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41화 (741/925)

741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13)

세르펜스는 갑자기 퀭해진 두 귀족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테이블에 착석했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러했다는 것뿐.

녀석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한껏 꾸며내고 있었다.

"낯빛이 너무 어두워 보이는데···. 혹시 저희가 위층에 올라간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두 귀족에게 신성력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는 척 스캔을 시도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귀족들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용병왕을 만나고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게 분명하다.

그들이 고민하며 괴로워하도록 말이다.

'의심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가 보네.'

그래도 사람이 의심을 아예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더군다나 지금이 어디 보통 시국이던가?

예전처럼 인간 불신에 시달리며 모든 일을 혼자 떠안으려 하는 게 아닌 이상.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의심과 경계심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도 악숭 세력을 전부 소탕하고 나면, 몰래 스캔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낫나?'

그건 그때 상황을 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나는 세르펜스의 옆자리에 앉으며 귀족들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자신들이 받은 게 치료인 척하는 스캔인 줄도 모르고.

두 귀족은 그 유명한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이 친히 신성력을 써 줬다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세르펜스가 그런 귀족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눈썹을 살랑거렸다.

그제야 귀족들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아까 세르펜스가 던진 물음에 답을 내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저희가 어떻게 해야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 시름이 깊어져서···."

"네,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과 함께 간악한 악마 숭배자들에 맞서 싸우고 싶지만. 어디 그게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괜히 함께 전장에 나섰다가, 여러분께 폐라도 끼치는 날에는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명예와 체면이라는 건 뭘까?

이름 모를 두 귀족은 마인과 싸우는 게 무서워서 돕기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여, 우리를 위한답시고 변명을 포장하느라 제 무덤을 팠다.

"아! 그래서 그런 어두운 표정을···. 이렇게나 저희를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세르펜스가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촉촉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두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 귀족들 뒤편으로, 유지스가 의자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세르펜스의 표정 변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녀석의 옆이 아니라 아예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은 거다.

그녀를 따라 휴마누스도 다른 테이블로 향하려고 하길래, 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자 잽싸게 손을 뻗었다.

'아무리 협상을 세르펜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성검의 주인인 너는 여기 앉아 있어야지!'

휴마누스는 간단하게 내 손길을 피해냈다. 그러고는 방금 뭐 한 거냐는 시선으로 멀뚱멀뚱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치는 없는 주제에 행동은 뭐가 이리 잽싼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본래 유지스가 앉았어야 할 세르펜스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휴마누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자세한 설명을 못 했는데도 순순히 앉는 걸 보면, 내심 세르펜스의 옆자리에 앉는 나와 유지스가 부러웠나 보다.

윈스톤은 열중쉬어 자세로 세르펜스의 뒤에 든든히 서 있었고, 에드나와 아니마는 유지스와 같은 테이블로 갔다.

그렇게 일행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세르펜스는 상냥한 목소리로 귀족들을 구워삶았다.

"행여나 저희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시는 거라면 안심하십시오. 세상을 지키는 방법이 어디 검을 들고 싸우는 것뿐이겠습니까? 저는 이 대륙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세상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

"있습니다. 정의로운 마음씨를 지닌 두 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다이크 왕국의 귀족이 은근슬쩍 빠져나가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세르펜스는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어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병력이 부족한 탓에 보호받지 못하는 지역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용병들을 고용하여 파견할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한들, 각국의 허가 없이 병력을 마음대로 보내는 건 불가합니다. 하여, 두 분께서 아스페르 연방을 돌며 허가를 받아내 주셨으면 합니다."

"예? 하지만 용병 대부분은 이미 고용되어 연방 곳곳에 퍼져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진정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고용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다다이크 왕국의 귀족이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지그트 왕국의 귀족이 떠들어댄 말대로라면, 다다이크 왕국은 다다익선 정신으로 베스티 용병단을 고용하러 온 거라고 했다.

그러니 세르펜스의 말에 지레 찔릴 만도 하다.

지그트 왕국의 귀족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두 분을 믿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실은···."

세르펜스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운을 뗐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테이블에서 구경 중이던 용병들까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르펜스는 마인 러스티를 잡을 계획을 설명했다.

"그래서 용병들을···!!"

"헌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이렇게나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해도 되는 겁니까?"

지그트 왕국의 귀족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고, 다다이크 왕국의 귀족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그에 세르펜스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사람을 잘 믿는 순진한 사람을 연기해냈다.

"이분들에게는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용병분들이야말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모두를 믿습니다."

어차피 설명해야 하는 거 미리 했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말하겠는가.

귀족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덕분에 대화 진행이 빨라졌다.

결론이야 뭐,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흘러갔다.

마인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는 목적까지 밝혔으니.

