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2회
79. 공작님과 마인 러스티 (6)
한시름 놓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프뤼네 왕국에서 유지스가 크게 다쳤을 때, 세르펜스가 법숭이에게 했던 짓이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저 스승 법숭이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놈을 직접 심문하겠다고 나설까 봐. 그러고 나서 괴로워할까 봐.
단지 그게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여전히 탐이 나는 혓바닥이로구나. 그 정도로 무력이 보잘것없으면 이런 상황에 혀가 굳을 법도 한데, 참 유연하기 짝이 없도다."
마인 러스티가 나를 향해, '이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을 보았나?'라는 얘기를 길게 늘려서 말했다.
그런 마인의 말에 세르펜스가 반박했다는 건,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되는 뻔한 흐름이다.
"시온의 혀는 그쪽의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제 혀는 다른 누구의 재미가 아닌, 제 먹는 재미를 위해 존재합니다!"
"······."
세르펜스가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녀석이 생각하는 내 혀의 존재 의의가 따로 있었나 보다.
저렇게 대놓고 서운해할 줄 알았으면, 그냥 립 서비스로 녀석을 우쭈쭈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걸 그랬다.
"푸훗!"
지금 우리가 대치 중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기라도 한 걸까?
마인 러스티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그 태평한 모습에 스승 법숭이가 길길이 화를 냈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마물을 몰고 왔으면 사람들을 죽이고, 인질을 붙잡아 협박해서 도망칠 길을 만들어야지!"
"신성 결계 안에 갇힌 것은 그쪽인데, 어째서 내게 명령을 하는 건지 모르겠도다. 대체 얼마나 머리가 굳으면 그럴 수 있는 것이냐?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구나."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받쳐 턱을 괴며, 마인 러스티는 스승 법숭이를 한껏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멸시가,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는 조롱이 걸렸다.
선명하게 드러난 그 감정을 목도한 스승 법숭이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스승이 모욕당한 것이 화가 났는지 제자 법숭이들도 와락 인상을 구겼다.
'타락펜스도 악숭이들과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악숭이들은 타락펜스를 질시하고 은연중에 따돌릴지언정, 지금 마인 러스티에게 그러하듯 아랫것 취급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러할 게 타락펜스는 수많은 계획을 성공시켰고, 마왕의 총애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펜스는 타락펜스대로 악숭이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에 마인 러스티는 마왕의 눈에 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악숭이들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결과가 바로, 적인 우리를 앞에 두고 기 싸움이나 하고 있는 이 상황일 테다.
"마왕님께서 친히 내린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실패한 주제에! 누구더러 머리가 굳었다는 거지?"
"뻔히 예상할 수 있고 미리 대처 방안을 생각해 두었어야 할, 중요 사안을 변수 취급한 머저리에게 한 말이었느니라."
"허! 그럼 너는 프라시더스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거냐?"
"돌아와? 아하하하하! 자신의 멍청함을 이렇게나 당당히 떠들어대다니! 참으로 어리석은지고!"
스승 법숭이의 말에 마인 러스티가 또다시 과장스럽게 웃어댔다.
그 웃음 포인트가 신경 쓰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언제 이동했는지,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옆에 바짝 붙어서 무어라 귓속말하고 있었다.
얘기를 마친 휴마누스가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르펜스가 그의 팔을 살짝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휴마누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에 기반을 두어 느낌적인 느낌으로 추측하건대.
적들이 말다툼을 벌일 때 공격하자는 휴마누스의 의견에, 세르펜스가 잠시 기다리라며 반대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에게 어련히 계획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걸 테고.
"왜, 왜 웃는 거냐···?!"
"정녕 모르겠느냐? 애초에 프라시더스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마인 러스티가 짙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에 스승 법숭이는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고···.
"뭐어?! 그게 사실이야, 세르펜스?"
눈새눈새가 화들짝 놀라서 세르펜스를 향해 물었다.
세르펜스는 질문을 던진 휴마누스가 아닌 내 눈치를 살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눈새 아니랄까 봐, 휴마누스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세르펜스가 나타났을 때 바로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텐데···.'
생판 남인 마인 러스티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는 게 분하기도 하고,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고.
녀석이 나타나기 전 내 마음속에 휘몰아쳤던 부정적인 감정들.
그리고 녀석이 나타난 후 내가 느꼈던 안도감이 떠올라 허탈해졌다.
"프라시더스가 자신과 성검의 주인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을 때, 남겨진 일행들이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사내라면. 마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를 경계했을 리 없지 않으냐."
"네가 늦게 와서 모르나 본데, 저자가 나타난 건···!"
"악마가 소환된 직후겠지. 아니 그렇더냐?"
마인 러스티가 스승 법숭이의 말을 끊었다.
그때 당시 이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마인 러스티는 세르펜스가 나타난 타이밍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 마인의 통찰력에 스승 법숭이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다.
