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20)
"원래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때부터 얌전한 게 소심하다는 티가 팍팍 났는데, 지금은 살해 위협까지 받았잖습니까? 보통 아이라면 없던 겁도 생길만한 대사건을 겪었으니, 더 소심해지고 잔뜩 움츠러든 상태겠죠!"
"아···."
"그, 그것도 그렇네요."
내 뛰어난 순발력은 늦지 않게 적절한 핑곗거리를 찾아냈고, 잭과 메리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나는 졸지에 '겁에 질려 움츠러든 막내보다 직장 상사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연극 대본을 짰을 때부터 각오하던 바다.
'그래도 공작저 사람들은 다들 세르펜스의 광팬이라서 그런가, 내가 가족의 안전보다 세르펜스를 우선하여 챙겼는데도 실망하는 것 같지는 않네? 반대로 제온을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우리 둘의 입장을 다 이해해 준 것이리라.
물론 메리와 잭, 이 두 사람이 모든 공작저 식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건 아닐 터.
하지만 나와 제온을 화해시키겠다며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나와 제일 친한 두 사람이 뽑혀서 이렇게 나서게 된 걸 테니까.
적어도 공작저 내에서, 이번 일로 나와 제온에게 실망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고맙습니다. 악숭이들에 관한 단서만 찾으면 또 떠나야 하는데, 그때까지 화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거든요. 쟤한테도 제 변호를 해 준 거죠?"
"집사님께는 저희가 아니라 시종장님과 시녀장님께서 얘기하셨습니다."
내가 제온이 있는 장소를 턱짓하며 묻자, 잭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와 제온을 화해시키려 애썼다는 게 확실히 증명되었다.
메리와 잭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뒤, 나는 제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자, 공작님께 사과하러."
"···으, 응."
제온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당연히 해야 한다. 훈훈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제온을 바라보는 메리와 잭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제온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층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세르펜스 외 기타 등등과 마주쳤다.
'전부 엿듣고 있었구나?'
주모자가 누군지는 구태여 물어볼 것도 없다.
보나 마나 세르펜스겠지. 나머지는 그냥 녀석이 걸음을 멈추니 덩달아 잠복하게 된 걸 테고.
어쩐지 순순히 물러나는 게 수상쩍더라니, 이 녀석이 그럼 그렇지.
세르펜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온의 손을 붙잡은 내 손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나는 보란 듯이 제온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약골 제온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어림도 없다. 끙끙거리며 몇 번 시도하다가 안 되자 이내 포기했다.
"일단 방에 가서 얘기합시다."
오늘 연극은 끝났다.
더 이상 연기하는 것도 피곤하고, 굳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잘못 없는 제온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는 없다.
대충 5층 복도에서 10분 정도 있다가 내려가라고 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제온을 잡아끌고 계단을 오르니, 유지스가 뒤따라오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시온. 전에 막내와 싸워서 졌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싸운 게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머리끄덩이를 쥐어 뜯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요?"
"시온이 살던 곳에서는 소심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남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나요?"
"······."
순간 비꼬는 건가 의심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고 유지스를 돌아봤다.
몇백 살이나 살아온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지스의 눈동자는 순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순전히 호기심으로 물어본 거라는 뜻이다.
"그땐 비비가 좀 놀라서 잠시 회까닥한 것뿐입니다. 평상시에는 진짜 소심해요. 그치, 제온?"
"네, 비비는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소심합니다. 비비에 비하면 보좌관님은 무척이나 활발한 편에 속하죠."
내가 제온을 돌아보며 묻자, 제온은 동의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술 더 떠서 비비의 소심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게서 '리벨론 가문 제일의 소심이' 타이틀을 떼어버리고 싶었나 보다.
원래 그 타이틀의 주인은 비비였으니 돌려주어도 괜찮겠다 싶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온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건 그렇고, 이 손은 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돼?"
"안 그래도 이제 놓을 생각이었어. 그럼 우리는 방에 들어갈 테니까, 너는 여기서 한 10분 정도 시간 때우다가 내려가."
5층에 도착하여 손을 놓아주자마자 제온이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특별히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질 수 없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손을 닦아냈다.
이런 우리 둘을 보며 세르펜스가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리벨론 백작령에 기사들을 내려보내겠습니다. 그분들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 또한 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으니, 악마 숭배자들이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작 손바닥 좀 닦아냈다고, 언제 질투를 했느냐는 듯 선심 쓰는 녀석의 행동에 기가 찰 따름이다.
하지만 제온은 세르펜스의 태도 같은 건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리벨론 백작 부인과 비비가 더욱 안전해졌다는 게 마냥 기쁜 모양이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세르펜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제온은 우리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굽힌 허리를 세우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제온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눈치는 없지만, 감각은 뛰어난 휴마눈새 또한 별말 없이 조용히 방에 따라 들어왔다.
그도 복도에 깔아둔 카펫을 적시는 눈물 자국을 본 걸 테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겠지. 이제야 좀 안심이 되나 보네.'
나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그 너머 복도에서 울고 있을 제온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르펜스랑 다르게 누가 옆에 있으면 마음껏 울지 못할 것 같은 타입으로 보이니까, 그냥 혼자 울게 내버려 두는 게 낫겠지.
