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9)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표현이었지만, 얼굴을 뜯어 먹는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리안느 님의 의향도···."
드디어 에일리히와의 의사소통에 성공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에일리히의 표정이 난감함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마리안느 님이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든다, 안 든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혼인에 관한 생각을 버린 지가 30년도 넘어가는데 이제 와서···.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깨버린 약혼인지라, 그걸 또다시 파기하는 건 마리안느 님께 너무 죄송스러워서···."
혼란에 빠진 에일리히가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때로부터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전 약혼녀가 조카와 조카 친구들을 통해 구혼을 선언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죄송스럽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예전에 한 약혼은 어차피 남들이 맺어준 정략혼에 불과했고, 이번에는 그냥 마리안느 님이 혼자 좋아해서 청혼한 셈인데."
"마리안느 님의 마음을 열성적으로 대변하시길래, 시온 님께서는 제 결혼을 찬성하시는 쪽인 줄 알았는데···."
"엥? 아닙니다. 얘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면 안 되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저는 에일리히 님의 선택을 존중해요."
"그런···겁니까?"
"네, 그런 겁니다. 그리고 제가 어느 쪽을 지지하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에일리히 님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아! 참고로 그 '누구'에는 이 녀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세르펜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레 찔린 녀석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리더니, 스테이크를 써는 것에 집중하는 척 딴청을 부렸다.
노력은 가상했으나 티가 너무 났다.
에일리히의 시선이 잠시 세르펜스에게 머물렀다.
그가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마리안느 님께서 은퇴하시는 건 대륙이 평화로워져서 성검이 반환된 이후래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서둘러서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답변은 드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고민은 해 보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짧은 머뭇거림 끝에 에일리히는 고민해 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마리안느가 영 싫은 건 아니었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일리히가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리길 바랄 뿐이다.
현재 50대라고는 해도 에일리히는 제법 강한 신성력을 지녔으니 100살은 너끈히 넘길 터.
앞으로 최소 50년 이상은 더 살 텐데, 그때까지 조카에게 매여 살 수는 없으니까.
"참! 오늘 아침의 연극 말인데요, 아직 소문 안 퍼졌겠죠?"
"지금쯤이면 수도에서 머무는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소문에 살이 붙고 널리 퍼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대화 주제가 바뀌자 에일리히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되도록이면 살은 붙지 않고 연극 내용만 널리 퍼졌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조금 힘들겠지.
내심 공작저 내부의 반응도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식사를 이어나갔다.
도란도란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는 정다운 식사시간이었다.
"저, 세르펜스 님. 아니마가 제 방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데, 5층에 데려가도 될까요?"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에드나가 조심스럽게 세르펜스에게 부탁했다.
아니마는 그런 에드나의 팔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꼭 붙은 채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표정에 넘어갈 세르펜스가 아니었으나, 보호자와 24시간 붙어있고 싶은 마음을 잘 아는 까닭일까?
"네, 괜찮습니다. 그저 에드나 씨의 방에 머무르는 것뿐이라면, 주무시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통 크게도 세르펜스는 아니마가 5층의 에드나 방에서 자고 가는 것까지 허락해 주었다.
그러자 아니마는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꾸벅 숙인 후, '꺅!' 하고 환호성을 내며 방방 뛰었다.
순수하게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없잖아 있겠지만, 에드나 앞에서 귀여워 보이고 싶다는 의도가 한 스푼가량 더해진 반응일 테다.
우리는 다 함께 식사실을 나온 뒤 두 개의 조로 갈라졌다.
5층으로 향하는 쪽과 본관을 나가는 쪽.
그중 알타르는 성검 일행과 마찬가지로 본관을 나가는 쪽이었지만, 자러 가는 건 아니고 밤새 경비를 돌며 저택 주변을 지킬 예정이라고 한다.
잠은 에일리히가 낮에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동안 응접실에서 잤다나?
'밀착 호위를 핑계로 공작저에서 매일 놀고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진짜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내가 세르펜스의 입에 디저트가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는 둥, 이상한 얘기를 교단에 흘린 건 괘씸했으나 그냥 봐 주기로 했다.
덕분에 대신전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간식거리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도 있었으니까.
"그럼 두 사람 다 잘 자고, 내일 보자!"
휴마누스가 리에나와 푸로르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이 행동의 의미는 명확하다.
"휴마누스. 미리 허락도 받지 않은 주제에, 뭘 자연스럽게 5층으로 올라오려는 겁니까?"
"응? 그렇지만 오늘은 셋이서 같이 자는 날이잖아."
대체 왜 자신이 혼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휴마누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이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는 날이었나 보다.
나와 세르펜스, 휴마누스.
우리 셋이서 같이 잔다는 얘기에 에일리히의 얼굴에 잠시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냥 친구끼리 늦게까지 놀다가 자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우리 셋을 바라보는 눈빛에 온화함과 흐뭇함이 어렸다.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겠지.'
알타르와 리에나, 푸로르는 건물 밖으로 나가고자 등을 돌렸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인원은 다 같이 우르르 몰려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층계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두 사람. 그리고 기둥 뒤로 삐져나온 검은색 집사복의 주인인 제온까지 포함하면, 총 세 명을 발견했다.
"메리랑 잭, 두 사람 친했어요? 그보다 집사님은 저기서 뭐 하고 계시는 거래요?"
"저희 둘이 친한 게 아니라 저희가 보좌관님이랑 친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그냥 보좌관님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집사님은···."
"지, 집사님들은 원래 이상한 곳에 숨어계시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시잖습니까? 전 집사님이신 한스 님도 그랬으니, 그 계보를 잇는 것이 아닐까요?"
