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86화 (786/925)

786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24)

* * *

"슬슬 수도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다 같이 둘러앉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세르펜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여느 때처럼 조카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를 즐기던 에일리히가 멈칫 굳어버렸다.

떠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없는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응? 아직 원하던 정보는 못 구했잖아."

"저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려 고민을 하긴 했지만···. 성검의 주인이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연방에서 머무를 때처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현시점에서 제국의 수도는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까?"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 둔 핑곗거리를 꺼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우려가 한가득 묻어났다.

"끄응, 확실히 뭔가 오해를 사기 좋겠네···."

"악마 숭배자들이 또 여론몰이를 할지도 몰라요."

감이 뛰어난 푸로르와 눈치 백단 유지스마저 녀석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두 사람의 말에 휴마누스는 팔짱을 낀 자세로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휴마누스가 입을 뗐다.

"···아직 그런 얘기가 도는 건 아니지?"

"말이 나오기 시작했을 땐 이미 늦습니다."

"너는 언제 떠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

좀 더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지, 휴마누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일행들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한 눈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에일리히는 이제 울상으로 변했다.

식탁 앞에 모여있는 인원 중, 별 반응이 없는 건 알타르 뿐이었다.

그는 에일리히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고, 입안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켰다.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라는 변명이 통하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신께서 대륙에 성검을 내려보내실 정도의 재앙이 예고된 것치고는 평화롭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휴마누스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았잖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울적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외펜스라면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느낌으로 말했을 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고 있으니,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를 정보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녀석은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날 선 반응을 보이며, 휴마누스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비난할까 두렵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래서 더 진솔하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진상을 아는 나도 순간 헷갈릴 뻔했으니 말 다했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러운데? 미리 좀 말해주지."

"죄송합니다. 저도 어젯밤까지 계속 고민했던 문제인지라···."

"바로 그게 문제야. 그런 고민을 왜 너 혼자 하는 건데?"

이제까지 휴마누스는 세르펜스가 의견을 말하면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 때문일까?

휴마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하자, 세르펜스가 겁먹은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 그게···. 죄, 죄송합니다. 일정은 저 혼자 정해도 되는 게 아닌데···."

"그것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경험이 일천한 자가 총지휘관으로서 전장에 섰을 때 승리하고 싶다면, 자신보다 전략에 밝은 참모와 경쟁하지 말고 그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아군에게 계획 일부를 숨기는 것 또한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연방에서 네가 정찰을 나가는 척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간 거야."

미움받는 게 두렵다는 듯한 세르펜스의 태도에 되려 휴마누스가 난감해하며, 구겼던 인상을 풀고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략 같은 이유가 아니라, 그냥 내가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걱정하며 전전긍긍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혼자 고민했던 거잖아? 그런 고민과 걱정은 너 혼자 짊어져야 할 게 아니야."

"으음···."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인데···. 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게 아니더라도 고민이 있다면,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우리와 상담해 줬으면 좋겠어. 도움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

세르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녀석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얘기를 꺼낸 건, 휴마누스가 아니라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니까.

'뭔가 기분이 좀···, 그러네.'

미안한 것과 별개로 휴마누스의 착각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오인할 만한 핑계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세르펜스에게 한 부탁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불시에 기습을 당해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시온, 너는 알고 있었지?"

"네?! 뭘요?"

"뭐긴. 세르펜스가 고민하고 있던 거 말이야."

"그야, 뭐···."

몰랐다고 해 봤자 어차피 안 믿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휴마누스가 있는 대로 화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세르펜스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봐주나 싶어서 따라 해 봤다.

그러나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럼 너라도 세르펜스를 설득했어야지! 쟤가 혼자서 고민하도록 내버려두면 어떡해?"

"저는 알고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닌데···."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쵸, 아니죠."

여러모로 찔리는 점이 많았던 터라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얌전히 휴마누스의 잔소리를 들으며 깨작깨작 식사를 이어나갔다.

대체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잔소리를 쏟아내고 나자 서운함이 풀렸는지, 휴마누스가 한숨을 푹 내쉰 뒤 다시 세르펜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우선 대신전에 들러 새로 들어온 제보가 있는지 확인해 본 뒤. 의심 가는 내용이 없다면, 가장 규모가 큰 실종 사건이 벌어진 지역으로 향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대신전에 들렀다가 곧바로?"

"네, 될 수 있으면···."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나를 곁눈질로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삼촌은 깜박한 것 같지만. 일부러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라 미처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겠지.

"너무 급작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겠지. 잘 다녀오려무나."

