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53화 (753/925)

753회

79. 공작님과 마인 러스티 (7)

사방팔방에서 들이닥치는 공격에도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날랜 움직임으로 적들의 공격을 피한 후 반격까지 꾀했다.

황금빛과 은빛 신성력이 깃든 검이 마물과 병사의 목숨을 거두었고,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마물이 추락하며 쿵 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꽤 큰 소리가 났는데도 마인 러스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예상 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마인은 데려온 마물의 절반은 계속 건물을 보호하는 결계를 공격하도록 내버려두는 한편.

방금 추락한 마물의 자리를 다른 마물로 채우며 세르펜스와 휴마누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예사롭게 구는 건 마인의 병사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마물들이야 마인 러스티가 조종하는 것이니 그렇다 칠 수 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게 아닐 텐데도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지도 않고, 신관들이 친 결계를 집요하게 두들겨댔다.

누가 보면 결계에 원수라도 진 줄 알겠다.

마인에게 조종당하는 마물은 병사들보다 더했다.

신성 결계를 부리로 쪼아대고 머리로 들이받는 그 모습이 마치 자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리가 깨지고 이마에서는 검은 피가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는 게 굉장히 섬뜩했다.

그렇게 병사들과 마물들은 결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끝에, 기어이 결계 중 하나에 금을 내는 데 성공해냈다.

- 쩌적.

금이 간 결계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아직 앳된 얼굴의 젊은 신관 하나가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젊은 신관은 결계를 단 1초라도 유지하고자 이를 악물었다. 앙다문 입술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휴마누스가 금이 간 결계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려 했으나, 또다시 마물의 방해에 가로막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조바심을 내 봤자 집중력만 흐릴 뿐, 전투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휴마누스가 조바심을 내는 게 이해되었다. 그럴 만했다.

무릎 꿇은 젊은 신관 못지않게, 결계를 유지하는 다른 신관들의 안색도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마물의 수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휴마누스와 세르펜스가 마물들을 전부 해치울 때까지, 신관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 쨍강!

결국 결계 하나가 깨져버렸다.

어찌어찌 버티는 듯했던 젊은 신관이 누적되어가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기절해 버린 탓이다.

세르펜스가 재빨리 깨져버린 결계를 대신할 신성 결계를 펼쳤다.

그 덕분에 건물이 무너져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하나 젊은 신관이 기절해버릴 정도로 큰 충격이 가해지는 결계를 유지하며, 전투를 이어나가는 건 세르펜스에게도 무거운 부담일 터였다.

더군다나 녀석은 신성력 날개도 계속 신경 써야 했다.

그런 연유로 세르펜스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고, 그만큼 휴마누스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두 사람은 결계를 공격하는 마물을 저지하려 하고, 마인은 그런 둘을 방해하는 식으로.

하늘에서 진행되는 전투는 점점 고착되어갔다.

반면에 지상에서의 전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투 초반에 팔이 떨어져 나간 제자 법숭이는 피를 많이 쏟은 상태로,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린 탓인지 어느 순간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검숭이들의 수도 확연히 줄었다.

"러스티!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쓸데없이 결계에만 매달리지 말고, 우선 성기사들을 먼저 공격해라!!"

궁지에 몰린 스승 법숭이가 목소리를 높여 명령을 내렸다.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마인 러스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알은체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걸 깨달은 스승 법숭이의 얼굴이 분노와 모욕감에 물들었다.

그래도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더 중요했던 걸까?

"크윽···. 아, 알았다! 만약 나를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시킨다면, 네 처분에 관하여 간부님께 잘 얘기해 보겠다! 비록 마인으로서의 네 능력은 부족하지만, 두뇌는 아직 쓸만한 것 같으니 그 점을 강조한다면 너 하나 살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간절히 애원하는 놈의 입에서 '간부'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놈이 말하는 것을 들어 봤을 때.

2회차의 흑기사 윈스톤처럼 무늬만 간부인 허수아비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악숭 세력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진짜 간부'를 일컫는 걸 테다.

'간부에게 부탁할 수 있다는 말인즉, 그 간부와 만날 수 있거나 직통으로 연락할 수단이 있다는 뜻이겠지?'

놈을 생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마왕이 아닌 간부에게 부탁한다는 거로 보아, 이 스승 법숭이는 마왕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마왕은 아직 마계에 처박혀 있으니까.

현재 우리에게는 마왕보다 악숭 세력의 간부에 관한 정보가 더 중요하다.

"···나 하나만?"

마인 러스티가 스승 법숭이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무척이나 아니꼽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좀 더 확실한 보상을 걸어보라며 흥정했다.

"나라를 통째로 바쳐가며 우리와 함께할 것을 약속했던 주제에, 설마 병사들의 목숨까지 보장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이제 와서? 공국이 사라지고 나니까 갑자기 의리라도 샘솟나?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어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라!"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거짓말을 해 봤자, 마인 러스티에게 간파당할 뿐이라는 걸 아는 까닭일까?

스승 법숭이는 마인 러스티에게 과거의 선택을 떠올려 보라 말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비꼬는 말투는 둘째치고, 어쭙잖게 지키지 못할 거짓 약속을 들먹여 신뢰를 잃는 것보다는 나은 판단이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이로다."

마인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뒤로 스승 법숭이가 마인을 설득하고자 몇 번이고 말을 걸었으나, 마인 러스티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스승 법숭이가 그리 신뢰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현재로서 그나마 연명할 가능성이 높은 건 놈의 말을 따르는 것뿐이다.

한데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다니.

