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37화 (737/925)

737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9)

어째서 악숭 세력이 마인 러스티를 버렸다는 추론이 나온 건지 이제 잘 알겠다. 그 의문은 풀렸다.

하지만 다른 의문이 하나 남았다.

남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게는 매우 중요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문이다.

"그런데 세르펜스. 마인 러스티가 버림받았다는 얘기를 어째서 그런 타이밍에 꺼낸 겁니까? 우리 다른 얘기 중이었잖아요."

타락펜스와 마인 러스티는 둘 다 타락한 악인이지만, 내게 있어 그 둘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다르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펜스는 대화 주제와 하등 상관없는 악숭 세력을 끌고 와, 마인 러스티가 버려졌다는 소리를 했다.

그런 얘기를 할 거면 낮에 주교와 대화할 때 하든가.

신전을 떠난 이후에 떠오른 생각이라면 내일 일행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말하든가.

여러모로 뜬금없는 타이밍이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일단 내뱉고 보는 나와 다르게, 세르펜스는 상황을 봐 가며 말을 꺼낸다.

그러니 마인 러스티가 버려졌다는 얘길 지금 꺼낸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그 얘기를 선우에게 해도 되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마인 러스티에 대한 제 생각을 듣고 나서, 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서서 말을 꺼냈다는 겁니까?"

"그렇다."

"악숭 세력이 마인 러스티를 버렸다는 얘길 들으면, 제가 냅다 줍기라도 할까 봐요?"

"내가 망설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가 그거였다."

솔직히 예상했던 일이라, 내 생각이 맞는다는 답변이 돌아와도 그런가 보다 하는 감상밖에 안 들었다.

내가 아무나 주워서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는 앞서 했으니 넘어가고, 지금은 다른 이유에 대해 듣는 게 낫겠지.

나는 세르펜스에게 계속 얘기하라고 눈짓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공왕이 타락하여 마인이 된 게, 자신이 이 세상에 온 탓이라고 선우가 생각하고 있을까 봐. 만약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자가 버려졌다는 얘기까지 들으면 선우가 괴로워할 것 같아서다. 그래서 선우를 떠봤다."

세르펜스가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든든한 우군이었던 2회차와 달리. 현재의 공왕이 악숭 세력에 붙은 건 제국이 망하지 않아서, 공국의 독립이 요원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국이 망하지 않은 건, 세르펜스가 타락하지 않아서고요. 그쵸?"

"그 말대로다."

"세르펜스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옆에서 잡아 준 건, 제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겸사겸사 제국도 건재하여, 수많은 이들이 무의미하게 죽지 않아도 되어서 참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따라서 마인 러스티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도 않습니다."

"아···."

세르펜스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탄성을 흘렸다.

내 말의 의미를 곱씹기라도 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서서히 눈에 초점이 다시 잡히며, 녀석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어디까지나 마인 러스티입니다. 공국이 제국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악숭 세력과 손잡는 거 말고도 많았습니다. 공왕은 젊으니까 휴마누스가 황제가 되길 기다려서 그때 얘기를 꺼내도 되고. 몰래 키워둔 병사들을 내세워 악숭이 처단에 앞장서며, 대륙을 위기로 몰아가려던 국가라는 오명을 씻어내어 인정을 받는 방법도 있었고. 하다못해 휴마누스를 지원해 줄 테니, 그 대가로 독립을 시켜 달라고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인 러스티는 그 많고 많은 방법 중, 가장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자기 자신까지 망쳐버리는.

그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마인 러스티 본인이다.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마세요, 세르펜스.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로 가야 할 행복을 빼앗아 온 걸지도 모른다며 자책하지도 말고요. 공왕은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혀서 마인이 된 겁니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제가 마인 러스티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림짐작한 건, 세르펜스가 만일 제 처지였다면 어땠을지 고민해 본 결과잖아요?"

"···그렇다."

세르펜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마인 러스티를 떠올렸을 때 어떤 감정을 품을까. 자신이 나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것만 고려해 보고, 정작 자신의 생각은 조금도 살펴보려 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혹시 세르펜스가 공왕이 타락하게 된 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악숭이들이 2회차의 세르펜스 대용으로, 공왕을 스카우트한 것 같다고 얘기해 왔잖아요."

"으음···."

"뭐, 그런 게 아니라면 말고요."

"······."

세르펜스가 고민이 많아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나 보다.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잡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음, 그렇군."

나는 안고 있던 베개를 머리맡에 두어, 그것을 베고 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자신의 침대를 옮겨 내 침대 옆에 바짝 붙이고, 누워서 손을 내밀었다.

저번에 내가 녀석의 손을 잡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잠버릇 없이 깊이 잠든 이후.

녀석은 잘 때마다 매번 손을 잡으려 했다. 어처구니없지만, 효과가 있긴 있었다.

깊이 잠들고 일어나면 몸이 살짝 더 개운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하루의 컨디션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내가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못해 굴러다니면 세르펜스는 걱정할 게 뻔하다.

