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회
79. 공작님과 마인 러스티 (11)
"그대의 말대로니라. 나는 악마와 계약을 했고, 그렇기에 나와 내 기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에 따를 수밖에 없었노라. 더군다나 자국의 백성들을 전부 악마 숭배 세력에 제물로 넘겼지. 이런 내가 악마 숭배자가 아니면 누가 악마 숭배자일 수 있겠느냐."
마인 러스티가 후후 웃으며 한쪽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목 바로 옆에서 칼날이 번뜩이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 대담한 행동에 놀란 것은 검을 들이댄 휴마누스 쪽이었다.
"엇?!"
갑자기 마인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휴마누스의 손이 움찔하며 마인의 목에 얕은 생채기를 남겼다.
아무리 살짝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휴마누스의 검이 어디 보통 검이던가?
악마와 계약한 마인이 신성력을 두른 성검에 베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고통을 느꼈으리라.
분명 그러할진대 마인 러스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게 전부였다.
"조심 좀 하거라."
"아! 미안···이 아니라, 왜 내가 혼나고 있는 거지?"
휴마누스가 얼떨결에 마인에게 사과해버렸다가 재빨리 철회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혼나는 것에 의문을 품었는데,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쟤는 대체 왜 저러고 있을까?
"잠시 방해가 있어서 대화가 끊겼구나."
휴마누스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일까?
마인 러스티가 다시 나에게 말을 붙였다.
보는 눈이 없다면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을 테지만, 이대로 휴마누스가 병풍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휴마누스에게 직접 대화를 주도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눈새눈새는 내가 보낸 신호를 전부 튕겨냈다.
내가 휴마누스에게 눈치를 주느라 바빠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자, 마인 러스티는 멋대로 대화를 진행 시켰다.
"기사들이 나를 따르다 죽는 것을 긍지로 여기게 된 것을 두고, 내가 악마 숭배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던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긍지로 여길 기사라면, 우리 일행 중에도 한 명 있다.
그 기사는 당연하게도 윈스톤이다.
만약 세르펜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녀석을 구할 수 있다면, 윈스톤은 기꺼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주군인 세르펜스가 마인 러스티와 동급이 되는 건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병사들의 양성 방식을 두고 한 말입니다."
"후후, 부정은 못 하겠구나."
처음으로, 마인 러스티의 웃는 얼굴에서 씁쓸함이 감돌았다.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죄책감이 묻어났다.
검게 물든 오러를 줄기차게 뽑아내어 싸우던 병사들의 기세가 조금 약해졌다.
마인이 말하는 걸 들었나 보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저들을 세상과 단절시킨 건,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워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 타국뿐만이 아니라 자국의 귀족들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까지···?"
아까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줄 때는 멀뚱멀뚱 가만히 있더니.
신하들을 믿지 못하여 그들에게까지 병사를 키우는 걸 비밀로 했다는 마인의 말에, 휴마누스가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온 의문 가득한 목소리에 마인 러스티의 입가에 조롱이 떠올랐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제국 황실에서 태어난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는 모르시겠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쪽이 병사들을 키운 건 공국의 독립과 자립을 위한 거 아니었어? 그렇다면 귀족들에게 숨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
"참 순진하구나. 넌더리가 날 정도로."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마인 러스티가 휴마누스의 말을 끊었다.
"폴드 '공국'에서 '공왕'이란, 존경이 아닌 원망을 사는 존재니라. 명예가 없기에 권력도 없고. 그렇기에 무력을 손에 넣는다고 한들, 직접 운용할 권리 또한 손에 쥘 수 없노라. 자국의 귀족들에게 나는 그저 백성의 원망을 받아내기 위한 방패막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도다. 그들은 내 신하가 아니었고, 나는 왕이 아니었느니라. 그들은 내 주인이었고, 나는 그들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노라."
저 목소리에 그득히 배어든 조롱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던 휴마누스?
아니면 자국이 속국으로 전락한 상황에서도, 이권을 쥐기 위해 왕을 억압하던 공국의 귀족들?
그조차 아니라면.
왕가에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왕관이 아닌 죄인의 굴레를 쓰게 된 본인의 처지?
"내가 공들여 밭의 작물들을 키워도, 그것으로 배를 불리는 건 내가 아닌 그들일지니. 그래서 나는···. 그래서 '짐'은 그들의 눈을 피해 밭을 갈아, 힘을 키워야 했느니라. 빼앗을 수 없고 빼앗길 리 없는. 오직 짐을 위한 충성스런 기사들이 필요했노라. 귀족들의 불만을 힘으로 억누를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말을 하는 건 '마인 러스티'가 아닌, '공왕 러스티'였다.
그러나 그 말 속에 담긴 건, 공왕이 그 어디에서도 털어놓지 못했던 탄식이다.
