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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39화 (739/925)

739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11)

내가 테이블과 의자에 이어 간식까지 꺼내니, 용병왕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이게 끝이 아니니까.

나는 찻잔 아홉 개와 머그잔 하나를 꺼내어 일렬로 배치하고,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도 꺼냈다.

병 안에 담긴 것은 세계수 잎 차다.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게 은근히 귀찮길래, 배에서 지내는 동안 시간 날 때 잔뜩 우려 두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해 둔 차는 여전히 뜨거웠다. 당연히 유리병도 뜨거웠다.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손수건을 대고 밑부분을 받치며 병을 기울였다.

향긋한 세계수 잎 차가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피워내며, 유리병 주둥이에서 조르륵 흘러나왔다.

그렇게 찻잔이 하나씩 채워지고, 일행들은 익숙하게 자신 몫의 잔을 챙겨서 자리에 앉았다.

푸로르는 아버지인 용병왕의 것도 함께 챙겼다.

"아버지도 이리 와서 앉아."

"끼니도 거르며 고생하는 게 아닐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이런 쪽의 복지가 좋아진 건, 시온이 합류한 이후부터야."

"···아주 고마운 분이구나."

용병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까딱 목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열린 다과회가 여간 당혹스러운 모양인지, 용병왕은 착석하고 나서도 멍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푸로르가 그런 용병왕의 입에 마카다미아 넛이 들어간 샤블레를 욱여넣었다.

"원래 이런 건 집주인이 내와야 하는 건데, 있는 거라고는 술이랑 안주뿐이라···."

이제야 좀 당혹스러운 게 가셨는지 용병왕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딸이 친구들을 데려왔는데 간식 준비를 못 해서 곤혹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집에 아이 간식이 하나도 없고 술과 안주뿐이라는 건 부모로서 아웃이지만, 이곳은 용병단의 숙소이고 푸로르는 성인이다.

그렇기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저희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탓이죠,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아버지, 참고로 시온도 제국의 귀족이다? 자작이랬나?"

"······."

푸로르가 플레인 샤블레를 하나 집으며 툭 던진 말에 용병왕이 움찔했다.

애초에 자유 도시는 국가가 아니다.

용병왕이 '왕'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신분증에 기록된 신분은 평민이며 소속 국가도 따로 있다.

'게다가 나는 연방에 속한 자잘한 나라가 아니라, 신성 루멘 제국의 귀족이니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뻣뻣하게 굳은 용병왕의 모습에 푸로르가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을 지었다.

용병왕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일부러 내가 귀족이란 사실을 밝힌 게 분명하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릴 때부터 눈치챘지만, 거리낌 없이 장난을 칠 정도로 부녀간에 사이가 아주 돈독한가 보다.

"친구 아버지인데요, 뭘. 그냥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 신분 같은 거 신경 안 써요."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푸로르도 제게 반말하잖아요."

"으하하하, 그렇다면야!"

태도가 조심스러웠던 것도 잠시뿐.

용병왕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놓았다.

"저도 푸로르의 친구니까,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그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신은 제국의 황태자잖습니까?"

시류에 편승해 보려던 휴마누스가 용병왕의 대답을 듣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용병왕은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정색하며 입을 다물었다.

'정말 휴마누스가 황태자라서 부담스러운 것뿐일까? 혹시 소중한 외동딸을 위험한 여정에 참여시킨 놈팡이라는 생각에, 벽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불현듯 [성검의 주인]의 결말이 떠올랐다.

휴마누스의 4다리 엔딩은 각색된 거라고 작가인 솔레르티아가 못박아 두긴 했다.

하지만.

소중한 이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성검 일행이 서로를 구명줄처럼 붙들고 의지했다는 건.

그리고 그 중심에 일행의 리더인 휴마누스가 있었다는 건.

각색이 아닌 진실이었을 터.

