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01화 (801/925)

801회

83. 공작님과 가면 무도회 (13)

"리에나 님의 말대로 그 '공깃밥'이라는 자는 악마 숭배···. 아니, 악···숭···, 세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살롱에 참석한 이후에는 어찌 될지 몰라도,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러하다."

세르펜스가 과도할 정도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악숭 세력'이라는 줄임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나 그 단어를 말하는 게 어색하면 원래대로 말해도 상관없거늘.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원.

어처구니없긴 했으나 그런 녀석의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그 부분을 지적하면 굉장히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관련이 없는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없다고? 초전자랑 법숭이가 그런 얘기를 나눴나? 만약 그런 거라면 리에나가 공깃밥에 관해 보고할 필요도 없던 거 아니야?'

하다못해 휴마누스가 공깃밥을 의심했을 때라도 진작 그 얘기를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빨대로 차를 쪼옥 빨아 마시며, 눈빛으로 세르펜스에게 잠자코 있던 이유를 물었다.

"내가 엿들은 대화 내용에 따르면, 공깃밥은 악마···. 아니, 악숭 세력 소속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 리에나 님의 얘기를 자세히 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휴마누스가 끼어드는 바람에···."

세르펜스 또한 리에나에게 객관적인 보고를 듣고자 입을 다물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휴마누스가 '바람잡이'에 꽂혀버린 탓에 리에나의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선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녀석의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휴마누스에게 전달했다.

"휴마누스. 세르펜스가 그러는데요, 리에나의 보고를 듣는 데 방해되니까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래요."

"헉···!"

휴마누스가 헛숨을 집어삼키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크게 뜬 눈을 깜박거리지도 못하고 있는 거로 보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돌려서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휴마눈새가 상대인지라, 직설적으로 말한다는 게 조금 지나쳤던 모양이다.

"미, 미안. 내가 너무 눈치 없었지?"

"노력하는 과정이었는걸요, 뭘. 세르펜스도 이해해 줄 겁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그래요, 미숙한 자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매정한 이 사회 탓이겠죠."

"지금은 네가 제일 매정한 것 같아···."

부모님의 과도한 교육열에 지친 아이처럼, 휴마누스가 기운 없는 표정으로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 휴마누스를 놀리는 건 되도록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보고 들은 것을 다시 자세히 설명하면 되나요?"

"예,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르펜스의 대답에 리에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초대장을 받은 이후 공깃밥의 행동거지에 관한 얘기를 자세히 풀어놓았다.

리에나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들어봤으나 딱히 수상쩍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술이나 퍼마시며 여기저기 추근거렸다는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만 굳어질 뿐이다.

"세르펜스, 뭔가 알 것 같아?"

"으음···, 특별히 의심 가는 구석은 없군. 하지만 반대로 의심을 거둘 만한 요소 또한 없으니, 살롱에서 그자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해야 결론이 나올 것 같다."

"공깃밥은 악숭이가 아니라며? 그런데 뭐가 걸려서 그러는 거야?"

"그자의 소속."

세르펜스의 입에서 의외의 답이 튀어나왔다. '엥?'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끔 하는 말이다.

내가 느낀 인상도 그렇고, 리에나의 보고도 그렇고. 영락없이 한량 그 자체였는데.

아무래도 세르펜스가 뭘 보고 들었는지 알아야겠다. 그래야 녀석이 마음에 걸려 하는 게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리에나의 보고도 끝났으니까, 세르펜스도 자세히 얘기해 봐."

"알겠다. 그럼 우선은···. 가면 무도회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부터 얘기해야겠군."

"어···, 설마. 공깃밥도 우리처럼 가면 무도회에 몰래 잠입한 거야?"

"초전자라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하다."

초전자가 법숭이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기정사실이라 봐도 무방하다.

공깃밥은 당당하게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그렇다는 건 나와 에드나처럼 다른 사람의 초대장을 이용했다는 거겠지.

"잠깐만. 그럼 초전자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공깃밥에게 살롱 초대장을 줬다는 게 되잖아? 법숭이가 그러라고 시켰나? 아니, 아니지? 그랬으면 법숭이랑 만난 다음에 공깃밥에게 초대장을 줘야 하는데, 그 반대니까···.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 초전자가 멋대로 살롱 초대장을 건넨 뒤, 법숭이에게 사후 보고를 올렸다고?"

"내가 보고 들은 것에 의하면 선우의 말대로 초전자가 독단적으로 초대장을 건넨 듯했다."

"초전자는 그러고도 용케 법숭이에게 안 혼났네?"