내 물음에 메리와 잭이 허둥지둥하며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이들이 집사에 관하여 어긋난 직업적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운 것과 별개로 몹시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제게 할 얘기라도 있어요?"
"그냥 잡담일 뿐이니까, 바쁜 일이 있으시다면 일부러 시간 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네, 그냥 나중에 시간 날 때 얘기해도 됩니다."
나는 메리와 잭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그저 잡담이나 나눌 목적이었다면 기둥 뒤에 제온을 숨겨두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분명 세르펜스를 비롯하여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저는 이분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올라갈 테니까, 다들 먼저 올라가서 쉬고 계세요."
"알겠습, 으음···. 알았다, 그리하지."
세르펜스가 존댓말로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칫한 후, 다시 반말로 대답하고는 일행들과 에일리히를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웬일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본인 집이니까 마음을 놓는 거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니,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는 메리와 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 세르펜스가 반말을 쓴 것 때문에 놀랐나 보다.
"오늘부터 사석에서는 서로 반말하며 지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세르펜스는 평생 함께하길 약속한 절친, 짱친, 쏠메, 베프니까!"
"···잘 모르겠는 단어가 잔뜩이지만, 아무튼 친하시다는 거죠?"
"예압! 정확합니다!"
당당하게 가슴을 활짝 펴고 대답하는 나를 향해 메리와 잭이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에게 반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을 존중해주는 사람에게 막 대해지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려나?
궁금하긴 했으나 그다지 알고 싶진 않은 데다가, 그것을 물으면 반말을 쟁취한 나도 그런 취향으로 오인받을 것 같다.
그냥 모르는 척하자.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다른 분들은 다 갔으니 편히 얘기해 보세요."
"오늘 아침에 집사님이랑 저택 앞에서 다투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보좌관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합니다. 저희도 공작님께서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하지만···, 집사님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실종되셨을 때, 공작님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메리가 먼저 운을 띄웠고, 잭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이어받았다.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자 했는지 알 것 같다.
'나와 제온을 화해시켜주려는 거구나?'
애초에 싸운 적이 없으니 화해할 것도 없었지만.
하지만 이들에게 오늘 아침 정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연극이었다는 건 알릴 수 없다.
공작저 사람들을 믿긴 해도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보안을 지키기 힘들어지니까.
그래서 제온도 이들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 거겠지.
우리 둘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 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이들이 속을 정도로 우리의 무대가 완벽했구나 싶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특별히 막이 내린 이후 이야기를 연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저라고 가족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집사님의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세르펜스는 이미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잖아요. 거기에 제 짐까지 얹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와의 친분을 앞세워 세르펜스에게 이것저것 부탁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정도면 세르펜스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얼굴 볼 낯이 없다는 뜻이 잘 전달되었으려나?
"소식 들었어요! 별로 친하게 지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면서요?"
"정말 지긋지긋하고, 공작님께 죄송스런 마음이 들 만도 합니다. 그게 보좌관님 잘못은 아니고, 그 사람들이 나쁜 거지만요!"
메리와 잭이 나를 공감해 주려 애쓰며 한 마디씩 얹었다.
공작저를 오래 떠나 있기도 했고, 세르펜스와 내내 붙어있느라 예전처럼 잡담을 나누며 친분을 다지지도 못했으니.
조금쯤은 관계가 소원해졌을 줄 알았건만.
내가 이곳에 와서 쌓은 친분이 헛된 것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집사님은 얼마 전에 가족이 위험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가···.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런 일을 벌이신 게 아닐까 합니다."
"네, 집사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시대요. 좀 더 보좌관님과 얘기를 잘해볼걸, 하다못해 저택 안에서 공작님께 따로 부탁할걸 하고요. 그래서 집사님이 보좌관님께 사과하고 싶으시대요!"
그럴 리가 있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전부 연극이었는데.
이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는 기둥 뒤로 보이는 제온의 옷자락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사과를 왜 저한테 합니까? 세르펜스에게 해야지."
"공작님이라면 무조건 괜찮다고 하실 게 뻔하고, 그러면 공작님께 용서를 강요한 것처럼 되어버리니 보좌관님이 또 화내실 것 같아서. 일단 보좌관님과 먼저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메리가 제온이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했다.
어떻게든 세르펜스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제온의 의지가 느껴졌다.
"뭐···. 확실히 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세르펜스에게 가서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냈으면, 괘씸하게 여겨졌을 것 같긴 하네요. 자기 부하들을 앞장세워서 이런 얘기를 전하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희가 먼저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보좌관님께서 그렇게 화내시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병사님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래서 집사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시면 무시하거나 거절하실까 봐 걱정되어서···."
이번에는 잭이 제온을 변호했다.
내가 한탄을 하면 나를 옹호해 주고, 불만을 터트리면 제온을 두둔해 주는 전략인가 보다.
앞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 패턴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 정도 맞춰줬으면 슬슬 마무리 지어도 되겠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속으로 5초를 센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집사님···. 아니, 제온이랑은 알아서 얘기를 잘 나눠보겠습니다. 그리고 막내랑 어머니를 공작저로 모시는 건 이제 무를 수 없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신경 써 주세요. 듣자 하니 어머니께서는 많이 예민해진 상태라 하고, 막내는 워낙 소심한 성격인지라 손이 꽤 많이 갈 겁니다."
"네? 소심···이요? 보좌관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셨을 때, 막냇동생분께서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였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분명 그때가 겨우 생후 2개월인가? 그 정도였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메리와 잭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행여나 반쯤 협박에 가까운 방식으로 공작저에 얹혀살게 된, 리벨론 모자를 고깝게 여기는 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앞서 미리 약을 쳐 놓는다는 게 그만 실수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