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25)
* * *
"시온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회의실 앞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교황이 나를 발견하고는 격한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탓인지, 교황은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보면 송구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달라져버렸다. 교황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으며 목소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도 그렇고, 의기양양한 저 태도도 그렇고.
이 극적인 변화는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드디어 악마에 관한 정보를 구한 겁니까?"
"아직 확실하다고 판명 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은 높다고 판단한 건지, 교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까지 필요한 정보가 안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날 생각이었는데.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교황을 따라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갓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는 마리안느의 모습이 보였다.
마리안느는 마지막 잔을 채운 뒤.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공손한 자세로 오늘의 디저트를 소개했다.
"오늘은 파블로바 케이크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윈스톤의 주먹만 한 크기의 커다란 머랭 위로 신선한 생크림과 딸기, 블랙베리, 라즈베리, 블루베리 등. 다양한 베리류가 듬뿍 올라간, 화려한 디저트가 원형 테이블의 테두리를 따라 빙 둘러 놓여 있었다.
저번에 이곳에서 먹었던 린처 토르테만큼 단내가 진동하진 않았으나, 윈스톤은 망설임 없이 자신 몫의 파블로바 케이크를 세르펜스에게 넘겼다.
그동안 수많은 디저트를 보아온 경험을 토대로, '케이크 시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대 머랭이 존재한다=겁나 달다.'라는 사실을 간파해 낸 걸 테다.
"세르펜스, 윈스톤이 디저트를 양보했네?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맙습니다, 윈스톤 경."
"아니지, 아니지! 이제 유지스랑 윈스톤에게도 반말 쓰기로 했잖아. 그때로부터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이러네! 난 벌써 이렇게나 자연스레 말을 놓고 있는데, 세르펜스는 대체 언제 익숙해질 거야?"
"당신은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도 은근슬쩍 반말을 섞어 썼잖은가."
"내가 언제?"
"'뭐임마'가 존대는 아니지 않나?"
반박할 말이 없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조용히 포크를 집어들었다.
- 파삭
포크를 옆으로 세워 날 부분으로 머랭을 부순 뒤, 생크림과 엉겨붙은 베리들과 함께 입에 넣었다.
바삭하게 씹히는 듯하다가 촉촉하게 녹아드는 머랭의 단맛. 그리고 베리 특유의 상큼한 달콤함이 부드러운 생크림의 중재하에 하모니를 이뤘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세르펜스가 좋아하고 윈스톤이 질색할 맛이다.
"고맙···다. 윈스톤 경."
"어차피 저는 단것을 잘 먹지 못하니, 세르펜스 님께서 맛있게 드셔 주시면 그거로 만족합니다."
주군의 디저트 먹방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겠다는 윈스톤의 불경한 대답에, 세르펜스가 크게 감동하며 파블로바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녀석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사실 세르펜스는 불경함을 즐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세르펜스의 취향에 의혹을 품지 않고자 노력하며 교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보지는 어딥니까?"
"위치는 펠로 왕국이고, 제보를 받은 건 아닙니다."
"그럼 직접 교단이 조사해서 찾아낸 겁니까?"
"그런 셈이지요."
정보를 듣는 쪽은 나건만, 교황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내게 쓰다듬을 받겠다는 의지로 교황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 교황을 쓰다듬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만 같아서 몹시 꺼려졌다.
그럼에도 물어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너무 서글프다.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이미 알타르 님을 통해 들으셨겠지만. 레비비셴티오 님이 암살을 당할 뻔한 사고 이후, 교단은 대륙 각지에서 열리는 '살롱'의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매우 수상한 살롱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악마 놈이 살롱에서 놀고 있나 보다.
어디 지방 구석에 처박혀 음습한 뒷골목을 전전해도 부족할 판에, 대체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어떻게 수상한데요?"
"초대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항상 가면 무도회장이며, 그렇게 초대를 받아 살롱에 참석할 때 또한 가면을 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고 살롱에 초대하는 거로도 모자라, 그 이후로도 쭉 서로의 정체를 감춘다니.
사기 도박장이라면 모를까.
살롱이 열리는 주된 목적이 지식 교류를 표방한 인맥 쌓기라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수상하기는 하다.
"그곳이 악마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신 이유는요?"
"이단 심문관 중 하나가 해당 살롱에 방문했던 자의 뒤를 밟았는데, 동행했던 호위 기사와 시중을 드는 이가 빈혈 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보다는 덜하지만, 초대받은 귀족의 안색 또한 창백하게 질려있었다는 모양입니다."
"한 명의 뒤만 쫓아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시죠?"
"물론 아닙니다. 다른 날, 다른 귀족의 뒤를 밟아 봤는데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
피가 전부 뽑혀서 바짝 마른 채로 죽어있는 시체가 발견되는 식으로, 뭔가 외계인의 소행 같은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할 줄 알았는데.
단체 헌혈로 말미암은 집단 빈혈이라니?
마인 러스티가 죽어가며 빨리 놈을 찾아내야 한다고 경고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소소해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긴, 그러니까 아직 안 들켰던 거겠지.'
