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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94화 (794/925)

794회

83. 공작님과 가면 무도회 (6)

나는 반가움에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에드나로 추정되는 사람의 옷차림을 자세히 살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비슷한 컨셉을 잡고 온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검은 베일이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가, 이목이 쏠린 탓에 너무 빨리 다가가면 의심을 살 것 같기도 하고···.'

어제 본 에드나의 드레스는 광택이 도는 어두운 보라색 천 위로, 반투명한 검정 레이스를 한 겹 덮어서 레이어드 한 듯한 스타일이었다.

보라색이 슬쩍슬쩍 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검은색이 강했고, 검정 베일까지 쓴 탓에 자칫 잘못하면 상복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지만.

어깨와 쇄골을 훤히 드러내어 검은 베일이 어울리면서도 상복 느낌을 완전히 털어냈다.

방금 무도회장에 들어온 여성의 복장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나저나 벤트리온 자작 부인은 저런 드레스를 대체 왜 가지고 있었던 거지? 미망인 컨셉 가면 무도회 의상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예 새로 맞춘 거려나?'

아무튼 방금 입장한 검은 베일의 여성이 에드나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더티 블론드색의 긴 머리를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도 사전에 얘기를 들은 대로고.

에드나는 단발이니 뒷머리는 가발일 테지만, 멀리서 봐서 그런가 썩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따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봐야겠다.

본인 확인이 끝났고 관찰하며 적당히 시간도 끌었으니, 이제 슬슬 다가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검은 베일이면···. 미망인인가? 저렇게나 적극적으로 본인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필하다니···. 저런 도발적인 여자, 싫지 않아. 아니, 완전 내 스타일이야. 아직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성숙하고 화끈한 성격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

나는 옆에서 들려온 공깃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놈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제 딴에는 섹시해 보일 거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일 테지만, 그냥 음흉하고 야비한 변태 같아 보였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겁하며 한 발짝 옆으로 걸음을 옮겨 놈과 거리를 둔 것도 잠시.

나는 자발적으로 공깃밥에게 다가가 놈을 붙잡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놈이 에드나에게 다가가려 했기 때문이다.

"아, 안돼! 저 여자는 내 꺼야!"

"아는 사람이야?"

"그, 그건 아니지만···. 들어오는 순간 내가 바로 찜 했어!"

"이봐, 친구. 사랑은 행동하기 전까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혼자 마음속으로 찜 같은 거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공깃밥이 사랑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치며 소매를 붙잡은 내 손을 떼어냈다.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어 말문이 막혔다.

내가 멈칫한 사이 공깃밥은 다시 에드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것을 두고 볼 수 없던 나는 또다시 놈을 붙잡았다.

"나는 저 여자가 아니면 안 돼! 네가 양보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안 될 건 또 뭐야? 너야말로 다른 상대를 찾으라고."

"그, 그게 그러니까···. 사, 사업 자금이 필요해! 미망인이라면 재혼하면 가문의 재산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니, 전 남편의 유산을 몽땅 내게 투자해 줄 수 있잖아!!"

"너···, 진짜 상종 못 할 쓰레기구나?"

가면은 공깃밥의 얼굴을 반 이상 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떠오른 혐오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나도 내가 맡은 역할이 쓰레기인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변태에게 대놓고 쓰레기 취급을 당하니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친구에게 쓰레기라는 말은 너무 심하잖아!"

"난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어! 오늘 처음 봤는데 친구는 무슨!"

"네가 먼저 나한테 친구 하자며! 어떻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가 있어?!"

"이거 놔!!"

공깃밥은 매정하게 나를 떼어내고 빈 칵테일 잔을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성큼성큼 에드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 계획 따위는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이대로 공깃밥 따위에게 에드나를 뺏길 수는 없다.

'에드나에게 집적거리는 놈을 막지 못한다면, 아니마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도 칵테일 잔을 내려놓고 반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공깃밥을 추월했다.

공깃밥 또한 나 같은 쓰레기에게 취향의 여인을 빼앗기기 싫은지, 뛰어서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좋아, 해보자 이거지?!'

나와 공깃밥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에드나의 앞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어깨를 몇 번이나 부딪혔는지, 얼얼한 게 아무래도 멍이 든 것 같다.

"아리따운 숙녀분! 헉, 허억···. 제게,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겠, 습니까? 하악···."

"이런 변태 자식은 무시하고 저랑 춤 한 곡 땡기시죠?"

"너는 왜 호흡이···, 멀쩡···. 후욱···."

꾸준히 체력 단련을 해 온 나와 다르게, 공깃밥은 그거 조금 뛰었다고 옆구리를 감싸 쥐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운동 부족인가 보다.

"···대체 뭐죠?"

에드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베일 때문에 시선의 방향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는 내게 하는 소리가 분명하다.

대체 왜 혼자 오지 않고 공깃밥을 데려온 거냐고 따지는 걸 테다.

나라고 공깃밥과 함께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 공깃밥 때문에 귓속말을 나누기도 여의치 않으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으니까, 변수는 무시하고 대본대로 하자.'

조금 전에는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그런 가벼운 말투로 귀족 부인을 꼬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크흠,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느끼하게 말했다.