"아차! 그러고 보니 씻어야 하는데 얼떨결에 세르펜스의 방에 들어와 버렸잖아?"
"뭐 어때, 돌아가면서 씻으면 되지."
내 혼잣말에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방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앗 하는 사이에 어이없이 첫 번째 순서를 빼앗겨버렸다.
어쩐지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베개 싸움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솜이 가득 든 폭신한 베개라 할지언정,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휘두르면 살상 무기와 다름이 없다.
베개에 맞아 죽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절대 싫다.
"세르펜스, 휴마누스가 멋대로 욕실에 들어가 버렸는데 괜찮아?"
"나는 선우 다음에 씻겠다."
방 주인 세르펜스가 식당에서 가져온 유니어를 들었다 놨다 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휴마누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아침에 해가 떴을 때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많이 받게 하려면, 유니어를 어디에 둬야 하나 고민 중인가 보다.
'어차피 내일 일어나서 밥 먹으러 갈 때 가지고 내려갈 거면서···.'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 뒹굴 거리며, 세르펜스가 애착을 가질만한.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언젠가는 스스로 그것을 손에서 놓을 수 있는 선물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선우도 내 얼굴을 뜯어먹고 사는가?"
마침내 완벽한 배치를 찾아냈는지 세르펜스가 유니어를 창가에 두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힐끔 곁눈질로 시선을 보내니, 녀석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꽃받침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마가 에드나 앞에서 잔망 떠는 걸 보고 배운 모양이다.
"세르펜스의 잘난 얼굴 덕분에 매일매일 눈 호강을 하고 있긴 하지."
"그렇다면 혹시···, 선우가 나를 아껴주는 건 내 얼굴 때문인가?"
세르펜스가 기쁨과 불안이 복잡하게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질문했다.
요즘 부쩍 물이 오른 얼굴에 대한 자신감과 바닥을 기는 자존감이 만들어 낸, 환장의 콜라보다.
"얼굴이랑은 상관없어. 세르펜스가 어떻게 생겼든, 나는 세르펜스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지금처럼 애지중지 돌봐줬을 거야."
"정말인가?"
"물론이지! 어, 그래도 지금 얼굴이 아니라면 화났을 때 조금 늦게 풀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려나?"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좀 그렇긴 했으나 당당해지기로 했다.
처연한 미인이 작정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가련한 모습을 보이는데, 과연 누가 화를 낼 수 있을까.
어지간한 사람들은 녀석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사과만 제대로 한다면 전부 용서해줄 수밖에 없을 거다.
녀석의 얼굴은 그런 효과를 지녔다.
"그 말인즉, 지금 내 얼굴에는 선우의 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뜻인가? 알겠다. 그럼 앞으로 열심히 외모를 가꾸겠다."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우선 아니야?"
"아···."
"아? 지금 '아'라고 했겠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세르펜스에게 달려들어 오랜만에 간지럼 공격을 퍼부었다.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세르펜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녀석을 혼내줄 겸 같이 놀아주고 있자니, 얌체처럼 첫 순서로 씻으러 들어갔던 휴마누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너희끼리만 놀지 말고, 나도 같이 끼워줘!"
"두 분이서 놀고 계세요. 전 씻을 거니까."
"어, 엉?"
어리둥절해하는 휴마누스를 지나쳐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직전. 간지럼 태워도 되냐는 휴마누스의 목소리와, 그것을 거절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언뜻 들려온 것도 같다.
무시하고 씻는 것에나 집중하자.
"재밌게 놀고 있었어요?"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복귀하며 물어보니, 세르펜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별로 재미가 없었나 보다.
"같이 놀자며 기세 좋게 외친 주제에, 휴마누스는 대체 뭘 한 겁니까?"
"그냥 얘기했는데···?"
"무슨 얘기요?"
"내가 꿈을 통해서 본 이전 회차의 사건들에 관해서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길래. 내일 대신전에서 서류를 보면서 자기도 주의 깊게 살펴보겠대."
휴마누스의 얘기에 나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찼다.
고작 노는 것을 못해서 일 얘기나 하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도 모르는 휴마누스가 한심한 것과는 별개로, 나도 그가 본 이전 회차의 사건들이 궁금해졌다.
대부분 [성검의 주인]에 나온 내용일 테지만, [성검의 주인]은 2회차의 모든 내용을 담아낸 게 아니니까.
후반부에 각색이 들어갔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중간중간 생략된 게 상당히 많을 테다.
마침 휴마누스의 꿈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궁금했던 참이다.
"저한테도 얘기해 주세요."
"너한테도?"
"제가 2회차의 모든 얘기를 아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큼직큼직한 줄기만 알 뿐이지. 휴마누스가 꿈에서 본 내용 중에는 제가 모르는 사건도 꽤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작은 사건일수록, 마왕이 신경 쓰지 않아서 이번에도 똑같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죠."
"귀찮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같이 있을 때 물어보지···."
"제가 씻고 나온 후에 얘기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하면 됐는데, 그렇게 안 한 건 휴마누스면서?"
"······."
내 완벽한 논리에 휴마누스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