'대체 왜지? 자신의 힘 그 자체인 병사들과 마물들을 잃고 나면, 당장 목숨을 부지해 봤자 비참한 미래가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정말 병사들과의 의리 때문에?'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남에게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해를 끼치는 주제에, 자신의 가족들은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흔하다.

병사들은 마인 러스티가 공왕이던 시절 손수 거두어들인 자들이다. 심지어 그녀를 따라 악숭 세력에 들어갈 정도로 충성심도 깊었다.

여타 공국민들에 비해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했다.

함부로 소모품 취급하거나, 악마 소환의 제물로 바치고 싶지 않을 만큼.

'용병들과 싸우면서 죽은 몇몇은 이미 혈옥으로 만들어, 이번 악마 소환에 써버린 것 같지만···.'

만약 마인 러스티가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제물로 쓰지 않겠다며 버틴다 하더라도, 그래 봤자다.

그랬다간 악숭 세력은 게릴라 작전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모든 병사를 죽여서 혈옥으로 압축해 버리거나 산제물로 바쳤을 테니까.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어···."

뿌득뿌득 이를 갈며 스승 법숭이가 중얼거렸다.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놈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좌절과 체념이 묻어났다.

하지만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 반대였다.

도망칠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붙잡힐 생각도 없다면.

한계까지 내몰린 놈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다.

"설마, 자폭할 셈인가?!"

내가 자폭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스승 법숭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다.

죽음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다 같이 죽자며 대뜸 자폭을 시도하는 건 악숭이의 흔한 패턴이니까.

[성검의 주인]에서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적당히 여지를 주면서 천천히 숨통을 조이거나, 자폭할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제압해야 하는 건데···.'

유지스가 잽싸게 화살을 시위에 메겨서 스승 법숭이를 향해 쏘아 보냈다.

너무 서두르느라 화살에 정령의 힘을 충분히 싣지 못한 것일까?

혹은 스승 법숭이가 자신의 생명력과 함께 뽑아낸 흑마력의 위력이 너무 강했던 걸까?

화살은 폭주하여 회오리치는 흑마력에 휩쓸려 본래의 궤도를 이탈해 버렸다.

유지스가 다시 활시위를 당겼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제자 법숭이들의 몸에서도 흑마력의 기운이 흘러나와 스승 법숭이의 기운에 더해졌다.

스승 법숭이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흑마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흐름이 더욱 거세졌다.

그에 따라 공기의 흐름도 바뀌어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아아악! 스, 스승님! 살려주세요!"

"끄어억···! 제, 제발···. 그만···!"

제자 법숭이들의 입에서 비명과 애원이 튀어나왔다.

본인의 의지로 스승 법숭이의 자폭을 돕는 게 아니었나 보다.

바닥에 쓰러진 제자 법숭이는 진작 죽었던 건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력이 뽑히는 건 살아있는 제자들과 똑같았다.

아직 젊은 편에 속했던 제자 법숭이들이 놈들의 스승 못지않게 급속도로 늙어갔다.

그러더니 미라처럼 삐쩍 말라가는 듯하다가 가루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그렇게 제자 법숭이들의 기운도 모자라 신체까지 먹어 치워 놓고도 부족했던 걸까?

휘몰아치는 흑마력은 검숭이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아는 건지. 아니면 살아남아 봤자 교단의 이단 심문관과 대면할 뿐이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건지.

검숭이들은 가만히 서서 천천히 죽어갔다.

"에드나 씨, 저거 마법으로 어떻게 못 멈춰요?!"

"저건 마법이 아니라 흑마력 자체를 폭주시킨 거라서 파훼하는 건 불가능해요. 저렇게 된 이상, 주체가 되는 흑마법사가 죽어도 폭발은 멈출 수 없어요."

내 다급한 물음에 에드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답변은 받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아니마에게 눈길을 던졌다.

아니마는 에드나의 팔을 껴안듯이 붙잡으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후후후, 생포는 물 건너갔으니 참 아쉽겠구나."

하늘에서 조롱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웃고 있는 마인 러스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악숭 세력의 계획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교단의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에 동참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뉘우치고 우리를 도와주려던 건 아니었나 보다.

마인 러스티는 마물들을 이용해,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우리를 도우러 오지 못하도록 열심히 훼방을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르펜스가 펼친 결계의 보호를 받는 건물에 마물을 더 보내기까지 했다.

덩치를 키워나갔던 검은 기운은 이제 한 점으로 뭉쳐지는 중이었다.

마치 튕겨 나가기 직전의, 한껏 압축된 스프링을 보는 듯하다.

그곳에 스승 법숭이의 모습은 없었다. 놈의 육체 또한 저 검은 기운에 흡수되어버린 걸 테다.

새까만 구체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세르펜스라 하더라도, 저런 걸 막으려면 전력을 다해서 결계를 펼쳐야겠지?'

그러려면 우선 건물을 보호하는 결계와 신성력 날개를 거둬야 한다.

하지만 녀석이 결계를 잠깐이라도 거두는 순간. 건물은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깔려 죽고 말 테다.

운 좋게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밖으로 나오더라도 마물의 한 입 거리가 될 뿐이다.

어느덧 생명력과 흑마력이 뒤섞인 검은 기운은 모이고 모여 거의 완전한 구체를 이루었다.

세찬 바람도 폭풍 전야처럼 잠잠히 가라앉고 불길함이 감돌았다.

사람 여럿 잡아먹은 기운이 작은 폭발만 일으키고 사그라질 리가 없다.

'제대로 터지면 적어도 도시의 절반쯤은 날아가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세르펜스가 갈등 어린 표정으로 검은 구체를 흘깃거린 그때.

그 구체에 새하얀 신성력 결계가 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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