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42화 (742/925)

742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14)

세르펜스는 민망함에 입을 꾹 닫아버렸고, 리에나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 보여 말을 걸 수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저 멀리 베스티 용병단 숙소의 윤곽이 시야에 잡힐 무렵, 리에나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혹시···, 시온이 너무 약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닐까요?"

리에나가 난데없이 아픈 곳을 찔렀다.

내가 약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게 문제가 되어 보호만 받다가 바다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리에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빼먹었던 말을 얼른 덧붙였다.

"신성석이 엉뚱하게 반응하는 이유 말이에요."

"아! 그거···."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전 대화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한참이나 대화가 끊겼던 탓에. 그리고 내심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라서.

리에나가 그런 말을 꺼낸 의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즉 리에나의 말은 제가 검을 들고 있어도 저 자신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하니까, 어쩔 수 없이 세니어가 저를 보호하려고 결계를 펼치는 것 같다는 뜻이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리에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하지 못한 듯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제법 일리가 있다.

툭하면 세니어가 결계를 펼치며 신체 능력 향상 버프까지 걸어주더라도 나는···.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르펜스와 유지스. 윈스톤 할 것 없이.

모두가 세르펜스가 만든 신성석답다고 여겼다. 한 치의 의심도 품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세르펜스가 워낙에 나를 과보호 하며 끼고 돌았으니까.'

녀석이 만든 신성석도 그러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거다.

하지만 성직자인 리에나가 의문을 떠올릴 정도라면. 그리고 비슷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한 게 아니다.

"그런데 세니어가 제 검술 실력까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을까요?"

"일단 신성석은 제작자의 염원이 모여 만들어진 거니까, 그 판단의 기준은 세르펜스 님이 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

"······."

결국 세니어는 세르펜스의 의지대로 발동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괜스레 양손으로 후드를 잡고 끌어내리듯 더 깊이 눌러썼다.

변명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거로 보아 짚이는 구석이 있는가 보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와 세르펜스가 자신의 말을 너무 믿는 듯 보여서 그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리에나가 난감함을 표했다.

"아뇨, 듣고 보니 리에나의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세르펜스의 생각은 어때요?"

"당신은 약하니까 내가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고, 당신이 내게 의지한다는 게 기뻤다. 하나 당신이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갖추길 바랐다는 건 거짓이 아니다. 그래야 내가 적들과 싸우는 동안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 무엇보다 당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아다오."

"변명은 그쯤 하면 됐고, 결론은?"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역시 효율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신성석을 검에 박아 넣은 건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직접 검을 들고 적과 맞서기에 당신은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래 보인다."

"아무튼 세르펜스도 리에나의 얘기가 맞는 것 같다는 소리죠?"

"······."

세르펜스가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내가 자신의 말을 대충 흘려 듣고 결론만 요구하는 것 같아서 살짝 토라졌나 보다.

나는 그런 녀석을 어르고 달래주는 대신, 세니어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 그런 거라면 얘를 검으로 쓰기 위해서는 내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르펜스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는 건데···."

"그것도 당신이 강해지면 자연히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르펜스의 기준을 만족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그렇죠."

나는 세르펜스를 찌릿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에나의 추측이 정답이든 아니든. 세르펜스가 내 실력을 믿든 못 믿든. 어쨌거나 수련은 계속해야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버프를 받은 상태로 싸우는 연습도 해 둬야 하나···?"

"좋은 생각이다."

내 혼잣말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세니어의 신성력이 고갈되어 어쩔 수 없이 검을 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한다면 당연히 내 몸에는 버프가 걸려 있을 테다.

버프로 신체 능력이 향상되면 근력이 강해질 뿐 아니라, 반응 속도까지 덩달아 빨라진다.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땐 상관없으나 전투 중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테니.

적응 훈련은 필수다.

"아무튼 고마워요. 리에나 덕분에 세니어를 장식품이 아니라, 진짜 검으로 써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확실한 것도 아닌걸요."

"그래도요. 리에나가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세니어를 실전에 사용할 생각 자체를 못 했을 겁니다."

"그건 정말 아깝네요. 악마 숭배자들을 상대할 때 도움이 많이 될 텐데···.

리에나가 진심으로 아까워하며 세니어를 쳐다보았다.

괜히 귀한 물건을 썩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대화하는 건 이쯤 하고, 더 할 얘기가 있다면 돌아가서 할까요?"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겨 베스티 용병단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다.

"신성석으로 무기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역사상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기껏해야 장식용 단검 정도죠."

더 할 얘기가 있으면 돌아가서 하자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의상 한 말에 불과했다.

나중에 밥 한 끼 먹자는 약속처럼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리에나는 숙소에 도착하여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교단의 성직자 신분이다 보니 신성석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가 보다.

"왜 그런 거죠?"

