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9화 (779/925)

779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7)

비록 조기 퇴근의 꿈이 날아가 버렸으나 휴마누스를 원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칭찬해 주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너무 눈치 없는 타이밍에 서류를 가져온지라 칭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휴마누스는 내 쓰다듬을 원치 않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가만히 앉아서 서류를 뒤적거리는 것으로 악숭이들을 잡아내고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시온 님!"

"하지만 한 가지, 알아 두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내 말을 더 잘 새겨듣겠다는 듯, 교황이 상체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였다.

경청해 주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그 행동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저와 휴마누스가 읽고 지나친 보고서라고, 악숭 세력과 관련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뭐냐. 제가 서류를 한 장 읽을 때마다 신께서 일일이 계시를 내리실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힘을 막 남발하면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두 분께서 보고 지나친 사건도 조사에서 배제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일을 시작하죠"

나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돌아가서 쉬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까 기분이 살짝 저조해졌다.

이런 내 기분을 눈치챈 걸까?

세르펜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틴 케이스를 꺼내어, 그 안에 든 르뱅 쿠키 하나를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단 것을 먹고 기운 내라는 뜻이다.

'윈스톤이 양보한 에클레어를 나에게 주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까, 예전에 내가 내킬 때 먹으라고 준 쿠키를 양보한 거려나?'

우리 애는 배려심도 참 좋다.

나는 쿠키를 입에 물고 녀석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사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이곳에 모인 성직자 대부분이 천사 설정을 모를 것 같아서 적당히 타협한 결과다.

세르펜스의 재롱도 보고 쿠키를 먹어 당도 차오르자 의욕이 돌아왔다.

열심히 서류를 읽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하고, 또다시 서류의 산에 파묻혔다.

그렇게나 열심히 서류에 매달렸건만. 저녁이 되도록 쓸만한 정보는 건지지 못했다.

[성검의 주인] 시기에 있었던 사건도 휴마누스가 발견했던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아직 남은 서류가 산더미다. 계속 읽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저희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빈방도 많으니, 주무시고 가셔도 되는데···."

"집이 바로 코 앞인데 뭐하러요."

"그럼 적어도 저녁 식사만이라도···."

"아까 점심때 보니까 엄청 신경 쓴 티가 나던데, 저녁까지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죠. 그냥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

교황이 나를 더 붙들어두려고 안달을 냈지만, 공작저에 가서 쉬겠다는 내 굳건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나는 아쉬워하는 교황의 표정을 외면하며 일행들과 함께 대회의실을 나왔다.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마리안느 이단 심문관이 따라나오며 안내를 자처했다.

그런 마리안느의 뒤편으로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교황의 모습이 보였다. 못 본 척하자.

"괜찮습니다, 저희끼리 돌아갈 수 있어요."

"에일리히 님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입구까지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내 허락을 받은 마리안느가 나와 일행들을 지나쳐 앞장서 걸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마리안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을 때. 지나가며 툭 던지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저도 은퇴할 예정이라고 그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예?"

느닷없는 은퇴 선언에 나는 깜짝 놀라며 마리안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신성력 보유자들은 대개 동안인 까닭에 정확한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기준점이 있다면 얼추 파악할 수 있다.

외면만 봤을 때 에일리히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니 실제로도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는 건 아직 은퇴할 시기는 아니라는 건데···.

'혹시 에일리히 님의 은퇴 이후, 이단 심문관들 사이에서 조기 은퇴 붐이라도 일어난 건가?'

정말로 그런 거라면 교단의 미래가 살짝 걱정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 속에서 걱정을 읽은 것인지, 마르안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단 심문관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은 아직 혼란하니, 성검이 다시 신 룩스메아 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난 후.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만둘 생각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 얘기를 왜 에일리히 님께 전해달라는 겁니까?"

"제가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저와 에일리히 님이 교단에 귀의하며 잠정 소멸하였던 가문 간의 약속이 부활할 테니까요. 에일리히 님께서 미리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리안느가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어느 가문의 여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한 쪽은 프라시더스 공작가가 확실하다.

나는 프라시더스 가의 가주를 쳐다보며 그 약속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눈으로 물었다.

세르펜스는 생각에 잠겨 기억을 더듬어보는 듯하더니 이내 약속의 정체를 떠올려냈다.

"그러고 보니···.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백부님께서는 교단에 들어가시기 전에 약혼한 상태셨다. 다른 것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읽은 내용인지라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방의 이름이 저 이단 심문관님과 동일했던 것 같다."

"그럼 가문 간의 약속이라는 게···?"