일행들에게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밝혔고, 이 세상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건만.

'···어째서 잠들 때만 되면, 자꾸만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거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녀석의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혼자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낯선 세상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잘 자라, 선우."

"네. 세르펜스도 잘 자요."

* * *

마차를 타면 몸이 편하기야 하겠지만, 마차로는 다닐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있다.

종종 마인 러스티의 공격을 받았던 지역을 지나쳐야 하는데, 부서진 건물 파편이 즐비한 길을 마차로 다니는 건 무리다.

더구나 우리는 무려 아홉이나 되는 대인원이다. 마차도 당연히 큰 게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말을 탄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먹고 자고 쌀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이동에 쏟아부은 결과.

우리는 열흘 거리를 8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자유 도시 리베타르는 우리가 지나쳐온 아스페르 연방의 지역 중.

가장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치는 동네였다.

마인 러스티의 공격도 받지 않아서 건물들도 멀쩡했고,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사람도 드물었다.

"베스티 용병단의 숙소는 이쪽이야!"

오랜만에 아버지와 용병단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걸까?

푸로르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커다란 3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은 척 봐도 용병들의 공용 공간 겸 의뢰를 받는 장소로 보였다.

식당처럼 곳곳에 놓인 테이블에 용병들이 둘러앉아 맥주잔을 기울였고, 접수대로 보이는 긴 테이블 너머에도 험상궂게 생긴 용병이 앉아 있었다.

푸로르가 후드를 벗으며 반갑게 인사하려 하자, 접수대에 앉은 용병이 히죽 웃으며 검지를 세워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다다이크 왕국은 베스티 용병단을 고용하지 않아도, 자국민을 지키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수록 안전하다는 건 상식 아닙니까? 정 베스티 용병단을 고용하고 싶으면 그쪽, 지그트 왕국이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면 될 텐데. 왜 우리 왕국더러 물러나라 하십니까?"

우리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두 명의 사내가 언성을 높였다.

둘 다 어딜 봐도 용병으로는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다.

베스티 용병단을 고용하고자 경쟁이 붙었다던데 그게 바로 저들인가 보다.

'여러 국가들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하길래, 그 수가 꽤 많을 줄 알았는데···?'

나는 1층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말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용병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예비 고용주들의 경쟁을 안줏거리 삼아, 맥주잔을 부딪치며 시시덕대는 모습이 완전 관전 모드 그 자체였다.

'마인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빨리 용병을 구해서 데려가야 하는데,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까 그냥 다른 용병들을 구해서 돌아간 거려나?'

우리가 파노페 왕국 신전의 주교에게 경쟁 얘기를 들었던 게 8일 전의 일이다.

그걸 생각해 보면, 다른 용병을 구해서 돌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다다이크 왕국과 달리 부유하지 않다는 걸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경쟁자들에게 양보를 강요하고, 용병들의 몸값을 후려치시겠다?!"

다다이크 왕국에서 왔다던 사람이 상대방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비꼬았다.

그것도 구경하는 용병단원들더러 들으라는 듯, 아주 아주 큰 목소리로.

여기저기서 '그건 안 되는데?'라든가 '어어? 목숨 값을 깎아?' 하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만 그러할 뿐, 얼굴은 웃고 있는 걸 보면 그냥 놀리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이럴 때가 아니면, 용병들이 언제 귀족들의 언쟁을 구경하고 놀리면서 갑질을 해 보겠어?'

용병들의 목소리에 지그트 왕국에서 온 귀족이 당황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승기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저러다가 다다이크 왕국이 베스티 용병단을 고용하기로 결정 나면 큰일이다.

나는 두 귀족을 지나쳐 접수대로 향했다. 세르펜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붙었다.

"베스티 용병단 전원을 고용하고 싶은데, 계약서는 여기서 작성하면 됩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통수가 따끔해져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던 두 왕국 대표가 나란히 서서,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봤자다. 두 사람의 얼굴이 급격히 새파랗게 질렸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자들에게 세르펜스가 살기를 보냈다.

"저희를 고용하러 오셨다고요?"

접수대에 앉은 용병이 긴가민가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내가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니면 진짜 고용하러 온 건지 헷갈리나 보다.

"네. 돈이라면 저분들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저분들이 얼마를 제시하신 줄 알고···."

"그깟 푼돈 알 게 뭡니까? 집 벽에다가 황금을 바르고 보석을 박아 넣을 정도로, 돈이라면 썩어 넘치니까 걱정 마시죠!"

내가 황궁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용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그게 정말···."

접수대의 용병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푸로르를 쳐다봤다. 내가 하는 말이 진짜냐고 묻는 걸 테다.

푸로르가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어? 시온, 너 그렇게 돈이 많았어? 아니, 그 전에 푸로르는 그걸 어떻게 알아? 시온의 집에는 가본 적도 없잖아."

"휴마누스네 집 얘기잖아요. 자기네 집 묘사 정도는 알아들읍시다."

"······."

휴마눈새가 화들짝 놀라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다가,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