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6)
빠르게 접시를 비운 후.
나는 우리가 대신전에 찾아온 목적이었으나 디저트에 밀려 방치되었던. 사실은 내심 외면하고 싶었던 거대한 서류 더미에 시선을 던졌다.
"보고서는 여기 있는 게···, 전부죠?"
"현재까지 도착한 건 이곳에 전부 모아놓았습니다."
교황의 말을 직역하자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보고서가 더 있다는 뜻이다.
프라시더스 공작령에서 세르펜스와 밤샘 작업을 했을 때조차, 이만한 양의 서류가 쌓인 건 본 적이 없건만.
과연 전 대륙 각지에서 모인 정보라 그런가 양이 무지막지하다.
기가 질린 얼굴로 내가 서류 산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자, 교황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부 악마 숭배자의 소행인 건 아닐 겁니다. 게다가 사고조차 아닌 오해나 뜬소문도 꽤 섞여 있는 듯하니, 너무 우울해하지 마시지요."
아무래도 교황은 쌓인 서류의 양만큼 사람들이 악숭이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까 봐, 내가 근심하는 줄 알았나 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 살펴보기 전이지만, 서류의 내용이 모두 악숭 세력과 관련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악숭이들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하루하루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
낯선 사람이 보인다거나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악숭 세력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가져오는 사소한 제보들을 대충 폐기할 수는 없다.
제보를 해도 조사를 안 한다는 얘기가 돌면 사람들은 수상한 것을 발견하고도,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그냥 지나쳐버릴 테니까.
어쩌면 진짜로 악숭 세력과 관련된 사건일 수도 있고.
'···봐야 할 서류가 잔뜩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열심히 제보해 준다는 거니까 좋은 거겠지?'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성검의 주인] 시기의 성검 일행을 떠올리면, 가만히 앉아서 보고서만 들여다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도 이 많은 양을 우리끼리 확인하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 지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으니. 약간은 솎아낼 필요가 있다.
"혹시 일손이 비는 성직자들이 있으면 불러다가, 피와 관련된 사건들만 따로 분류해 줄 수 있어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실종 사건들도요. 지금 종적을 감춘 세 번째 악마의 능력이 아무래도 피와 관련이 있을 것 같거든요."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처음부터 관련 자료만 모아왔을 텐데···."
"저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악숭 세력이 눈치채지 못했으면 해서, 일부러 얘기 안 했습니다."
"오오, 그렇군요! 과연 시온 님의 통찰력은 훌륭···."
"세르펜스가 그러자고 했어요."
"과연 시온 님께서 아끼실 만도 하군요! 사람을 보는 눈도 이리 출중하시니, 한없이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찬양거리를 만들어내는 교황을 보고 있자니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원래 교단 제일의 광신도가 교황으로 뽑히는 걸까?
아니면 신성력과 정치적 능력 등, 다방면으로 고려하여 뽑아 놨는데 하필 광신도가 걸려버린 걸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혹시 아부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샀나?
궁금증이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교황에게 이런 걸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보고서나 읽자.'
교황은 즉시 성직자들을 소집했고, 나는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서류나 집어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도 간식 시간을 끝내고 서류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단, 세르펜스만 빼고.
녀석은 자신 몫의 에클레어를 해치운 후. 윈스톤이 준 네 개의 에클레어는 고이 모셔두고 서류를 집어들었다.
남은 건 서류를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 먹을 생각인가 보다.
교황이 소집했던 성직자들이 하나둘 도착하여 머릿수가 늘어났는데도, 서류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눈이 빠져라 서류 속 글자들을 읽어내려간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일행 중 육체파에 속하는 윈스톤과 푸로르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두 사람은 괜히 차를 홀짝거리거나, 뻐근하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목 운동을 했다.
벌써 집중력이 떨어졌나 보다.
하지만 끈기 없다며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도 이 일이 질렸으니까.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 업무를 보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쉬운 작업이지만, 그래서 더 고역이다.
업무는 무언가 하고 있다는 기분이라도 들고, 단순 반복 작업은 딴생각이라도 할 수 있지.
재미없이 흉흉함만 감도는 보고서를 그저 읽기만 하는 건 도무지 몰입할 수가 없다.
"저희끼리 분류해 놓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교황이 넌지시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하지만 대놓고 기뻐하며 수락하는 건 너무 염치없어 보이겠지.
나는 잠깐 뜸을 들이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공연히 큼큼 헛기침을 한 후 말문을 열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슈테판 님. 그럼 저희는···."
"어?! 시온, 이거 봐봐!!"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돌연 휴마눈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눈앞에 서류가 들이밀어지자 나도 모르게 글자에 시선이 갔다.
"갑자기 이걸 왜 저에게···. 어, 잠시만요. 기시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 사건 뭔가 묘하게 익숙한 것 같은데···."
나는 휴마누스의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고 다시 첫 문단부터 천천히 정독했다.
아버지가 버섯을 캐러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실족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견 그냥 불우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딸이라는 사람도 교단에 제보하지 않았겠지.'
딸의 얘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산에서 무슨 썩은 내를 맡았다는 얘기를 슬쩍 흘렸다고 한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딸은 교단에 신고하자 했지만, 아버지는 근처에서 산짐승 하나가 죽은 것뿐일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리 말하니 딸은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고.