"약혼. 혹은 결혼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쉽게 말하자면, 마리안느 님은 에일리히 님께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하신 거네?"

"아마도 그렇겠지."

세르펜스 이 자식은 이런 어마어마한 얘기를 어떻게 저리도 태연히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기겁하며 사실 확인을 위해 마리안느를 쳐다봤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에일리히와 약혼했던 사이인 것도 맞고, 결혼을 목적으로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도 맞는다는 뜻이다.

한때 소가주였으니 에일리히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내가 걸음도 멈추고 멍하게 있는 사이.

유지스가 신나게 귀를 파닥거리며 마리안느에게 말을 붙였다.

"그렇다는 건 마리안느 님께서는 에일리히 님을 따라서 교단에 들어가신 건가요?"

"네, 그렇답니다."

"마리안느 님은 로맨티시스트로군요!"

"그렇다기보다는···. 전 약혼자가 '그 얼굴'이었던지라. 다른 얼굴은 영 성에 차지 않아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바에야, 신의 뜻에 따르며 대륙을 위해 봉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에일리히의 미모가 너무 끝내준 탓에 누구를 봐도 해산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남은 인생을 해산물과 같은 침대에서 보낼 자신이 없어서 교단에 귀의했다는 소리다.

이해 못 할 얘기는 아니다.

50대가 된 지금도 에일리히는 찬란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으니. 세르펜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젊었을 땐 지금보다 더욱 빛이 났겠지.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도 에일리히 님과 닮았을 것 같기는 한데···.'

형과 파혼 후 그 동생과 결혼하는 건 뒤에서 여러 말이 오갈 테니 관뒀나 보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싸한 느낌을 받아서 꺼려졌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혼자를 교단으로 쫓아낸 것처럼 느껴져서 내키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마리안느에게 물어보면 바로 궁금증이 해결될 터이나, 세르펜스 앞에서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 그래도 이단 심문관이 되신 건, 에일리히 님과 함께 일하고 싶어서 내린 선택이시죠?"

유지스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간절한 표정으로 마리안느에게 질문했다.

아직 로맨스를 버리지 못했나 보다.

"이단 심문관은 선택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적성에 맞아서 전대 플레일 이단 심문관에게 후계자로 발탁되었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로맨스와 관련 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유지스의 귀가 축 처졌다. 적잖이 실망했나 보다.

"그럼 왜 이제 와서 은퇴를 하면서까지 결혼하시려는 건가요?"

"모처럼 그 얼굴을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는데, 두 번 다시 놓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 엄청난 얼빠다.

어떻게든 에일리히와의 결혼을 추진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은퇴하겠다는 얘기를 미리 고지한 것도, 그때까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는 통보가 아니었을까?

'아니, 잠깐만.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결혼하자고 말하는 건 완전 사망 플래그잖아!'

심지어 마리안느는 악숭이 처단에 앞장서는 이단 심문관이다. 게다가 지금은 교황의 호위를 맡은 듯하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온갖 불길한 요소가 똘똘 뭉쳐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며 마리안느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마리안느 님, 조심하세요.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호, 혹시 제가 죽을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계시를 받으신 겁니까?"

"계시를 받은 건 아니지만, 그냥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아서요."

"그렇···군요. 경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수련에 정진하여 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리안느도 나를 따라서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겨 대신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에일리히 님이 과연 결혼하려고 하실까? 전대 공작이 죽었을 때조차 자신이 가문에 돌아가면 세르펜스의 입지가 위태로워질까 봐,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켰던 사람인데 과연 이제 와서?'

공작저로 돌아가 에일리히의 의중을 묻기에 앞서.

나는 세르펜스의 생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세르펜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에일리히 님의 결혼에 대해."

"···만약 아이가 생기면, 지금보다 나를 덜 아껴 주실까?"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불안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래도 한 가문의 수장이니 정치적인 것을 먼저 고려할 줄 알았건만.

삼촌의 애정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후계자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하늘이 두 쪽 나도 세르펜스는 에일리히 님의 사랑스러운 조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그럼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으음···. 그렇군."

세르펜스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들어도 여전히 심란한가 보다.

아직 에일리히의 얘기도 듣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일찍 고민거리를 떠안겨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자신이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는가?"

"아차! 존대가 너무 입에 익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적응하려면 앞으로 대화를 더 많이 나눠야겠군."

평소에 대화하던 만큼만 해도 금방 적응할 것 같은데, 세르펜스는 굳이 대화 시간을 늘리길 바랐다.

그냥 나와 더 많이 놀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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