러스티 뤼제 폴드라는 한 사람이 부당하게 짊어져야만 했던 고뇌이자 울분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을 억누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폭발하여 다 함께 폭사할 것이 자명했기에 전쟁을 원했노라. 공국의 작은 땅덩이가 아니라, 외부로 눈을 돌릴 수 있게끔. 하나의 목표를 만들어 나아가다 보면, 진정으로 짐의 신하가 되지 않을까···. 짐은 그리 생각했었노라."
러스티가 원했던 전쟁이란, 악숭이들과의 싸움이 아닌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일 터였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불필요악'이다. 그것이 침략 전쟁이라면 더더욱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왕권이 흔들리고 귀족들의 세가 강한 왕국에서는 '필요악'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게, 바로 침략 전쟁이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을 거두어 무기를 쥐여주고, 반쯤 세뇌하여 맹목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전쟁을 바랐던 건. 아니, 바랄 수밖에 없었던 건.
러스티, 그녀가 악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도록 내몰렸을 뿐이다.
"그래서 침략 전쟁을 도와 달라는 말을···."
휴마누스가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마인 러스티가 공왕이던 시절. 휴마누스에게 공국이 본래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느냐고, 대놓고 물어보기라도 했나 보다.
"그러하니라. 그래서 일찍이 사정을 알았다면 도와줬을 테냐?"
"사정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침략 전쟁을 도울 수는 없어."
"악마 숭배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서?"
"아니. 무고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정석적인 대답이로구나."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였으니까."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듯, 휴마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과연 그대가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였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말해 보아라."
"만약 지금이 악마 숭배 세력이 활개 치는 시기가 아니라서, 원하던 대로 일이 진행되어 전쟁을 시작했더라도. 당신은 후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싸우다 죽어나가는 건 백성이고, 타국의 땅을 짓밟아 챙긴 이득으로 배를 채우는 건 귀족들일 테니까."
휴마누스는 앞서 마인 러스티가 했던 말을 통해, 그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했다.
당신이 느꼈던 억울함과 똑같은 감정을 퍼트리고도.
당신과 다르게 뒤에서 몰래 힘을 기를 수조차 없는 진정한 약자를 그렇게 내몰고도.
자신의 안위를 지켰으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도발이다.
"···후흣. 그래, 그대의 말이 옳도다. '짐'이라면 필시 후회했겠지."
마인 러스티가 흡사 울음처럼 들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휴마누스가 말한 내용을 '공왕 러스티' 또한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바랐던 그 전쟁의 창끝을 다른 국가가 아닌, 악마 숭배 세력에게 향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한낱 재물 따위가 아니라 평화와 생존이라는 더 큰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죄인의 국가라는 오명을 지울 수 있는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그런 명분을 내세워 귀족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리하지 않았느냐며 휴마누스가 답답한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내 그대에게 약조한 것을 아직 지키지 못하였구나."
감정의 기복을 드러낸 휴마누스와는 반대로, 마인 러스티는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약조'라는 뜬금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휴마누스는 악숭 세력이 꾸민 유인책에 걸려 이 도시를 잠시 떠났다가, 마인 러스티를 뒤꽁무니에 달고 돌아왔다.
그때 둘이서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닌 휴마누스이니만큼,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이 도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만한 약속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 괜히 불안해졌다.
"후후, 많이 긴장한 것 같구나. 행여 내가 황태자를 모함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이냐? 그런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기 있는 누구 때문에 이간을 붙이는 건 못하게 되었으니 심려치 말거라."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휴마누스 대신, 마인 러스티가 세르펜스를 눈짓하며 내게 안심하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적이 그런 말을 한다고 안심이 될 턱이 없다.
"정말이니라. 어째서 내가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고 자국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친 것인지, 하도 끈질기게 물어보기에 대답해 주기로 했을 뿐이로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인 러스티가 손바닥을 쫙 펼친 채 양손을 어깨높이까지 올리며 말했다.
더는 저항하지 않겠다는 행위였다.
방금 막 세르펜스가 검을 휘둘러 마지막 병사의 목숨을 거둬들인 참인지라, 마인에게 남은 것은 본인이 타고 있는 마물 하나뿐이었다.
저항을 하려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협조적으로 질문에 대답해주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항복하지 않으면 네가 어쩔 건데?' 하며 싸움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짜 얘기해 줄 생각이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마누스가 굉장히 솔깃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인 러스티의 얘기가 정말 어지간히도 궁금했나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궁금했다. 그녀는 2회차에서 휴마누스가 말했던 것처럼, 악숭 세력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으니까.
"줄곧 그러고 싶다고 티를 내었는데, 정녕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이건 정말 심하구나."
마인 러스티가 부러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휴마누스에게 피해를 줄 방법이 없으니, 죽기 전에 실컷 놀리기로 작전을 변경했나 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사람을 놀릴 줄이야.
휴마누스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황당과 곤혹이 섞인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