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22)
* * *
어제의 연극이 효과가 좋았던 것일까?
같은 시간에 마차를 타고 저택 밖으로 나왔는데 오늘은 정문 앞이 썰렁했다.
덕분에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대신전으로 향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온 님! 오늘도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신 후에 서류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교황도 어제 일을 반성하며, 대신전 입구가 아니라 대회의실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막 아침을 먹고 온 참이라 지금은 별로 허기지지 않아서, 이따 오후에 먹겠다고 답하려는 찰나.
세르펜스가 내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군침을 꼴깍 삼키는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코끝을 자극하는 과일잼 특유의 새콤달콤한 향에 완전히 홀려버린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생각하며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마침 드릴 얘기가 있었는데 먹으면서 하면 되겠네요."
"아! 혹시 리벨론 백작 부인과 레비비셴티오 님을 수도로 모시는 일 때문입니까? 그거라면 제가 다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이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주제를 꺼내며,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머리 높이가 미묘하게 낮아진 것이 신경 쓰인다.
누구처럼 허리를 숙여가며 대놓고 머리를 들이밀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의 의미는 명확했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다.
그런 상관의 행동이 부끄러운 걸까?
마리안느가 교황의 추태를 못 본 체하며 우리의 잔에 차를 따르는 데 집중했다.
그런 마리안느를 본받아, 나는 교황이 하는 말에 정신이 팔려 보디랭귀지를 눈치채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그거 말고 다른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그 얘기부터 듣겠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두 분이 수도로 올라올 때 이단 심문관이 몰래 그 뒤를 쫓는 겁니다. 악마 숭배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만약 놈들이 나타난다면 '미끼를 물었구나! 네놈들이 나타날 줄 알았지!' 하고 외치며, 이단 심문관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작전입니다. 호위를 한 게 아니라, 함정을 판 것처럼 보이도록요."
유지스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가 교황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굉장히 혼란스럽다.
이제는 하다 하다 교황까지 설정 놀음에 심취해 버렸다.
"좋···은 작전이네요."
"저는 그저 시온 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좇았을 뿐입니다."
교황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겸손한 투로 말했다.
어제의 연극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설정 놀음들을 벤치마킹했다는 뜻이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연기를 해야 할 이단 심문관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비비셴티오 님은 다시 아기가 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인이 된 자신의 몸을 신의 사자께 기꺼이 양보하셨잖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우선 비비는 내게 몸을 기꺼이 양보한 게 아니라 강제로 빼앗긴 거다.
그래서 나를 만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내 머리끄덩이를 낚아채 사정없이 흔들어 재꼈다.
또한 비비는 다시 태어난 것에 굉장히 만족하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살다가 신성력 넘치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 거니까. 그 누구라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테다.
"레비비셴티오 님은 이 대륙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한 영웅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을 알아주기는커녕, 신의 사자인 형의 덕을 보고 태어났다며 시기 어린 눈길을 보내겠죠. 그 숭고한 희생을 알고도, 제가 어찌 그분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황이 비비를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성자로 만들어 놓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착각하게 놔두기로 했다.
그런 거로 해 두는 게 교황도 즐겁고 비비에게도 좋겠지.
"아, 네. 그렇군요. 그럼 슈테판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거리며 허리를 꾸벅 숙이는 교황을 보고 있자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빨리 화제를 돌려버리자.
"그보다 서류를 같이 확인해 줄 성직자들을 불러줄래요? 제가 원래 하려던 말은 그분들도 같이 들어야 하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교황씩이나 되는 사람이니까 곁에 있는 마리안느에게 시켜도 될 텐데.
그는 직접 움직여서 문 앞을 지키고 선 성기사에게 신관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알면 알수록 유별난 양반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신관들이 올 때까지 먹으면서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오늘의 디저트를 자세히 살폈다.
쿠키 반죽을 격자 모양으로 짜서 만든 뚜껑 사이로, 루비처럼 진한 붉은색의 잼이 슬쩍 모습을 내비쳤다.
과연 세르펜스가 당장 먹고 싶어서 내 소매를 붙잡을 만한 비주얼이다.
내 의향을 알아챘는지 마리안느가 빵칼로 그것을 썰었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조각을 세르펜스의 앞 접시로 옮기며 말했다.
"린처 토르테입니다. 오늘 새벽 일찍, 제가 직접 줄을 서서 사 온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 조카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건 그냥 다른 사람 시키고 마리안느 님은 슈테판 님을 지키는 게 낫지 않아요?"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엥?"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당황하며 마리안느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룩스메아보다 에일리히의 얼굴이 좋아서 교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도 그렇지.
아직은 이단 심문관 신분인데, 교황의 안전보다 세르펜스의 간식을 택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어떻게 정리하여 질문해야, 마리안느가 이단으로 몰리지 않을까 고심하던 그때.
마리안느가 자신은 아직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악마 숭배자들의 성직자 납치 시도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이단 심문관을 제외한 모든 성직자는 항상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도록 지침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성기사들도요?"
