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3)
말을 하면서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시온의 가짜 지인들 때문에 한껏 기분이 상한 상태였으니.
이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려면 제온을 비난해야만 했다.
어차피 오늘 내가 맡은 배역은 비비의 보호를 반대하는 역할이고 제온은 그 반대다.
그와 나의 대립은 예정된 것이었고, 내가 제온에게 화내는 것 또한 각본에 있는 내용이었다.
'비록 각본과 달리, 시온의 지인들과 한데 묶어 제온을 쓰레기로 분류해 버리고 말았지만···.'
과거, 제온은 나를 성공한 뒤 가족을 버린 쓰레기로 몰아간 적이 있다.
그 일과 이번 일을 퉁칠 수 있지 않을까?
제온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은 잘 분리수거해서 버리고 연극에 집중해야겠다.
"왜 대답이 없어?!"
"···그래, 나는 주인님께 부탁하려고 일부러 여기서 기다렸어."
내가 대답을 재촉하자, 묵묵히 허리를 굽히고 있던 제온이 천천히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그리하여 드러난 제온의 표정은 장난 아니게 싸늘했다.
쓰레기 취급을 당해서 화가 난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냥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택 안에서 조용히 부탁해도 될 것을 굳이 여기서 얘기한다는 건···."
"형이 생각하는 그 이유가 맞아."
"집사님! 이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입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제온을 노려보며 존댓말과 함께 '집사님'이란 호칭을 끼워 넣어 말했다.
집사로서의 프라이드는 어디에 갖다 버리고,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뜻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제온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냉랭하여 거리감이 느껴졌다. 또한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는 적의가 느껴졌으니.
내 믿음은 잘못되지 않았다. 제온은 타고난 배우 체질이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느낌이 완전 악역인데?'
준비한 각본 속 제온은 이렇게까지 뻔뻔하지 않았다.
집사는 주인님께 사사로운 요구 따위를 해서는 안 되기에 수도 없이 번민하고, 또 갈등하다가.
결국 프라시더스 가문의 집사로서의 프라이드를 버리고 가족의 안전을 선택한.
그저 가족들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할 뿐인 평범한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그래서 세르펜스에게 부탁을 하면서도 송구함을 감추지 못하고 죄인 같은 태도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제온은 어떠한가.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공격적으로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내가 넘겨준 쓰레기 설정을 그대로 안고 갈 생각인가 보다.
"됐고, 5분 지났으니까 이따 돌아와서 얘기합시다."
"저는 꼭, 지금 여기서 답을 들어야 합니다."
"왜 이러세요, 집사님? 사람들 다 보는 장소에서 진짜 이래야겠습니까?"
"그러게 제가 어제 주인님께 잘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들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텐데."
제온의 태도와 어투가 180도 달라지긴 했지만, 이는 대본에 있는 대사였다.
그렇다. 사실 이번 연극에서 악역 포지션을 맡은 건 바로 나였다.
어젯밤 제온은 내게 몰래 찾아와 비비가 죽을 뻔했던 얘기를 전하며,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세르펜스를 설득해 달라며 호소했다는 설정이다.
나는 그것을 매정하게 거절했고.
"그 얘기는 어젯밤에 끝난 거 아닙니까? 제가 그때 말했을 텐데요, 공작님께 부담 주지 말라고."
"제가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냥 가족들이 공작저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뿐인데. 주인님께서는 다시 저택을 비울 예정이시니, 불편하거나 부담될 일도 없잖습니까?"
"리벨론 가 사람들을 공작저에 들인다는 것 자체가 문젭니다! 듣자 하니 악숭이들이 무서워, 호위들을 잔뜩 이끌고 수도로 올라와서 지내는 귀족들로 모든 여관이 꽉 찼다죠? 수도에는 대신전도 있고 치안도 확실하니까. 만약 리벨론 가 사람들이 공작저로 들어온다면, 그 귀족 중 공작저에서 지내게 해 달라며 요구해올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 같아요?"
나는 한껏 비아냥대며 가르치는 투로 말했다.
본래 각본대로라면 제온이 미안함에 고개를 못 들고, 묵묵히 내 빈정거림을 듣고 있어야 했지만.
"그딴 거 그냥 거절해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쓰레기 설정이 추가된 제온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냐는 듯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멋진 애드립이다. 이것을 살리지 못한다면, 일루미나티 수장으로서 체면이 안 산다.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차별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공작님을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고요!"
"보좌관님은 신의 사자고, 리벨론 가는 보좌관님의 가문입니다. 그러니 차별이 아니라 구분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제온 이 자식, 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막 던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이미지가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모든 것을 연극에 바친 상대 배우를 앞에 두고 훗날의 일을 걱정하는 건 실례겠지.
"신의 사자는 어디까지나 '저' 한 명입니다. 리벨론 가문은 상관없어요. 공작님께서는 저를 향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미 리벨론 가문에 많은 것들을 베푸셨습니다. 그럼 만족할 줄 알아야죠."