그나저나 사이좋게 빈혈에 시달릴 거면, 뭐하러 가면을 써서 정체를 감추는 건지 모르겠다.
귀족들은 안색이 창백해지는 수준에서 그친다고 하니, 하루 이틀 푹 쉬면 나을 정도로 살짝만 피를 뽑는 거려나?
그렇다 해도 완벽한 익명 보장은 불가능했다.
"빈혈 증상이 있는 사람을 측근으로 데리고 다니면, 그 살롱 소속이라고 의심해 봐도 무방하겠네?"
휴마누스가 딸기를 포크로 푹 찌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눈새눈새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뻔한 사실을 살롱 참석자와 악숭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번거롭게 살롱 참석자들에게 가면을 씌워놓을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귀족이 아닌 자. 그러니까 오리지널 악숭이들이 변장하고 살롱에 참석해 있을 가능성이 높네요. 어쩌면 악마도."
"그렇다면 처음부터 살롱의 주최자가 악마 숭배자였을 수도 있겠네요."
"음···."
내가 가능성을 제시하자 유지스가 새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유지스가 추리 놀이를 하니까 끼고는 싶은데, 디저트가 지나치게 맛있어서 먹는 걸 멈출 수가 없나 보다.
잘 먹는 녀석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번진다.
과연 윈스톤이 만족할 만한 디저트 먹방계의 샛별답다.
"그건 그렇고, 혹시 살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세요?"
"살롱에 관한 조사를 명했을 때 무고한 누군가가 죽는 게 아니라면,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고 일단 제게 보고한 후 대기하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교황이 '저 잘하지 않았습니까?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자라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내 물음에 답했다.
확실히 교황이 일 처리를 잘하고 있기는 하다.
내가 얘기하기도 전에 대륙 각지에서 열리는 살롱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비비와 리벨론 백작 부인을 안전하게 수도로 데려오는 방법도 제시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단 심문관이 무리하게 잠입을 시도하거나 살롱 참석자를 심문했다면, 기껏 잡은 정보를 분명 놓쳤을 거다.
교단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악숭이들이 눈치채고도 살롱을 유지할 리 없으니까.
'정말 쓰다듬어야 하는 걸까?'
사람은 보상이 없으면 능률이 떨어지는 법이다.
심지어 자신은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데, 다른 누구는 앉아서 디저트만 잘 먹어도 이쁨을 받으면 불만이 하늘을 찌르겠지.
그러다가 삐뚤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래 봬도 이 사람은 교황이니까.
그래도 어쩌면 트집 잡을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더 확인해보고 결정하자.
"그런데 살롱이 열리는 곳이 펠로 왕국이라고 했죠? 아무리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다 하더라도, 살롱에 초대를 받으려면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고 그러려면 펠로 왕국 귀족의 협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곳의 귀족 중에서도 독실한 신자분들이 있으니까요."
"도착한 후 협조를 받는 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국경을 넘는 건데···."
"국가별로 신분증을 다양하게 구비해 두었습니다. 전부 챙겨가셔서 그때그때 편의에 맞게 사용하시지요."
그거 불법 아닌가?
"각국의 왕실에 부탁하여 정식 신분증을 발급받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정보가 새나갈지도 몰라서 신분증 위조 전문가를 데려와서 만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불법이었다.
왕족인 베일에 이어, 이제는 교황까지 위조 신분증을 애용하다니.
이 세상에서 신분증 위조는 경범죄에 해당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신분증 위조는 범죄 아닙니까?"
"그 범죄자는 교단 감옥에 가둬 두었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래도 그 신분증 덕에 시온 님과 여러분의 운신이 편해진다면야 공이 없지는 않으니···. 계속 가둬 둘 생각은 없고 모든 일이 끝나면 사회봉사 명령을 내릴 생각인데, 시온 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단 뒷조사를 해 보고, 위조 신분증 제작 말고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세요."
이 문제는 이제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가짜 신분이 필요하긴 했으니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게 진짜 가장 큰 문젠데요. 척 봐도 아시겠지만, 저희 인원 구성이 워낙 눈에 띄어서 말이죠.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리 여러분들과 체형이 비슷한 이들을 여럿 고용해 두었으니, 그 또한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이 얼굴을 가린 채 아홉 명씩 짝지어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악마 숭배자들의 눈을 가려 줄 겁니다."
이건 진짜 잘했다. 잘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어떻게든 교황을 쓰다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요, 슈테판 님. 진짜로 저한테 쓰다듬을 받고 싶으세요? 저 실제 나이도 슈테판 님보다 연하인데···."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
나도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노견을 쓰다듬는다고 생각하자. 그게 낫겠어.'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고 치워버리는 게 낫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는 교황의 머리를 후다닥 두어 번 쓰다듬고 손을 거뒀다.
그때 옆에서 댕그랑 소리가 났다.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세르펜스가 포크를 떨어뜨려서 난 소리다.
"어, 어떻게 나를 옆에 두고 다른 사람을···?"
"나도 웬만하면 이러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겠어? 상으로 내 손길을 간절히 원한다는데!"
"······!"
세르펜스가 배신감에 젖어든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