'비록 그것이 연인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동료애라던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아무튼 지금의 성검 일행은 돌아갈 장소가 멀쩡히 존재한다. 그러니 약혼자까지 딸린 휴마눈새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볼 테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추문을 흘리긴 했지만, 진짜로 바람을 피운 건 아니라고 했다.

이제까지 보아온 바에 의하면 휴마누스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니, 오풀렌스 영애와의 의리 또한 저버리지 않겠지.

용병왕에게 휴마누스는 이미 약혼한 사람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귀띔해 줄까 하다가, 이 얘기를 지금 하면 없던 오해도 생길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용병들을 돈 주고 고용할 거야? 그것도 휴마누스 돈으로?"

"혹시 푸로르는 아버지를 무임금으로 부리고 싶은 겁니까?"

"그럴 리가! 일단 나도 베스티 용병단의 일원이거든?! 지금은 너희와 함께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보수를 챙겨 주면 좋지!"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겁니까?"

"좋기는 한데···,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내 물음에 푸로르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아스페르 연방의 평화를 위협하는 마인 처단이라는 공공의 안보를 위한 일에 제국의.

심지어 친구의 것이기도 한 돈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다.

이에 휴마누스의 반응은···.

"아! 아까 시온이 황궁을 자기 집처럼 말하며 들먹거린 게, 황실의 돈으로 용병들을 고용하겠다는 뜻이었구나? 상관은 없지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행여 자신이 눈치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일행들이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그는 오늘도 자신의 눈치 없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황태자이자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의 체면도 있는데, 공작인 세르펜스의 돈을 쓰거나 일행들끼리 1/n 빵으로 나눠서 낼 수는 없잖아요. 그럼 다들 휴마누스를 욕할걸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이 간식과 오늘 점심때 먹은 도시락, 전부 세르펜스의 돈으로 산 거잖아요. 용병 정도는 휴마누스 돈으로 고용합시다!"

"안 낸다고는 안 했잖아."

휴마누스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누굴 좀생이로 아는 거냐고 따지는 거다.

"알았어요, 알았어. 앞으로 큰돈 나갈 일이 생기면 먼저 얘기한 뒤, 전부 휴마누스 돈으로 결제하면 되는 거죠?"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방금 휴마누스가 자신은 좀생이가 아니라고 표정으로 주장했잖아요."

"······."

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신 뒤 마음대로 하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시온 저 친구, 자작이라고 하지 않았냐?"

"아까 말했잖아. 시온은 신분 같은 거 신경 안 쓴다고."

"그게 이런 뜻인 줄은 몰랐지."

용병왕과 푸로르가 나와 휴마누스를 힐끔대며 수군거렸다.

못 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는 아니라서 전부 들렸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슬슬 일 얘기를 해야 하니까.

"각설하고, 방금 돈을 지급할 거냐고 물었죠? 당연합니다. 지급해야 돼요. 왜냐? 용병은 군대가 아니라서 군법으로 다스리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적어도 돈을 떠안겨 줘서 사기를 올려 줘야, 일을 제대로 할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그도 그렇네요. 아무래도 자신들이 숨어있는 지역에 마인이 올 확률보다, 다른 곳에서 나타날 확률이 더 높으니···. 긴장을 풀고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마인은 바로 도망쳐버릴 거에요."

"제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겁니다! 아, 물론 베스티 용병단 분들은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용해야 하는 건 베스티 용병단 뿐만이 아니잖아요? 다른 용병단에는 돈을 지급하면서, 베스티 용병단만 차별할 수는 없죠."

나는 유지스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한편, 베스티 용병단을 옹호하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베스티 용병단처럼 규모가 큰 용병단은 기강이 어느 정도 잡혀있으니까.

그리고···.

'2회차에서 베스티 용병단이 어쩌다 전멸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만약 용병왕이 이끄는 베스티 용병단 뿐만이 아니라, 모든 용병들이 똘똘 뭉쳐서 하나의 세력을 만들었다면.