얼마 안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썩은 내가 난 장소 바로 옆이 엄청 값비싼 버섯의 군락지여서, 일부러 의심을 덮었던 것 같다는 얘기가 [성검의 주인]에 나와 있었지? 스토리의 핵심 줄기가 아니라 곁가지에 불과해서 까먹고 있었네···.'
그리고 이 보고서에도 버섯 군락지 얘기가 나왔다.
산에 오른 아버지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딸은 교단에 이 얘기를 제보했고.
그 제보를 받은 성기사들이 나서서 산을 뒤졌다는 모양이다.
아무튼 발견한 시체의 가방에서 버섯이 나왔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같은 버섯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고 보고서에 쓰여있었다.
'원래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성검 일행이 딸의 부탁을 받고 도와줬던 건데, 지금 시간대에서는 교단이 나섰나 보네.'
달라진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성기사들은 시체와 버섯 군락지 외에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지만, 성검 일행은 그곳에서 법숭이의 실험실을 발견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푸로르의 뛰어난 후각 덕분이다.
성기사들은 제보자 아버지의 시신이 부패하며 생긴 냄새 때문에, 다른 곳에서 나는 썩은 내를 맡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몇 번 더 그곳을 방문했으나 썩은 내도 느껴지지 않고, 번번이 허탕만 쳤을 뿐이었다고 한다.
'시체를 발견했던 그날, 바로 냄새를 쫓아서 법숭이를 찾아냈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게 어디 담당 성기사의 잘못이겠는가.
아무리 신성력으로 후각을 강화한들 개의 후각은 못 따라간다. 후각 관련 세포의 양과 크기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니까.
'성기사들이 시체를 가지고 돌아가자마자, 법숭이는 열심히 흔적을 지웠겠지.'
그러니 그 이후에 다시 방문해 봤자 허탕만 치는 게 당연하다.
거기에 더해 악숭이가 굴러들어온 시체를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 제보자 아버지의 시신은 상태가 온전했다.
그런 이유로 교단 측은 이 사건을 단순 사고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물론 제보자의 아버지가 진짜로 실족사를 한 건 아니다.
'버섯을 한 번에 왕창 따가면 시세가 떨어지니까 적당히 따고, 또 뭔가 없을까 주변을 기웃거리고 뒤적인 끝에 발견해서는 안 될 것을 발견한 거겠지.'
아무튼 그렇게 다 끝난 사건이 왜 서류화되어 내 손에 들려있느냐.
그 이유는 간단하다. 추가 피해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버섯 얘기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또다시 실족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서 마지막 줄에 적혀있었다.
"이거, 사고가 아니라 흑마법사가 한 짓이겠지?"
꾸준히 2회차의 기억을 보아온 휴마누스가 확신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한편. 휴마누스가 이 일을 법숭이의 짓이라 단정 지은 이유를 변명했다.
"그러고 보니 성검의 주인도 따지고 보면 신의 선택을 받은 신의 사자였죠? 계시를 받은 겁니까?"
"으, 응?"
"이 서류 내용을 읽자마자, 빡 하고 느낌이 온 거죠? 다 알아요. 제가 방금 그랬으니까!"
"어어···."
휴마누스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으나, 서류 분류 작업에 동원된 성직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뱉은 까닭에 바로 묻혀버렸다.
변명이 제대로 먹혔다는 증거다.
사고 다발 지역으로 소문이 났으니.
목숨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발길을 삼갈 듯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산에서 난다긴다하는 약초꾼들이 '거기가 그렇게 위험하단 말이야? 돈이 아무리 귀해도 목숨만큼은 아니지.'라고 생각할까?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이 다 발을 헛디뎌 죽어나갈지라도, 자신만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 게 사람이니까.
특히나 자신의 전공 분야라면 더 자신감이 넘치겠지.
전공 분야인 만큼. 산에 오른 베테랑 약초꾼들은 뛰어난 눈썰미로, 법숭이가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을 발견하겠지.
앞서 죽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피해자가 더 늘어날 거다.
그리고 언젠가 흑마법사가 연구를 완성하는 날도 올 테다.
놈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줬지 이로움을 주는 연구는 절대 아니겠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양쪽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며 텔레파시를 받는 시늉을 했다.
"이건···. 아! 느낌이 오네요. 시신을 기준으로 버섯 군락지 쪽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 지하. 땅속입니다! 그곳에 법숭이의 연구실이 있어요!"
"오오! 시온 님께서 계시를 받는 모습을 이렇게 직접 목도하는 날이 오다니!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교황이 감격에 겨워하며 기도하듯이 양손을 꽉 맞잡았다.
화려한 이펙트 하나 없는 심심한 쇼에 저리도 감동해주니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나는 슬그머니 관자놀이에 붙였던 손가락을 떼고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사람들이 계속 주변을 기웃거리고 성기사들이 자주 왔다 갔다 했으면, 섣불리 연구실을 옮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잘 조사해 보라고 전해주세요. 눈썰미 좋은 약초꾼을 한 명 대동해도 좋고요. "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교황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하는데 부담스러워 죽겠다.
이 서류를 처음 발견한 건 휴마누스이건만. 할 수만 있다면 이 부담감을 휴마누스와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렇게 내가 불가능한 일을 꿈꾸고 있을 때.
"아! 갑자기 말을 바꿔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또 계시가 내려올지도 모르니, 서류 분류 작업을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교황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부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