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7화 (777/925)

777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5)

나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심호흡했다.

내가 신의 사자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밝혀졌으니. 어쩌면 요란한 환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장하며 마차에서 내린 것도 무색하게, 대신전 입구에는 경비를 서는 성기사들 뿐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성기사들이 가벼운 묵례를 해 왔다.

'···어, 이게 끝?'

천사의 영혼 어쩌고 하는 건 교황을 비롯한 극소수에게만 알려진 설정이고, 내가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교황이 알고 있기 때문일까?

예상과 달리 호들갑 떠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머쓱함을 애써 숨기고 성기사들을 향해 목인사를 건네며, 어쨌든 조용히 넘어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대신전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교황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어서 오십시오, 시온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슈테판 님께서 왜 여기까지 나와 계세요?!"

"그야 시온 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지요."

"제가 안전한 곳에 계시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신전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며, 여차했을 때 저를 보호해 줄 분도 함께 기다렸습니다."

그 얘기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교황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입은 옷을 보아하니 이단 심문관인가 보다.

"마리안느 C. 플레일이라고 합니다. 가까이에서 신의 사자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황을 신경 쓰느라 이제야 제대로 살펴보는 건데 무기가 정말···, 장난 아니다.

그 흉악함 때문에 이단 심문관의 자기소개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다.

튼튼한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의 양옆 고리에 걸려 있는 쇠자루와 거대한 철구, 허리에 두른 긴 쇠사슬.

흔히 철퇴라고 부르는 무기로, 이제껏 보아온 이단 심문관의 무기 중 가장 무시무시한 생김새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 허리에 저런 걸 감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나? 심지어 철구가 그냥 둥글둥글한 것도 아니라 막 뾰족뾰족한 게 달려있는데···?'

생활 속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기필코 악숭이의 머리통을 깨부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걸 든든하다고 해야 할지 무시무시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기가 참···, 멋지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얼굴만 보면 조카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줄 것 같은 자상한 이모 같은 인상인데, 시선을 내려 허리춤을 보면 험상궂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려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교황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교황은 '말을 잘 들었으니 칭찬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몹시 부담스럽다.

신앙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다 늙은 노인을 새파랗게 젊은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도록 내모는 걸까?

순간 그런 의문이 떠올랐으나 깊게 고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라서,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전을 잘 챙기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슈테판 님은 이 교단의 구심점이니까, 최대한 신중히 움직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슈테판 님께서 안전해야 교단도 안전하고 그래야 대륙도 안전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아─! 시온 님께서 저를 이리도 중히 여겨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야말로 교황이 나를 과도하게 숭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나는 천사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믿을 것 같지도 않고, 행여 믿는다 하더라도 문제다.

이제까지 내 앞에서 보인 추태가 떠올라, 교황이 매일 밤 이불 킥을 하다가 수치사라도 하면 정말 큰 일이다.

'그건 그렇고 주변에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없어서 참 다행이네.'

교황이 내게 아첨하는 이 광경을 누가 보고 소문을 퍼 나르면 어떻게 될까?

가정만으로도 끔찍하여 상상조차 하기 싫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입구까지 나오지 마시고, 안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대신전 안에서만 지내시는 것이 답답하시겠지만···."

"신 룩스메아 님의 품 안과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데, 어찌 답답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을 이곳에서 지내도 포근함만 느껴질 뿐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굳이 답답한 점을 찾아보자면, 시온 님을 제일 먼저 마중하지 못하고 가장 마지막에 배웅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이제 슬슬 들어갑시다."

노인분의 말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최대한 맞장구치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건만.

도무지 얘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영혼에 새겨진 유교 정신이 그러면 안 된다고 외쳤으나, 유교도 따지고 보면 종교가 아니던가?

이곳은 룩스메아 교를 제외한 종교는 모두 이단 취급을 당하는 세상이다.

"헉! 오래 세워 두어서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네. 빨리 안내하세요."

교황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내게 사과했고, 나는 이단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유교 정신을 꼭꼭 숨겼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다소 싹수없는 태도를 보이니, 휴마누스를 포함한 성검 일행이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성검 일행보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일루미나티 일동이 더 너무했다.

교황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대신전의 심부에 있는 대회의실이다.

교단의 핵심 인원인 교황과 추기경들이 모여 앉아 중요한 일을 논하는 곳으로, 반드시 엄숙함을 지켜야 하는 장소다.

그런데 지금은 자리마다 귀엽고 앙증맞은 데코레이션이 돋보이는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주기적으로 디저트 가게에 방문하신다기에 좋아하실 것 같아서 준비해 봤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디저트를 좋아하는 건 제가 아니라 세르펜스긴 한데···."

"네, 프라시더스 님의 입에 디저트가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닌데, 누가 그랬어요?"

"마리안느 님이 알타르 님에게 그리 전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특이 취향이 있다는 듯 왜곡된 정보를 흘린 알타르에게 있을 터.

그 말을 전한 마리안느 이단 심문관과 실행에 옮긴 교황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무튼 감사합니다. 마침 오는 길에 한바탕 열연을 펼치느라 살짝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잘 먹을게요."

