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회
78. 공작님과 아스페르 연방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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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도시 리베타르에 모여들었던 용병들이 아스페르 연방 각지로 흩어졌고, 거리는 언제 사람들로 붐볐느냐는 듯 한산해졌다.
일흔여 명의 용병들로 북적거렸던 베스티 용병단의 숙소 또한 썰렁해졌다.
그렇게 모든 용병이 빠져나가고.
용병들이 사용하는 장비를 제작 혹은 수리하는 장인, 용병들을 고용하기 위해 찾아온 고객들을 위한 숙박업 종사자 등.
이곳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반인들과 리베타르시(市) 지부의 신전 소속 성직자들만이 남았다.
'성기사들이 있으니 도시를 지킬 인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악숭 세력이 성직자들을 납치해간 전적이 있던 터라, 다른 병력 없이 신전만 믿고 있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저 부가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단순히 이 도시를 보호할 목적이라면 용병들을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런데도 용병들을 전부 내보내고 우리가 이곳에 남은 건, 마인 러스티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외진 곳에 숨어있다 보면 마인이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는커녕, 처치되어도 알 도리가 없다.
물론 이 세상은 전화가 존재하지 않는 터라, 대개 마인이 지나간 후 보고를 받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용병들이 숨어있는 곳이 습격받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감시역인 베스티 용병 단원들은 엄지 한 마디 크기의 작은 마력석을 하나씩 가져갔다.
그것들은 본디 아니마가 통신용 브로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수많은 실패작으로, 원래 크기는 그 두 배만 했다.
그 마력석에 새겨진 마법을 수정하여 반으로 쪼개 놓은 거다.
'실패를 그렇게나 많이 했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비싼 마력석을 그렇게나 많이 탕진했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한 쪽 마력석을 부수면 세트가 되는 반대쪽 마력석이 함께 부서진다고 한다.
대체 무슨 원리가 적용된 건지는 모르겠다. 설명을 들어도 모를 것 같아서, 어차피 마법이 다 그렇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넘어갔다.
아무튼 우리 측에 남은 반 쪼가리 마력석들은 지역명이 아닌 용병들 이름을 써 붙여서, 에드나와 아니마, 유지스가 삼교대로 24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일행들은 뭘 하고 있느냐.
일단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날 수 있다는 장점을 백분 활용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하늘에서 정찰했다.
'정찰이라고 해 봐야, 왕복 6시간 내외 거리를 둘이 번갈아가며 닥치는 대로 날아다니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운이 좋으면 마인 러스티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참고로 이 둘에게도 반 쪼가리 마력석을 지니게 해서, 여차하면 깨트려서 신호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윈스톤, 리에나, 푸로르는 매일같이 훈련에 매진했다.
세르펜스는 자기가 숙소에 남아있을 때만 대련을 하길 바랐으나 턱도 없는 소리다.
그렇게 여건을 따지다 보면 대련 시간이 대폭 줄어든다. 그러면 내 실력도 늦게 느는 거고.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부상은 감수하고 시작한 훈련이다.
윈스톤은 목검을 들고 있는 데다가 힘 조절 또한 하고 있었으며, 만에 하나 사고가 나더라도 리에나가 즉각 치료해줄 수 있다.
내가 빨리 강해져야 세르펜스도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윈스톤이 실수할 리가 없지 않으냐. 리에나의 치료 실력은 세르펜스도 인정하는 거 아녔느냐.
그런 식으로 세르펜스를 열심히 설득한 결과, 넉넉한 훈련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르펜스를 설득할 땐 정말 의욕이 넘쳤는데···.'
베스티 용병단 숙소 뒤뜰을 굴러다니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자니, 불현듯 후회가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면 쉬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다 쉬었으면 일어나시오."
땅바닥에 드러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러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윈스톤이 불쑥 시야로 들어와 흘러가는 구름을 가렸다.
벌써 휴식 시간이 끝났나 보다.
더 쉬고 싶다는 마음과 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상충했다.
직접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팔을 위로 뻗자, 윈스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자, 자. 우리도 다시 시작하자!"
푸로르가 힘찬 목소리로 말하며, 나와 마찬가지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리에나를 일으켜 세웠다.
리에나가 괴롭다는 듯 '으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눕느라 흐트러진 단발머리를 머리끈으로 질끈 묶었다.
문득 흙먼지로 더러워진 리에나의 주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나처럼 자진해서 훈련을 받겠다고 한 것도 아니건만.
하기 싫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는 리에나의 모습에 존경심이 생겼다.
'게다가 리에나는 본래 역할도 따로 있잖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리에나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에나의 손끝에서 하얀 신성력이 빛을 발하였고 곧 내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기운 없던 몸에 활력이 솟아나고, 피부에 닿는 한 줄기 바람마저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게 신체 능력 향상 버프를 걸어준 뒤. 리에나는 너클 글러브를 끼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길 반복했다.
저 너클 글러브가 완성된 건 며칠 전이다. 리에나는 그때부터 푸로르와의 대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을 하는 동안 지금처럼 내게 버프를 걸어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행들에게 걸어준 버프가 풀리지 않도록, 집중력 강화 훈련도 겸하고 있는 셈이다.
나도 버프를 받은 채로 싸우는 연습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다.
- 탁.
예민해진 청각에 땅을 박차는 소리가 잡혔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검을 뽑아들며 냅다 뒤로 물러났다.
후웅, 목검이 내 복부를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에서 휘둘러졌다.
내가 딴생각을 하느라 가만히 있으니 윈스톤이 기습을 해 온 거다.
"신성력의 보조를 받은 덕분이지만, 반응 속도는 나쁘지 않았소. 하지만 넋 놓고 가만히 서 있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소."