"저는 달콤한 향기에 취해 날아온···, 꿀벌···. 꽃처럼 아름다운 숙녀분의 곁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을까요?"

연기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였지만, 스스로를 꿀벌이라 지칭하는 건 역시 괴로운지라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참고로 이 대사를 비롯한 여러 작업 멘트를 준비한 건, 춤 연습을 하느라 바빴던 나와 에드나, 세르펜스, 유지스를 제외한 일행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직접 머리를 굴려서 짜낸 건 아니고.

테일러가 공수해 온 수많은 연애 소설을 읽고, 작업 멘트만 따로 뽑아내어 그것을 재구성한 거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느끼한 대사 모음집을 읽다 보니, 혹시 테일러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말하니 테일러는 몹시 억울해했다.

자신은 그저 펠로 왕국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작품들을 서점 주인에게 추천받아서 사왔을 뿐이라나?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나에게 푸로르가 슬쩍 다가와, 귓속말로 '작품의 수위가 높아서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충격이 가라앉기는커녕 두 배로 가해졌다.

'테일러는 대체 뭘 가져온 걸까···? 그리고 서점 주인은 이단 심문관에게 대체 뭘 판 거야?'

궁금하긴 했으나 직접 읽고 싶진 않았다.

순수한 세르펜스가 19금 서적을 읽지 않았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어찌하여 제가 아름답다고, 단언하시나요?"

대본대로 강행하자는 내 뜻을 알아챘는지 에드나도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읊었다.

말투는 딱딱했고 뚝뚝 끊기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예전처럼 목소리 높낮이가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지는 않았다.

어색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경계하느라 그런 거라고 포장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 연기가 어려우면 그냥 감정을 넣지 말고 대사만 읽으라는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다.

놀랍게도 그 조언을 건넨 건 윈스톤이었다.

'그러고 보면 윈스톤은 처음 연기할 때, 감정을 배제하고 무뚝뚝한 말투를 구사했었지.'

지금은 이런 추억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바로 다음 대사를 입에 올렸다.

"아무리 베일로 얼굴을 가린다 한들, 몸가짐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까지 숨길 수야 없지요. 저는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러셨군요."

에드나는 대본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헛소리는 언제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추임새를 넣는 목소리에 떨떠름함이 가득 묻어났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주변에 보는 눈만 없었으면 잘했다는 뜻으로 엄지를 척 들어 올려주고 싶다.

나는 속으로 에드나를 칭찬하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도 제 가슴을 뛰게 하시더니, 가까이에서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거짓말하지 마, 이 쓰레기 자식아! 이 숙녀분의 재산을 탐하여 접근한 거면서, 어떻게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

잠깐 잊고 있던 공깃밥이 끼어들어 내 말을 끊었다.

이제야 호흡이 돌아왔나 보다.

"그러는 그쪽은 입술에 침을 발라서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는 건가 봐?"

"연애사? 혹시 뒤에 '기'라는 글자 하나를 빠뜨리지 않았어?"

변태 공깃밥 주제에 제법 말을 갖고 놀 줄 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급해도 사업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다.

"나는 널 친구라고 생각하고 힘든 사정을 털어놓았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배신이야!"

"난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다니까? 그리고 진짜 친구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나는 숙녀분이 연애 사기를 치려는 못된 놈에게 속아 넘어가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어!"

말하는 것을 보니 공깃밥은 변태긴 해도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게 공깃밥이 에드나에게 추근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마가 무섭기도 하고, 공깃밥 따위에게 밀려 에드나와 친분을 쌓지 못한다면 다음 일정이 꼬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연인 관계가 될 수는 없어도,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춤 한 곡 정도는 땡길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 해!'

그래야 살롱에 가서도 에드나에게 작업을 거는 척 계속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다.

이건 안전과 직결된 문제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드나의 안전을 위해서다.

보나마나 세르펜스는 내 호위 기사 혹은 시종 자격으로 살롱에 따라올 테니까. 에드나가 녀석의 보호를 받으려면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나는 공깃밥을 노려보다가 분한 척 이를 악물고 고개를 휙 돌려서 에드나를 살펴보았다.

검은 베일로 얼굴 전체를 가린 터라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긴장하여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손은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재산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얘기를 많은 사람 앞에서 에드나가 들어버렸으니, 없던 일로 덮을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여느 때처럼 애드리브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에드나가 잘 따라올 수 있을지 못내 걱정스럽다.

대본에 구애받지 않게 된 에드나가 훨씬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입을 뗐다.

"그래요. 제가 사업 문제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이 가면 무도회에 초대를 받았고, 돈 많은 고위 귀족분과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놈은 연애 사기라고 했지만, 저는 돈만 먹고 그쪽을 버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사업 파트너이자, 함께 가문을 키워나갈 안주인으로서 그대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런 야망 있는 남자는 싫습니까?"

"검은 속내가 드러나니, 이제 막 나가는구나? 그딴 말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공깃밥이 비아냥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안다. 내가 한 말이 개소리란 사실을.

그러나 내가 에드나를 꼬셔야 하는 것처럼, 에드나는 나에게 꼬셔져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나, 나쁘지 않네요···! 야망 있는 사람! 나는 이런 개자식이 좋더라!"

마지막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한 개소리가 너무 개같은 나머지, 개자식이란 말을 참을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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