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회
79. 공작님과 마인 러스티 (10)
"갈등하게 된다는 짧은 한마디에 그렇게나 많은 뜻이 담겨있다고···?"
"문장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맥락을 읽어야죠."
"나, 나는···. 모르겠어···."
내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휴마누스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했다.
고작 맥락을 읽으라는 것뿐인데 저토록 어려워할 줄이야.
'휴마누스는 눈치를 키우기 전에 국어 공부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명색이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니까 개인 교사가 따로 있었을 텐데. 누군지 몰라도 굉장히 무능한 선생님인 게 확실하다.
그런 무능한 사람이 대체 어떻게 황태자를 가르칠 수 있었던 건지 실로 의문이다.
신성 루멘 제국 황실의 교육 비리가 의심되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직접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건 고작 두 번째이거늘. 벌써 내 성격을 파악한 모양이구나."
이제껏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시선만 던졌던 마인 러스티가 수고스럽게도 허리를 굽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행동이 마치 내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위함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분명 그런 이유일 테다.
내가 '이전 회차'를 알고 있다는 건 마왕도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놈은 그 사실을 악숭이들에게도 슬쩍 흘렸다.
자칭 '테네브리오의 예언자'라는 놈이 떠들어댄 말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대.
마왕은 '이전 회차'에 관해 한차례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라 곧이곧대로 밝히는 대신, '예언' 형식을 빌린 듯했다.
자신이 예지한 미래는 이러이러한데, 룩스메아 또한 같은 미래를 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모든 걸 비틀어 버렸다.
대충 이런 식으로 입을 털었겠지.
'한때 내가 룩스메아의 계시를 받아서 미래를 보았다고 얘기하고 다녔던 것처럼.'
마왕이 그렇게 떠들어 댄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했다.
룩스메아가 멋대로 시간을 덮어씌우기 할 수 있다는 걸 악숭이들이 알게 되었다고 치자.
기껏 성검의 주인을 물리치고 대륙을 손에 넣어 봤자, 롤백 되어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다는데.
전의가 꺾여서 어디 싸울 맛이 나겠는가?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룩스메아가 시간을 멋대로 조작할 수 있으면, 테네브리오 님도 당연히 가능하시겠죠?' 따위의 순수함 가득한 질문을 던지게 되겠지.
하지만 마왕이 할 수 있는 건, 룩스메아가 세상을 롤백했을 때 기억을 유지하는 게 전부다.
그런 마왕이 그 질문에다 대고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입 다물고 열등감에 부들부들 떠는 게 고작이겠지.
'아무튼 벌써 자신의 성격을 파악했느냐고 놀라는 걸 보면, 마인 러스티는 그 가짜 예언조차 전해 듣지 못한 건가?'
그만큼 마왕은 마인 러스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일 터.
마인 러스티는 마왕을 진심으로 숭배하지 않는 데다가, 2회차에서 휴마누스의 편을 들었고 급기야 그에게 개인적인 호감까지 보였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이번 회차에서도 휴마누스에게 반해서 악숭 세력의 정보를 퍼주면 곤란할 테니, 최대한 정보를 숨기고자 했겠지.
정작 현재의 마인 러스티는 '폴드 왕국의 국왕' 러스티와 다르게 휴마누스를 싫어하는 듯 보였지만.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로구나."
"제가 그쪽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인데 두 번째라고 하길래, 저희가 언제 또 만났었나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이 처음이라는 결론만 나오네요."
"바스툴 왕국의 왕성에서 보지 않았느냐.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벌써 잊은 것이냐?"
"예? 저는 살아생전 바스툴 왕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녜요?"
공식적으로 나와 세르펜스는 단 한 번도 바스툴 왕국에 방문하지 않았다.
윈스톤을 구한 건 비밀 결사 단체인 일루미나티고, 베일을 도운 건 에인젤 주교를 비롯한 룩스메아 교단의 성직자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연기를 펼쳤다.
"잡아뗄 생각인 게냐?"
"잡아떼다니 무슨···? 설마하니, 바스툴 왕국에서 그쪽이 준비한 계획을 망친 게 우리라고 거짓 보고라도 한 겁니까?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교단의 듣보 성직자들이나, 새파랗게 어린 현 바스툴 국왕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고하자니 쪽팔려서?"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마인 러스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래도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된 상태다.
"괜찮아요, 괜찮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기 싫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죠! 전 다 이해합니다."
"···하, 말을 참 재밌게도 하는구나."
"거 참, 이해해 준다는데도 계속 아닌 척 잡아떼시네! 우리 그냥 솔직해집시다. 네?"
거짓을 늘어놓으며 솔직해지자고 말하는 내 모순된 언행이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잊기라도 한 것일까?
마인 러스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돌연 이마를 짚었던 손으로 붉디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고 미친 듯이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우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혼자 웃는 겁니까? 같이 좀 웃게 알려줘 봐요."
"남을 농락하는 언변이 뛰어나다 듣기는 했는데 정말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어째서 대화를 섞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는지 알겠노라."
"그쪽도 그렇고, 그거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던데요?"