윈스톤이 덤덤하게 말하며 재차 목검을 휘둘렀다.
최근 들어 윈스톤이 저렇게 대련 도중 칭찬해 주는 일이 늘었다.
나는 칭찬을 받아야 성취감을 느끼며 실력이 빨리 느는 성격이라고, 열심히 주장한 덕분이다.
'그런데 이번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칭찬해 주자마자 풀어진다고 뭐라고 하겠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올려 윈스톤의 공격을 막아냈다.
버프로 향상된 신체 능력만큼 윈스톤이 수준을 조절했기에, 검을 쥔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상대의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을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여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에 드는 시간이 단축됐다.
그것만으로도 대련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 세상에서 일반인이 본래의 신체 능력만으로 싸우는 건, 진짜 너무 불리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검을 세차게 휘둘렀으나, 윈스톤은 여유롭게 내 검을 쳐냈다.
팔이 확 젖혀졌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어차피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검을 꽉 붙들며 젖혀진 팔을 몸통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짧은 순간에도 윈스톤의 목검은 내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나는 옆으로 비켜서서 그 공격을 피해내며, 목검을 쥔 윈스톤의 손을 걷어차고자 했다.
윈스톤이 팔을 접어서 내 발차기를 피했다.
그렇게 우리 둘을 나란히 헛방을 날렸다.
그러나 공격 실패로 말미암은 피해는 내 쪽이 더 컸다.
윈스톤은 허리를 비틀며 접었던 팔을 휘두르듯 폈다. 목검이 긴 호선을 그리며 내 허리를 후려쳤다.
나는 방금 막 들어 올렸던 다리를 내리던 차였기에 그 공격을 막거나 피할 수 없었다.
"커흑···!"
"전투 중에 발차기를 응용해 보라고는 했지만, 아무 때나 쓰라는 얘기는 아니었소. 한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동작은 기본자세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오. 그러니 반드시 공격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허를 찌르는 용도로 쓰는 게 좋소."
처음에는 직접 겪어보며 몸으로 익히라고 말했던 윈스톤이지만, 이제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몸으로만 익히는 것보다 몸과 머리. 둘 다 쓰는 것이 내게 더 잘 맞는 교육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조언을 받았으나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알았다는 답조차 할 겨를이 없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줘서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자꾸만 욱신거리는 허리로 향하려는 두 손으로는 검을 움켜쥐고, 윈스톤의 목검을 흘려냈다.
윈스톤의 본실력이라면 고작 이 정도에 균형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현재 윈스톤이 설정한 적의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다.
일부러 균형을 잡지 않고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검을 들이밀려는 그 순간.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악! 아, 아파요! 푸로르 니임···! 읏! 그, 그만···!"
리에나의 비명이 들렸다.
버프가 풀렸다고 해서 윈스톤이 봐 줄 위인은 아니었기에, 나는 잽싸게 바닥을 굴렀다.
내 판단력이 옳았다고 인정이라도 하듯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목검이 꽂혔다.
"아프다고 말만 하지 말고 어서 빠져나와 봐!"
"시도는, 하고 있는데···. 아윽, 안 돼요···!"
대련 중에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자꾸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리에나가 푸로르의 관절기에 당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신성력으로 신체를 보호했는지, 그 덕에 관절이 완전히 꺾이지는 않았으나 고통이 상당한가 보다.
'나는 저거에 안 당해서 다행이다···.'
나는 푸로르에게 주먹질과 발차기만 배웠을 뿐. 관절기 같은 건 배우지도, 당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푸로르에게 물으니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관절기를 걸려면 상대와의 신체 접촉이 불가피한데,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죽거나 그대로 들려서 납치될 게 뻔하다나? 어차피 힘이 부족해서 관절을 제대로 꺾지도 못할 거고.'
사실 관절기는 푸로르도 실전에서 쓰지 않는 기술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한 놈만 붙들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같은 편도 제물로 바치길 주저하지 않는 악숭 세력의 특성상, 붙잡고 있어 봐야 고기 방패로도 못 써먹는다.
하지만 리에나는 후방에서 일행들을 보조하며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대일 상황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리에나는 악숭이의 몸에 상극인 신성력을 쑤셔 넣어 신체 내부에 타격을 주거나, 성화로 지지는 등. 들러붙은 채로 공격할 수단이 여럿 있다.
'신성력을 억제할 수 있는 주사 때문에 걱정이 되긴 하지만···.'
바다에서 배를 보호했던 것처럼, 피부 위에 결계를 두르면 그 또한 대처 가능하다.
그런 이유를 들어 푸로르는 리에나에게 관절기를 가르쳤고, 그래서 일반 너클이 아닌 너클 글러브를 사라고 했던 거였다.
"한눈팔지 말고 집중하시오. 선배 실력이 남 걱정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너무 오래 한눈을 팔았나 보다.
윈스톤이 목검으로 나를 쿡쿡 찌르며 꾸짖었다.
"리에나의 집중력이 흩어져서 신성력 버프도 풀렸고, 그 상태로 공격도 피했으니 대련은 끝난 줄 알았죠."
"핑계 대지 마시오. 이제까지 그런 이유로 대련을 끝낸 적은 없었잖소?"
"그래도 공격은 안 하셨네요?"
"완전히 무방비 상태길래, 아무런 배움 없이 얻어맞을 게 뻔해 보여서 그만뒀소."
그렇게 말하는 윈스톤의 목소리에 한심함이 가득했다.
나는 무안함을 느끼며 자세를 다잡고 검을 들어 올렸다.
리에나는 아직도 푸로르와 물리적으로 얽힌 채 죽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기에, 버프는 받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면 버프 없이 싸우는 훈련을 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