"아! 그 얘기도 알타르 님께 들었습니다.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목표하시던 결과는 얻으셨습니까?"

알타르가 연극 내용을 흘린 건 괜찮다.

제온과 리벨론 백작가문이 괜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내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교황이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별로 안 괜찮다. 설마 재공연을 요구하진 않겠지?

"시온의 지인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일이 살짝 꼬일 뻔했지만, 어찌어찌 잘 풀었어요."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 몰려들었나 보군요."

"뭐, 그렇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넘겼다.

그러나 교황은 그럴 수 없는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감히 신께서 대륙의 평화를 위해 내려보내신 천사님을 이용하려 들다니···!"

"그 사람들은 제가 신의 사자라는 것밖에 모르잖아요. 그리고 세르펜스와 엄청 친하다는 거랑."

"감히 룩스메아 님께서 신의 사자로 선택하신 시온 님과 그런 분께서 총애하는 자를 이용하려 들다니!"

내가 정정하든 말든, 교황이 내뱉는 말의 시작과 끝은 달라질 줄 몰랐다.

아무리 교황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시온의 가짜 지인들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화내게 내버려두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얘기는 먹으면서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교황이 손수 의자를 빼주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원형 테이블인지라 상석은 따로 없었으나 혼자서 튀는 의자 디자인으로 보건대, 누가 봐도 교황 전용 좌석이 분명했다.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빠르게 옆자리를 선점하는 세르펜스를 보고 그냥 앉았다.

"이런! 시온 님을 오랜만에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워, 제가 주책을 떨어댄 탓에 준비한 차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말았군요. 새로 내오겠습니다."

"아뇨, 됐어요. 디저트는 슈테판 님께서 준비해 주셨으니, 차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리 우려둔 세계수 잎 차를 꺼냈다.

이 또한 알타르에게 미리 얘기를 들었는지, 교황이 '그게 바로 그···!' 하고 외치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냥 모르는 척하고 차를 따르는 데 집중했다.

교황의 바로 옆에 마리안느가 앉았고, 자리를 뺏기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 세르펜스가 일어나 찻잔을 돌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꼴이, 내게 쓰다듬을 받으며 교황의 부러움을 사고 싶었나 보다.

속이 빤히 보였으나 심부름을 잘했으니 상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한 손으로 찻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교황의 반응은···.

'확인하지 말자.'

일부러 옆을 보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은 뒤, 앞에 놓인 네 개의 에클레어 중 하나를 집어먹었다.

씹는 순간 톡 터져 나오는 디프로매트 크림과 위에 올려진 딸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적절한 상큼함이 가미된 기분 좋은 단맛을 냈다.

"오, 이거 맛있네요! 세르펜스도 어서 먹어봐요."

"···뭔가 잊으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 맞다! 우리 반말하기로 했지? 세르펜스도 어서 먹어 봐, 맛있더라."

"그래."

원래도 오뚝함을 자랑하는 세르펜스의 콧대가 평소보다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간단히 요기도 했겠다, 이제 얘기 드릴게요. 아까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공작저 앞에서 죽치고 있던 사람들에 관한 것과, 그들 탓에 변형된 연극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 설명한 뒤.

내가 잠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교황이 리액션을 보였다.

"시온 님께서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망발을 하다니! 어쩌면 이단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이단일 겁니다!"

"그 사람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중에 민숭이가 섞여들었을 가능성은 저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옆 반 친구라 주장하던 놈이 있었거든요? 그 새끼가 제일 수상합니다."

혹시 누가 아는가?

놈이 공작저를 감시하느라 주변을 배회하다가, 우르르 몰려든 시온의 가짜 지인 무리에 휩쓸려 끼게 된 것일지.

어쩌면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깐 뻔뻔한 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온과 친분이 아예 없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이미지를 훼손시키려 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 또한 자격지심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돈 드는 것도 아니니 의심해서 손해 볼 건 없다.

놈보다 덜할 뿐이지, 나머지 가짜 지인들도 의심스러운 건 매한가지다.

악숭이들 또한 나를 이용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까.

"행여나 생사람을 잡으면 곤란하니까, 교단에서 확실하게 조사해 주세요. 그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네, 실망하시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교황은 어째서 내가 그들을 의심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뒷조사 의뢰에 응했다.

맹목적이라는 게 이런 점에서는 편하고 좋다.

'그나저나 앞으로는 내게 친한 척 접근하는 사람은 죄다 의심해 봐야 하는구나···.'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를 의심하며, 항상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사람들을 대해야만 했던 과거 세르펜스의 처지가 공감되었다.

그나마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기라도 하지.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버텼나 싶다.

짠한 마음이 들어서 내 몫의 에클레어 하나를 세르펜스에게 내어줄까 했는데, 녀석의 앞에 놓인 접시가 두 개인 걸 보고 그만뒀다.

윈스톤이 접시째로 에클레어를 전부 녀석에게 바친 것이다.

'그냥 내 몫의 디저트를 빨리 해치우고, 서류나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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