 달라 부탁하기 전, 싫다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체력 단련시킨 것 또한 마찬가지다.

윈스톤은 세르펜스처럼 나를 과보호하지 않지만, 세르펜스만큼이나 내 안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예리한 검을 사람에게 휘두르는 건 여전히 겁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평생 가도 실력이 늘지 않을 거다.

윈스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후우···."

나는 깊게 심호흡하며 결의를 다지고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깨끗이 몸을 씻어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뒤, 아공간 주머니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복도에 서 있던 세르펜스를 욕실에 밀어 넣고, 윈스톤을 만나고 오겠노라 통보했다.

"나는 조금 이따 씻어도 괜찮으니, 같이 가면 안 되나?"

"그냥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얘기만 하고 올 겁니다. 그리고 투정 부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아! 혹시 오늘 일로 윈스톤에게 화난 건 아니죠?"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하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화난 건 절대 아니다. 윈스톤 경은 선우를 걱정하여,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그만의 방식으로 선우를 보호하고자 그런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이해한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 준 뒤, 욕실 문을 닫고 윈스톤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하지만 길게 얘기할 건 아니기도 하고, 괜히 면구스러워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빠끔 내밀었다.

눈이 마주친 윈스톤이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하는 짓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말로 그에게 대체 뭘 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

어째서인가 윈스톤은 아공간 주머니 속에 보관하여, 마지막으로 손질해 둔 상태를 유지 중인 갑옷을 꺼내어 다시 손질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오?"

"어, 그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요?"

"윈스톤은 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파악하려는 듯, 윈스톤이 황금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긴장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선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라오. 선배는 선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소."

"아뇨,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요."

"···내가 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던 동료가 있었소."

윈스톤이 느닷없이 과거 얘기를 꺼냈다.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온 화제인지 알 수 없지만, 이유 없이 꺼낸 말은 아닐 테니 일단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네에···, 그렇군요?"

"어째서라고 생각하오?"

"윈스톤이 열심히 노력해서 그 사람보다 강해졌으니까?"

"맞소.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그런 거요."

윈스톤이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목소리로 내가 성장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다정한 위로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기, 음···. 출세 지향적이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얘기는 처음부터 꺼내지 마시오."

"저는 윈스톤이 세르펜스에게만 다정한 말을 해주는 줄 알았지 뭡니까?"

"······."

방금까지 다정한 말을 해 주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사람만이 남아있다.

금방이라도 꺼지라는 말이 윈스톤의 입에서 나올 것만 같다.

그렇게 되기 전에 본래의 목적을 완수해야겠다.

"고마워요, 윈스톤. 방금 해 준 얘기도 그렇고, 제 수련을 맡아 주셔서."

"수련을 돕는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미 저번에 했잖소."

"가벼운 마음으로 도와주시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이제까지 투정 부린 것도 사과드릴게요."

"···크흠! 알겠으니, 용건이 끝났으면 가 보시오."

윈스톤이 뜬금없이 헛기침을 하더니 기어코 꺼지라는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세르펜스는 아직 씻는 중인지 안 보이고, 휴마누스가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났구나?'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볼 때는 같이 자자는 약속을 지키러 온 걸 테다.

메로우들이 말하길 내일이면 아스페르 연방에 도착할 거라는데, 오늘은 그냥 편히 쉬지.

아니, 그래서 오늘 기억을 보려는 건가?

"세르펜스는 좀 어때? 아까 되게 난리였잖아."

"그냥 놀라서 반응이 컸을 뿐입니다. 제가 대련을 하면서 맞을 때마다, 걔가 안절부절못하는 거 보셨잖아요? 평소랑 똑같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는 괜찮아?"

"저는···. 사실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별로였는데, 지금은 좋아요."

"잘됐네! 윈스톤 경이랑 얘기가 잘 풀렸나 봐?"

"뭐, 그렇죠."

휴마누스에게는 윈스톤을 만나고 오겠다는 얘기를 한 적 없으니, 내 기척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겠지.

일부러 청각을 곤두세웠다면 대화 내용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얘기하는 거로 봐서 도청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딱히 비밀 얘기를 하고 온 것도 아니니,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보다 휴마누스는 컨디션 괜찮아요?"

"응? 당연히 괜찮지."

휴마누스가 자신에게는 오늘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런 건 왜 묻냐는 듯,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눈새였다.

아직은 없었지만, 이제 생길 예정이니까 묻는 건데.

"갑자기 내 컨디션은 왜?"

"이제 '제국 멸망 이후'의 기억을 볼 차례잖아요."

"괜찮아. 지금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거니까."

불안해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휴마누스가 다부지게 대답했다.

이런 단단한 면모 때문에, 나는 [성검의 주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휴마누스를 꼽았다.

항상 노력하고,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늘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답답해 보이는 행동을 하더라도 항상 응원하게 되었다.

'실제로 마주한 휴마누스는 지나칠 정도로 눈치 없는 새끼여서, 그냥 잊고 지냈지만···.'

새삼 그가 다시 보였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는 없다.

휴마누스는 내가 '소설'을 읽은 줄 모르니까.

그리고 세르펜스가 알면 토라질 것 같기도 하고.

"아! 세르펜스가 다 씻고 나왔나 보네. 그럼 나도 씻고 올게."

아직 세르펜스는 오지도 않았는데, 휴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그냥 기척으로 알아낸 걸 테다.

참 편리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휴마누스가 방을 나가고, 나는 침대에 누워 세르펜스가 오길 기다렸다.

당연히 바로 녀석이 들어올 줄 알았건만, 어째서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

그제야 문이 열리며 세르펜스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뭡니까?!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오기도 전에 휴마누스가 선우를 혼자 두고 씻으러 갈 줄은 몰랐다."

"저는 혼자서도 잘 있거든요? 본인의 불안감을 저에게 투영하지 마세요."

"······."

내 대답의 어디가 불만스러운 건지, 세르펜스가 빼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나와 거리를 두지 않고 얌전히 내 옆에 앉았다. 삐질 건지 말 건지 태도를 분명히 해 줬으면 좋겠다.

"그보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윈스톤 경을 보고 왔다."

"왜요?"

"조금 전, 선우가 내게 화난 건 아닌지 물어봤잖은가? 그래서 혹시 윈스톤 경도 그렇게 오해한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

윈스톤에게 자신은 화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를 자신의 기사로 생각한다는 말을 하러 갔다 온 모양이다.

나는 잘했다는 의미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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