"그대가 자꾸 이런 식으로 사람을 허물없이 대하니 그렇게 된 것이지 않으냐?"
"엥? 먼저 제 혀에 관심을 보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제 탓을 하시는 겁니까? 양심도 없으셔라!"
"아하하하하하!"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건지 마인 러스티는 또다시 소리를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전장 한복판에서 혼자 저렇게 웃고 있으니,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실성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마인 러스티와는 달리 내게는 그리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소득은 있었다.
"재미는 있었으나 손해뿐인 대화로다. 중요한 작전에 실패해 놓고, 체면을 구기는 게 싫어서 거짓 보고를 올린 비겁자가 된 데다가···."
마인 러스티는 말을 하다 말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자신의 목 옆에 들이밀어진, 황금빛 신성력이 어린 검날에 눈길을 보냈다.
"대화를 즐기는 새에 이렇게 뒤를 잡히기까지 했으니."
잠시 중단되었던 마인 러스티의 말이 이어졌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인은 계속 마물들을 조종했다.
하지만 인간의 두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작업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신경이 분산된 만큼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물을 조종하는 마인의 집중력이 흐려진 사이.
세르펜스가 마물들을 베어내며 길을 터 주었고, 휴마누스가 그 사이로 빠져나와 마인의 시야각을 벗어난 방향에서 접근했다.
그 결과. 휴마누스가 마인의 뒤에서 그녀의 목에 성검을 들이미는 현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병사들에게 공격 중지를 지시하고 마물들을 멈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야···."
"설마 이 검 때문이라 말할 생각인 것이냐? 그럼 내가 공격 중단을 지시한다면, 나와 내 병사들을 죽이지 않을 건지 되묻고 싶구나."
본인의 목숨줄을 손에 쥔 휴마누스의 명령에도 마인 러스티는 태평하게 되물었다.
자신이 할 대사를 뺏어간 거로도 모자라 되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휴마누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뒤를 돌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당황할 것임을 예상했던 걸까?
마인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들의 존재 의의는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니라. 내가 저들의 삶을 거둔 이래로 오직 그것만을 위해 최소 10년, 길게는 20년.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세상과 단절된 음지에서 수련을 거듭하며, 나의 적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해 왔노라."
그녀가 고아처럼 오갈 데 없거나 삶의 의지를 잃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비밀리에 그들을 병사로 키웠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도.
'그 내용을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을 땐, 그저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에 대한 보은 정도로 여겼는데···.'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빡세게 수련만 시켰다니?
악숭이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납치한다거나, 뒷공작을 펼쳐서 좌절시킨 뒤 도와주는 척 손을 뻗는 짓은 안 했겠지만.
그런 뒷사정만 제외하면, 악숭 세력에서 검숭이와 암숭이 등을 키울 때 쓰는 방식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나는 세르펜스가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도록 장려하고, 내게 지나친 수준의 존경심을 품지 못하도록 자제시켰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제 부모를 생각하듯.
딱 그 수준의 감사를 느끼며, 딱 그 정도의 효도로 돌려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도 세르펜스는 내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다.
'그런 식으로 밖에서 풀어놓고 키워도 그 지경인데···.'
절박한 사람들을 구해다가 한데 모아 가둬 놓고, 은혜를 갚고 싶거든 강해져서 자신을 위해 싸워 달라며 무기를 쥐여준다면.
그 결과야 뻔했다.
은혜를 갚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맹목적인 충성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마인 러스티가 한 말처럼, 오직 그 존재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 이외의 다른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될 테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두고 '세뇌당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런 이들에게 얌전히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목이 떨어져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않으냐?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싸우다 죽는 것이 저들에겐 더 나은 삶이로다. 그것만이 내가 나의 기사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마지막 긍지이니라."
"긍지?! 헛소리하지 마! 신도 아닌 마왕에게 신앙심을 증명하라며 사지로 몰아넣는 악숭이들과 그게 뭐가 달라!"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욱하는 마음에 소리를 냅다 질러버렸다.
잠자코 죽어줄 수는 없으니 마지막까지 반항한다는 건,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발악이다.
하지만 병사들을 싸우다 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거기다 대고 긍지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
"감히 러스티 님께···!"
여태껏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마인의 병사 중 누군가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거겠지.
"맞는 말만 했는데, 왜 화를 내는 겁니까? 귀댁의 러스티 님은 악마와 계약했거든요? 누가 뭐라 해도 어엿한 악숭이입니다! 아, 혹시 악숭이의 뜻이 뭔지 몰라서 그러세요? 악숭이는 악마 숭배자의 준말로, 악마 숭배 세력에 속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마인 러스티는 악숭이입니다!"
이미 악숭이인 자에게 악숭이라 말했다는데 무슨 반박할 말이 있을까.
병사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무기에 오러를 거칠게 밀어 넣어 휘둘렀다.
그래 봤자 내게는 닿지 않았지만.
괜히 적군에게 광폭화 버프를 넣어서 우리 편을 힘들게 한 것 같은 느낌이라, 괜히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