"고작 하급 악마 소환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모아둔 제물을 소모하게 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내 생각이 틀렸느냐?"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중급 이상의 악마를 소환하려 했다면 그 전에 막았을 겁니다."
"정작 성검의 주인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반응인데, 어째서 얘기하지 않은 것이냐?"
"아군의 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 놓고도, 말을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을 망치게 둔 그쪽이 궁금해할 일은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마인 러스티의 말을 맞받아쳤다.
녀석이 마인의 말을 인정하고 나서야, 현실 부정을 끝낸 스승 법숭이가 마인 러스티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마인은 신경조차 안 썼지만.
"어째서 내가 저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계속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걸 저들이 알았다면, 이번 계획은 아예 진행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쪽과 병사들은 꼼짝없이 기나긴 소모전을 이어나가다가, 결국에는 이름 없는 용병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악마 소환의 제물이 되었을 터이니.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고 싶었을 겁니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마인 러스티는 세르펜스의 추측에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더 짙게 그릴 뿐이었다.
그래도 느낌상, 세르펜스가 틀려서 비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정답을 맞혀준 것에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슬슬 잡담은 그만두는 게 좋겠구나."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누가 그만하라고 말리기 전까지는 끝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것처럼 굴던 두 사람이.
갑자기 대화를 그만 하기로 합의를 보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세르펜스는 검을 세워 들며 신성력을 불어넣었고, 마인은 병사들을 태운 마물들이 자신의 앞에 오도록 대열을 바꿨다.
그때 어디선가 철커덕거리며 단단한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리베타르 지부 신전의 성기사단이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헉헉대며 뛰어오는 신관들의 모습도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결계를 거두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이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 싶었나 보다.
악숭이들이 인질을 붙잡고 신전을 둘러쌌다고 해서 지원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아까 소년을 붙잡고 있던 리빙 데드를 해치웠던 것처럼, 신전 쪽의 인질도 세르펜스가 구해 준 모양이다.
성직자들이 악숭이들의 뒤쪽에 포진하고 서자 리에나가 신성 결계를 거뒀다.
졸지에 악숭이들은 샌드위치처럼 우리와 성직자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저기 나이 든 법숭이는 되도록 생포해 주세요! 제자를 셋이나 거느리고 다니는 놈이니, 캐낼 정보가 많을 겁니다!"
"법숭···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저 흑마법사를 붙잡으면 됩니까?"
"네, 맞아요!"
단장으로 보이는 성기사가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곧 내 말을 기똥차게 알아듣고 표적을 제대로 잡았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 눈치 없는 사람은 휴마눈새 하나뿐인가 하노라.
"러스티이-! 이 이기적인 것! 감히 너 하나 살자고 나까지 죽이려 들어?! 그런다고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스승 법숭이가 바쁘게 마법진을 그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세르펜스가 정찰을 나간 척만 하고 하늘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걸, 마인 러스티가 알면서도 숨긴 게 어지간히도 원망스러운 모양이다.
'저러면서 마법을 완성할 정도로 다중작업 능력이 뛰어나다면, 차라리 마법진을 하나 더 그리는 게 낫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나 보다.
마인 러스티는 스승 법숭이가 자신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붓거나 말거나, 같잖다는 미소만 슬쩍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세르펜스와 휴마누스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여유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굉장히 바쁠 거다. 마물들의 움직임을 조종해야 하니까.
마물들은 세르펜스와 휴마누스, 두 사람을 향해 돌격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숨은 집을 노리고 돌진했다.
좋게 말하면 효율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비겁하고 치사했다.
두 사람은 마인 러스티를 내버려 두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휴마누스는 빠른 속도로 마물을 앞질러서 방패를 들어 올려 마물을 막아냈다.
그리고 신성력이 솟구쳐 오르는 성검을 휘둘러, 마물과 그 위에 올라탄 병사를 단숨에 베었다.
세르펜스는 결계를 펼쳐 마물을 막아낸 후.
마물의 뒤쪽으로 접근해 병사의 목을 날리고, 마물의 심장을 찔렀다.
순식간에 마물과 병사가 각각 둘씩 죽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마물은 아직 많았고, 세르펜스와 휴마누스 두 사람이 그것을 전부 막아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도 큰 걱정은 없다. 성기사들과 함께 온 신관들이 있으니까.
두 사람이 미처 막지 못한 마물들은 신관들이 펼친 결계와 충돌했다.
- 쾅, 쾅, 쾅!!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간단히 돌진을 막고, 마물뿐 아니라 그 위에 탄 병사까지 손쉽게 해치우길래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가해지는 충격이 상당한지 몇몇 신관들이 '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마물에 타고 있던 병사들의 검에서 검푸른 오러가 뿜어져 나와 결계를 두드리자, 신관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결계를 두드리는 병사들을 처치하려 했으나, 마인 러스티는 그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앞에서 거대한 마물이 튀어나와 벽을 만들고.
뒤에서, 옆에서, 밑에서. 병사들이 검푸른 오러가 담긴 검을 휘두르거나, 마상용 창을 들고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