다 이해한다는 듯, 에일리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제서야 세르펜스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니 내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 네 곁에 좋은 친구가 많은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일리히가 먼저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세르펜스의 표정도 따라서 보드랍게 풀렸다.

닮은 얼굴에 비슷한 표정이지만,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에일리히 쪽이 훨씬 여유가 있고 너그러워 보인다.

특정 표정이 자꾸만 세르펜스와 겹쳐 보여서 종종 그의 나이를 잊을 때도 있지만,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다들 식사 다 하셨으면 이만 일어납시다. 별관에 머무르시는 분들은 짐 챙길 시간이 필요하죠? 에드나 씨는 아니마랑 연구실에 벌려놓은 것들을 정리하셔야 될 테고···."

나는 스튜를 반쯤 남긴 채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성검 일행과 에드나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이 눈을 깜박이며 자신에게도 할 말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세르펜스는 방에 가서 에일리히 님이랑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 겸사겸사 침대도 챙기고."

"둘이서만? 당신은?"

"나는 주방에 가서 간식거리 좀 챙겨 두려고. 윈스톤이랑 같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나를 빤히 쳐다보는 윈스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세르펜스의 어이없는 발언 때문에 그를 신경 써 줄 수 없었다.

"···당신은 나와 백부님이 걱정되지도 않는가?"

"유지스를 끼워줄게. 그럼 됐지?"

이번에는 유지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냥 보기만 한 윈스톤과 다르게 '네, 넷?!' 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세르펜스와 유사 세르펜스 사이에 끼면 행복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언제나 말해왔잖은가? 당신의 유일성에 관해. 유지스도 분명 내게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지만, 유지스는 유지스고 당신은 당신이다."

"나는 유지스를 믿어. 그러니까 세르펜스도 한 번 믿어 봐."

나는 세르펜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녀석 너머에 앉은 유지스가 자신을 믿지 말아 달라고 말한 것도 같지만, 들리지 않는 셈 치기로 했다.

"윈스톤, 방에서 챙겨야 하는 거 침대밖에 없죠? 아공간 주머니 유지스에게 넘겨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윈스톤이 곧장 유지스에게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를 건넨 뒤 따라 일어섰다.

유지스의 얼굴은 곤란함으로 물든 데 반해 윈스톤의 얼굴은 묘하게 평온했다.

자신이 세르펜스와 에일리히 사이에 끼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정말 같이 안 갈 건가?"

"자꾸 그러면 에일리히 님이 서운해하실 거야."

"나보다 백부님이 더 간절히 바라시는 것 같은데···."

"어허!"

"······."

진작 말을 들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르펜스는 내가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한 번만 더 그러면 혼내겠다.'라는 뜻을 전하고 나서야 고집을 꺾었다.

나는 녀석이 에일리히와 유지스를 양쪽에 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봐 주다가, 그들이 층계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윈스톤, 저한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유지스랑 바꿔줄까요?"

"···다시 잘 생각해 보니 고마운 것 같소."

"에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시네!"

"대체 내게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요?"

식사실과 주방은 거리가 멀지 않아서 윈스톤과 장난을 치며 걸음을 옮기자 금방 도착했다.

어젯밤 제온을 불러서 미리 적어놓은 디저트 목록을 전달해 둔 터라, 주방은 달콤한 냄새로 진동했다.

각양각색의 디저트들이 테이블 위를 꽉 채웠으나 내가 관심 있는 건 딱 하나뿐이다.

"제가 특별 주문한 그거 어떻게 됐어요?"

"위에 그려 넣은 나뭇잎 무늬 중, 잎맥의 수가 하나 적은 부분에 페브를 넣어 뒀어요."

주방 시녀 포피나가 '갈레트 데 루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뜻 보면 잘 구분되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한 부분만 잎맥의 수가 적었다.

나는 포피나를 비롯한 주방 시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아공간 주머니에 디저트들을 쓸어 담았다.

물건을 잘 챙겼으니 이제는 입막음을 할 차례다.

"윈스톤, 오늘 보고 들은 건 비밀입니다? 절대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특히 세르펜스에게!"

"알겠소."

"어···? 주군인 세르펜스가 물어보면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저번에 얘기 나왔던, 세르펜스 님의 '제2의 생신'을 챙겨주려는 것 아니오?"

"맞아요."

"그러니 비밀을 지키겠소."

자신은 세르펜스를 어린아이로 보지 않는다며 박박 우겨댈 땐 언제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동심을 지켜주는 참된 기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