"생사가 걸렸는데, 만족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리벨론 가문 사람들의 생사를 왜 공작님께 떠넘깁니까? 뭐, 여분 목숨이라도 맡겨놨어요? 본인들 목숨은 알아서들 챙깁시다! 정 불안하면 징병을 해서 영주성을 더 확실히 지키든가. 그러고도 부족하다 싶으면 용병들이라도 고용하든가, 알아서 하라죠?"
"말씀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뭘요?"
"리벨론 가는 보좌관님의 가족이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아···."
나는 고의로 멈칫하며 대화를 끊었다.
'지금 이 대화는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말다툼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실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덤으로 악숭이들에게, 내가 리벨론 가문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저는 이제 리벨론 가문의 차남인 시온이 아니라, 프라시더스 가문의 보좌관입니다. 집사님이야말로 본인의 신분을 잊은 건 아니시죠? 심지어 집사님은 로베르토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이제는 '리벨론'조차 아니잖아요?"
"그래도 제 뿌리는 리벨론이고, 리벨론 가는 제 가족입니다."
"아니, 집사님이 그렇게 나오면 전 뭐가 됩니까?"
"가족의 감사함도 모르는 사람이 되겠죠."
제온의 그 한 마디로 나 또한 쓰레기가 되었다.
이쯤 되면 제온 개인의 이미지만 문제인 게 아니라, 리벨론 가문이 콩가루 집안 취급당하게 생겼다.
"그래도 제가 형인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심한 건 보좌관님의 태도입니다! 태어난 지 이제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은 막내가 목숨을 위협당했다는데, 보좌관님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환생한 지 2년 만에 죽을 뻔한 시온과 PTSD에 시달리는 리벨론 백작 부인을 생각하면, 안타깝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티 낼 수 없다.
나는 부러 빈정거리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을 왜 집사님이 멋대로 정합니까?"
"애초에 막내가 죽을 뻔한 건 보좌관님 때문이잖습니까? 막내에게···. 그리고 리벨론 가의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그건, 뭐···."
만약 이게 연극이 아니고, 제온이 아닌 다른 놈이 똑같은 소리를 하며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몰아갔다면.
나는 지금처럼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거다.
민숭이가 비비를 죽이려 한 건 내가 신의 사자이기 때문이고, 나를 신의 사자로 선택한 건 룩스메아인데 지금 신을 비난한 거냐며 반박했겠지.
하지만 고작 연기 때문에 제온을 악숭이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냥 말문이 막힌 척이라도 해야겠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리벨론 가의 안전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제대로 알린 거겠지?'
이제 슬슬 피날레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좀 더 시간을 끌다가,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저는···, 신의 사자가 되면서 신 룩스메아께 맹세했습니다. 비록 제게 무력은 없지만, 공작님을 이용하려 들거나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못된 놈들은 확실히 쫓아낼 수 있으니까.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대륙을 지키는 도구 취급을 받아온 가여운 공작님을 지켜 드리겠다고요. 그러니 리벨론 가문 사람들을 공작저에 들여 보호하는 건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요."
못된 놈들에게서 세르펜스를 지키고 싶다는 건 진심이지만, 나는 룩스메아에게 맹세 따위 한 적 없다.
즉 이건 미리 준비해둔 대사 중 하나다.
'모두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이라 생각했겠지만, 사실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라는 반전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악역 이미지를 제온과 나눠 가지며 각색된 극에서, 이 대사가 과연 똑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얌체처럼 쓰레기 명단에서 내 이름만 쓱 지우고, 혼자 발을 뺀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럼 보좌관님은 계속 반대하십시오. 어차피 중요한 건 주인님의 의사지, 보좌관님의 의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
제온이 내 말을 무시하며 세르펜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또다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청했다.
"집사인 제가 주인님께 개인적인 일로 부탁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탁하겠습니다. 제발 제 가족을 지켜주세요."
"으음···."
세르펜스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고민 가득한 눈동자가 힐끔힐끔 나를 향했다.
내가 극구 반대한 요구를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망설인다는 설정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내 얘기에 제온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반항적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에 맞서 나는 '불만 있냐?'라는 말을 최대한 표정에 녹여내며 제온을 마주 노려봤다.
눈싸움이 성사되려는 찰나, 제온은 고개를 휙 돌려 세르펜스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가족 전체를 보호하시는 게 부담스러우시다면, 막내와 어머니라도 보호해 주십시오. 주인님은 비비의 후견인이시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그 정도라면···."
"집사님! 정말 이러시기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공작님이 어떻게 거절합니까?! 후원을 해주는 것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빌미로 공작님께 책임을 물으시다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나는 제온의 말에 대답하려는 세르펜스의 앞을 막아서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제온이 나를 철천지원수라도 보듯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쳐다봤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 무척이나 실감 났다. 어제 열심히 연습시킨 보람이 있다.
"보좌관님이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님을 보호하겠다고 하신 것처럼. 저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난이든 감수할 겁니다. ···작은 형의 몫까지."
"······."
제온이 '작은 형'. 그러니까 진짜 시온을 언급했고,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고, 연극은 마지막 한 장면만 남았다.
"가족 모두를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말씀은···."
"리벨론 백작 부인과 동생분을 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야말로 곤란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세르펜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대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