"그 수준에 따라 최소 인원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가게 주인이 불편해하고 이목도 집중되니, 혼자 다녀오는 게 효율적이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마리안느 이단 설은 그냥 내 착각에 불과했나 보다. 참 다행이다.
나는 안도하며 상큼한 산딸기 잼이 듬뿍 들어간 린처 토르테를 맛봤다.
얼핏 보면 그냥 타르트처럼 생겼는데 쿠키처럼 바삭한 첫입 이후,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식감이 치고 올라왔다.
"이거 제법 맛있네요!"
내가 감탄을 터트리자, 세르펜스가 옆에서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녀석도 이 타르트인지 케이크인지 모를 디저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눈치다.
잼이 달아서 물릴 즈음에는 살짝 식어서 마시기 딱 좋은 온도가 된 홍차를 머금었다.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지금도 여전히 차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다.
그래서 이게 무슨 홍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묵직하면서도 적당히 씁쓸한 게 산딸기 잼과 무척 잘 어울렸다.
덕분에 배가 부른 상태인데도 신관들이 오기 전에, 린처 토르테 한 조각을 뚝딱 해치울 수 있었다.
나는 빈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지금 막 회의실에 도착한 신관들을 쭉 둘러보았다.
대부분 어제 보았던 얼굴들이다.
어제 휴마누스와 내가 즉석에서 계시를 받은 척 한바탕 쇼를 해서 그런가, 다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확인해야 할 서류가 많으니까, 곧바로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어젯밤에 계시를 받았어요."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오오오!' 하는 소리가 대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겨우 말문을 열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것 같아서 진정하라고 손짓하니, 일제히 입을 다물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째 신의 사자가 아니라 사이비 교주가 된 것 같다.
"어제 서류를 보다가 저와 휴마누스가 계시를 받았던 거 기억하시죠? 그것과 비슷한데, 양이 좀 많습니다. 그래서 까먹을까 봐 종이에 적어놨는데···. 일단 이것을 읽기 전에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어제 받아쓰기한 종이를 꺼내어 뒤집어 놓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첫째, 계시받은 내용은 어디까지나 악숭이들이 저지르는 사건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어제 말씀드렸듯이 다른 제보들을 무시하지 맙시다. 그리고 둘째, 제가 앞으로 말하는 사건 중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사건도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 주의 사항에서는 그러려니 했던 성직자들이 두 번째 주의 사항을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어나지 않을 사건'의 절반가량은 지금 이 평화를 유지하지 못했을 때,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위기에 빠지도록 놔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먹고살 만한 사람들은 악숭이들의 꾀임에 잘 넘어가지 않겠죠."
"그럼 나머지 절반은 무엇입니까?"
신관들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가, '앗!' 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무슨 독재자도 아니고.
고작 질문 하나 했다고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죠. 하지만 다 같이 질문하면 정신이 없어지니까, 발언 전에 손만 들어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방금 질문했던 신관이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뭐가 감사한 것이며, 뭐에 감동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질문에 답변을 하기에 앞서···. 지금부터 제가 얘기할 내용은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엄중한 보안을 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의 입이 너무 가벼워서 주체가 안 된다 싶으신 분은 나가주세요. 그리고 분명 입이 가벼운 사람인데 스스로 깨닫지 못한 분이 곁에 있다면, 조용히 그 사람의 옆구리를 찔러줍시다."
"앗, 아, 알았습니다! 나갈 테니까, 다들 그만 찔러요···."
그 누구보다도 나머지 절반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던 신관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울먹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쿵. 문이 닫히고 그 울림이 사그라든 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마왕은 반신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옹졸하고 비겁한 성질은 어디 가지 않죠. 놈은 그 반쪽짜리 신성으로 신 룩스메아께서 내리는 계시를 훔쳐 듣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고작 그딴 것에 신성을 낭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접어두더라도, 정말 천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죠. 하지만 대륙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치졸한···! 분명 시온 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런 능력을 얻은 걸 겁니다!"
교황이 분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냥 내 맘대로 꾸며낸 이야기인 터라, 마왕에게 도청 능력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그딴 건 모른다.
어차피 진짜로 계시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딴 거 알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놈이 내가 지닌 2회차의 정보를 견제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동의하는 척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 섞여 있다고 한 겁니다. 어차피 시도해 봐야 우리가 막을 테니, 괜히 힘을 낭비하는 대신 다른 일을 벌이려 하겠죠. 하지만 그래 봤자 급조한 계획에 불과합니다. 본래 악숭이들이 저지르려 했던 사건에 비하면, 그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가 이런 상황을 유도하긴 했지만, 성직자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신의 계시라는 거. 따지고 보면 룩스메아가 악숭 세력의 계획을 몰래 주워듣고, 이쪽에게 알려주는 것 아닌가?'
이걸 마왕이 도청해 봤자 그냥 새어나간 정보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도청조차 내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에 과거 룩스메아에게 계시를 받았던 신의 사자가 존재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일 터.
'와···, 룩스메아 개치사해.'
이래서야 마왕을 깔수록, 룩스메아도 함께 까는 게 되어버린다.
슬슬 마왕 욕은 그만 하고 받아쓰기 내용이나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