그랬다면 교전 중이던 국가들도 잠시 전쟁을 멈추고, 용병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스티 용병단을 제외한 용병들은 용병왕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돈을 주는 나라에 고용되어 전쟁을 거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용병은 원래 전쟁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헌데 성검이 대륙에 내려온 이래, 룩스메아 교단은 전쟁 금지를 선포했다. 악숭 세력이 제물을 모으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현재 용병들은 호위 임무나 산짐승을 잡는 일. 혹은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하며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다.

베스티 용병단처럼 명망 높은 용병단이야 그 전에 벌어둔 돈이 많을 테니, 그래도 어느 정도 버틸 만했으나.

'인지도가 낮은 중소 용병단의 재정은 바닥을 보이다 못해 메말랐겠지.'

그들에게 전쟁은 기회다.

그곳에서 흐르는 피는 가물어 갈라진 땅을 적시는 생명수나 마찬가지다.

현재 대륙 최고의 용병단인 베스티 용병단에 어째서 젊은이가 한 명뿐이겠는가? 단장의 딸인 푸로르를 포함해도 겨우 두 명이다.

'용병왕이 단장으로 있는 곳이니, 입단 신청서가 물밀듯이 쏟아져도 모자랄 텐데도···.'

이 또한 대륙에서 전쟁이 사라진 까닭이다.

그 한 명을 제외한 용병단원들은 모두 40대를 훌쩍 넘겼다. 용병왕만 해도 50대 중반인 거로 알고 있다.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무기를 휘두르며 전쟁터에서 굴러 왔기에, 용병으로서 먹고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지만.

'젊은 사람들은 얘기가 다르지.'

악숭 세력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여러 나라에서 용병들을 모셔가려고 안달이 날 거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려 25년의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심지어 25년 후 싸워야 할 적들은 그 무섭다는 악숭 세력이고, 그때까지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전쟁터도 없다.

"덧붙여···. 돈을 떠안겨 줘야 용병들이 제대로 일할 거라고는 했지만, 용병들을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연방과 대륙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평화도 먹고살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용병이란 직업에 자부심이 넘치는 푸로르를 향해 그렇게 말한 뒤.

시선을 옆으로 옮겨 용병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결코 대의만으로 사람을 부릴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징집한 군인들마저 월급을 받고 싸우는데, 돈 받고 싸우는 게 일인 용병을 공짜로 부린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심지어 운이 나빠서 마인을 맞닥뜨리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데? 그거야말로 용병에 대한 모욕이죠. 안 그래요, 용병왕님?"

"허어···, 이름이 시온이라고 했던가? 성은 뭐지?"

"리벨론인데요?"

"그렇군, 시온 리벨론. 귀족이라 배운 게 많아서 그런가 제법 똘똘하네? 금전 감각 면에서는 우리 애보다 낫고."

용병왕이 자신의 수염 난 턱을 매만지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기 민망하지만, 저 눈빛은 분명 인재를 발견한 스카우터의 그것이다.

내 무력이 형편없기는 해도, 규모가 큰 용병단이라면 재정 관리를 위한 직원을 한두 명쯤은 두기 마련이다.

황태자 휴마누스와 악숭 세력에 이어, 이제는 용병왕의 스카우트 제안도 받게 되는 건가?

"시온은 제 보좌관입니다."

조용히 쿠키를 먹느라 말이 없었던 세르펜스가 용병왕을 만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저런 거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용병왕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 어느 용병단이 귀족을 채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용병의 습성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게 고마워서, 머릿속에 이름을 똑똑히 새겨 두려던 것뿐입니다."

"으음···, 오해라면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오해가 아니라면 안 죄송하다는 뜻이다. 미심쩍다는 시선 또한 거두지 않았다.

푸로르가 용병왕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소곤거리는 가운데.

눈새눈새 홀로 '세르펜스가 갑자기 시온이 제 보좌관이라 밝힌 게, 용병왕에게 뺏길까 봐 그런 거였어?' 하고, 눈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무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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