"무기를 다루는 자는 대부분 오러나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신성력이 깃든 무기에 자신의 기운을 덧씌우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특히 오러의 경우에는 아예 불가능하죠."

"본인이 만든 걸 본인이 쓰면 안 됩니까?"

나는 어느새 1층에 내려와 있던 푸로르가 저녁 식사라며 가져다준, 소세지 그라탕에 포크를 푹 찔러 넣으며 리에나에게 질문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신성석을 만들 수 없다 보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죠."

"소중한 사람을 지킬 힘을 갖고 싶다는 바람은요?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적어도 한두 명쯤은 있을 만도 한데."

"힘을 원하면 수련을 해야죠. 신성석을 만든다고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럼 저처럼 오러 없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호신용 무기도 없었어요?"

"네, 드워프들이 실력 없는 사람에게 실전용 무기를 만들어주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크레아토가 그런 말을 흘리긴 했다. 자신은 실력 없는 사람의 무기는 안 만든다고.

이제 보니 무기를 만드는 드워프들의 공통 사항이었나 보다.

대체 크레아토는 나를 얼마나 동정했길래 선뜻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나선 걸까?

나는 미묘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포크를 빙빙 돌려 소세지에 치즈를 감아서 입에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게 술안주로 딱이다.

그리고 마침 테이블 위에는 맥주도 있었다.

'이게 여기 왜 있어···?'

나는 어처구니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으로 용병들 사이에 섞인 푸로르를 찾았다.

발견하는 건 쉬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의자에 올라서서 한쪽 발을 테이블 위에 척 올리고 있었으니까.

푸로르는 그 자세로 1,000cc 맥주를 원샷하고는 '캬─!'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빈 맥주잔을 머리 위에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용병들이 그런 푸로르를 둘러싸고 짝짝짝 박수갈채를 보냈다.

조카의 재롱 잔치를 지켜보는 친척 모임 같은 건가 보다.

언뜻 용병들 사이에서 보드카에 불을 붙이는 엘프를 본 것 같지만,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푸로르 님,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네요."

대화를 나누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푸로르의 재롱을 목격한 리에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푸로르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쳐 흘렀다.

"조금이라면 술을 마셔도 괜찮습니다."

푸로르를 보는 내 시선 속에서 부러움을 읽은 걸까?

세르펜스가 맥주잔을 슥 밀어서 내 앞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됐어요. 푸로르 말고 일행 중 술에 입 댄 사람은 없잖아요."

마인이 이곳을 공격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음주는 지양하는 게 좋다.

푸로르가 술을 들이켜는 것도 오늘 딱 하루만 허락된 일탈이겠지.

"당신은 전투원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여차하면 제가 술기운을 정화해 드릴 수도 있고···."

"어휴, 진짜 됐으니까 세르펜스도 어서 먹기나 하세요."

나는 새 포크로 소세지를 하나 콕 찍어서 녀석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세르펜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포크에 꽂힌 소세지를 먹었다.

"음···. 윈스톤 경이 좋아할 맛입니다."

녀석의 입에는 너무 짜다는 뜻이다.

나는 소세지 그라탕을 윈스톤 앞에 밀어 두고, 토마토 미트볼 파스타가 든 도시락을 꺼냈다.

* * *

우리가 리베타르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연방 곳곳에 퍼졌던 용병들이 하나둘 모여, 지금은 도시가 무척이나 붐볐다.

용병왕은 몰려든 용병들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제어하느라 매일 두문불출했다.

휴마누스도 성검의 주인으로서 용병왕과 함께 했고, 성검 일행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모인 건 용병들뿐만이 아니다. 연방 소속의 여러 국가에서 보낸 편지들도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다다이크 왕국과 지그트 왕국에서 왔다던 그 귀족들이 잘하고 있나 보네.'

하기야. 공짜로 용병이 와서 사람들을 지켜주고, 마인을 해치울 함정까지 파겠다는데 거부할 나라는 없겠지.

외국과 계약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찝찝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마인을 잡는 게 주목적인 만큼, 거부했다가는 괜한 의심을 사기 딱 좋다.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계획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져도 괜찮아요?"

"마인 처치에 관한 것 말인가?"

용병왕이 밖에 나간 사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세르펜스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답했다.

저 서류는 현재까지 리베타르에 도착한 용병들이 제출한 것으로, 그들의 대략적인 신상 정보가 적혀있다.

"네."

"비밀로 했다면 협조를 받아내기 힘들었을 거다. 국가의 비호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대신 보호해 주겠다는 이유를 들어, 억지로 용병을 보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자칫 자주권을 침해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계획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설명 안 해도 압니다."

"그런데?"

"마인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챌 확률이 높아지잖아요."

"······."

세르펜스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동요 하나 없는 침착한 눈빛으로 녀석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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