이제 도와주지 않는다고 내빼면 악숭이보다도 이기적인 놈이 될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마인이 부리는 마물과 싸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성검의 주인을 도와 연방을 구했다는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는 기회다.

그런 계산하에, 두 귀족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반드시 연방의 모든 국가에 협조를 받아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든 이들이 힘을 합치면 연방···. 아니, 대륙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악마 숭배자들에게 보여줍시다!"

두 귀족이 의욕을 불태우며 길을 떠났다.

부디 달리는 말 위에서도 저 의욕이 오래도록 유지되면 좋겠다.

"시온, 일어나십시오."

"왜요? 앉은 김에 여기서 놀다가 저녁 먹고 쉬러 가면 되지 않나?"

"시온이 입을 갑옷을 맞춰야 하잖습니까.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니, 되도록 빨리 주문해 놓아야 합니다."

세르펜스가 어서 일어나라는 뜻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오늘 당장 끝내야 하는 일에 내 갑옷을 주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갑옷 맞추시려고? 가죽으로 된 것을 찾으십니까? 아니면 금속으로 된 것?"

우리 얘기를 들었는지 용병 중 하나가 관심을 보이며 말을 붙여왔다.

그래서 가죽 갑옷을 구하려 한다고 말하니, 자신의 오랜 단골인 공방이 있다며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본인의 이름을 대면 특별히 신경 써 줄 거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끼리 후딱 갔다 올게요!"

"아,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갑옷 하나 맞추는데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랑 세르펜스 둘이서 빨리 갔다 오려고 했는데, 리에나가 함께 가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푸로르 님께서 리베타르시(市)에 도착하거든, 너클 글러브를 사 두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너클 글러브라면 기성품도 꽤 있을 테지만, 리에나는 손이 작은 편이어서 직접 맞춰야 했다.

세르펜스의 얼굴에 아쉽다는 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오랜만에 나와 둘이서 거리를 걸으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 셋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숙소를 나와서, 자신을 톰슨이라 소개한 오지랖 넓은 용병이 알려준 공방으로 직행했다.

거리에는 공방과 대장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톰슨이 아니었다면 적잖이 발품을 팔아야 했을 거다. 덕분에 수고를 아낄 수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시온 님은 어째서 신성석을 검 형태로 가공하신 건가요? 검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 일이잖아요."

갑옷과 너클 글러브의 제작 의뢰를 마치고 용병단 숙소로 돌아가던 중, 리에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질문했다.

왜 귀한 신성석을 쓰지도 않는 검으로 만들어 놨느냐는 뜻이다.

심지어 세니어의 자동 방어 기능 때문에 대련도 다른 검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니 리에나가 그런 의문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간다.

"세르펜스가 고집한 겁니다. 그때 얘가···, 뭐랬지? 신성석의 힘으로 방어만 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했던가? 그리고 검을 들고 있으면 견제 효과도 있을 거라는 말도 했었는데···."

나는 세르펜스가 신성석을 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우겼을 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옆에서 걷는 녀석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억울하다며 발뺌했다.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긴 뭘 모릅니까? 세니어가 저를 과보호하는 건 세르펜스를 똑 닮아서 그런 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르펜스는 예상했어야죠."

"······."

세르펜스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허리춤에 걸린 세니어를 노려보았다.

정말 신성석을 만들어 낼 당시 자신이 의도했던 바는 따로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결계를 펼쳐대는 세니어 때문에 자신이 혼난 것 같아서 억울해졌나 보다.

"원래 아이는 부모의 의도대로 자라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가장 닮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을 닮는다고도 하죠."

"으음···, 그런 건가?"

"네. 그런 거니까, 그것까지 고려했어야 합니다."

"그렇군. 내 생각이 짧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아이의 성장에 관한 지식만은 세르펜스보다 우위에 있다.

녀석 또한 그걸 알기에 내 말에 반박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했다.

나는 세르펜스의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세니어가 세르펜스를 닮아서 생긴 거 하나는 끝내주게 예쁘잖아요. 그거면 됐죠."

"외형이라도 당신의 마음에 든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검의 기능을 상실한 세니어를 힐끔거렸다.

적이 등장만 해도 결계를 펼칠 정도로 세니어가 과보호 겁쟁이란 사실을 알게 된 뒤.

녀석은 윈스톤을 통해 내게 체력 단련만 시키고, 검술 훈련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슬그머니 손을 뗐다.

그래서 세니어를 진짜 검처럼 쓰는 건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건만.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나 보다.

"뭔가 조금 이상한데요? 신성석이 제작자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발동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시온은 아이에 관한 문제로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일 겁니다."

"저···, 신성석은 아이가 아닌데요?"

"······."

너무나도 지당하신 리에나의 말씀에 세르펜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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