"질책을 당하기야 했지. 하지만 공깃밥의 정체와 그자가 충격을 받아서 무도회장을 떠날까 봐, 바로 살롱 초대장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얘기하자 흑마···. 아! 법숭이도 가볍게 넘어가더군. 그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악숭 세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일 테지."

방금 전까지 법숭이를 흑마법사라 칭했으면서.

내가 법숭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 세르펜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단어를 정정했다.

부모의 말을 따라 하며 언어를 터득하는 아기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흐뭇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녀석을 우쭈쭈해 주기에는 공깃밥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대체 공깃밥이 어디 소속의 누구길래, 초전자가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포섭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그리고 그렇게까지 살롱에 간절히 데려가고 싶었으면, 가면 무도회 초대장을 보내주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남의 초대장을 들고 참석하게 하지?"

"선우가 공깃밥이라 명명한 자는 펠로 왕국의 8왕자, '루블리크 펠로'다. 나는 펠로 왕국의 8왕자와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초전자라는 자는 그렇게 확신하더군."

세르펜스의 말을 듣고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동안 말을 섞어본 황자나 왕자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기에, 그 한량 공깃밥이 왕족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가면 무도회 초대장은 아마도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폐기되었거나. 아니면 어차피 폐기될 것을 알아서 아예 보내지 않았거나. 그 둘 중 하나일 거다."

"공깃밥은 왕자라며? 왕자한테 온 편지를 대체 누가 폐기해?"

"가면 무도회 초대장에는 보내는 이가 적혀있지 않잖은가? 왕실에 날아든 익명의 편지는 안전 관계상 중간 관리자가 먼저 확인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폐기 처분하는 것이 기본 규칙이다."

"이 세상은 남의 앞으로 온 우편물을 멋대로 폐기하는 게 상식이야?"

"그건···, 전에 사과했잖은가···."

내가 상식을 운운하며 한 말이 자기 얘기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세르펜스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불쌍한 척했다.

녀석이 연기하고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이미 사과를 받았던 문제를 다시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다.

나는 씩 웃으며 농담이라는 말과 함께 세르펜스의 등을 툭 치며, 녀석의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공깃밥 그놈이 펠로 왕국의 8왕자란 말이지? 즉, 펠로 왕국에는 왕자만 최소 여덟 이상 있다는 건데···. 공주는 또 몇이나 있으려나?'

벌써부터 콩가루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르펜스가 초전자의 신분이 귀족일 거라고 추측한 이유도 알 것 같다.

얼굴을 가려 놓았는데,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것도 아닌 왕족을 알아볼 정도라면 당연히 귀족이겠지.

그것도 최소 중앙 진출에 성공한 고위 귀족일 테다.

"그런데 악마 숭배 세력은···. 아니다, 나도 이제부터는 악숭 세력이라고 부를래. 사실 예전부터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선우를 제외하면 다들 악마 숭배 세력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니까, 나만 악숭 세력이라고 부르기 민망해서···. 하하하!"

푸로르가 머쓱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줄임말 동지가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아서 기쁘다. 이게 모두 리에나의 공이다.

"아무튼 악숭 세력 놈들은 8왕자를 끌어들여서 어쩔 생각이었던 걸까? 8왕자면 왕위 계승 서열도 한참 낮을 텐데, 끌어들인다고 도움이 되나? 게다가 하는 행동이 한량 같았다며? 그렇다면 밀어주는 귀족들도 얼마 없을 텐데?"

"아마 진짜로 노리는 건 8왕자의 동복형제인 1왕자일 거야. 그 둘은 서로에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우군이거든."

휴마누스가 황태자 같은 말로 푸로르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어진 그의 설명에 의하면 펠로 왕국의 국왕은 첩을 다섯이나 들였다는 모양이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왕비의 가문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데,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그 부분은 스킵을 부탁했다.

"많은 자식들 중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왕비 소생의 2왕자와 왕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의 자식인 1왕자야. 하지만 압도적인 차이가 있는 건 아니라서, 다른 후궁 소생의 자식들도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라나 봐."

예상은 했지만, 펠로 왕실은 역시나 콩가루 집안이었다.

휴마누스가 8왕자와 1왕자는 서로에게 유일한 우군이라고 말한 이유를 잘 알 것 같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8왕자가 그 치열한 경쟁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피가 온전히 이어진 형을 밀어주고 우애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었겠지.

형인 1왕자는 그런 동생의 도움이 기꺼울 테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침 휴마누스의 입에서도 그 얘기가 나왔다.

"···해서 8왕자는 1왕자가 체면 때문에 어울릴 수 없는 이들과 대신 어울리며, 친분을 쌓아서 지지를 얻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들었어."

역할 분담이 참 확실한 형제다.

아무튼 휴마누스의 말대로라면 공깃밥의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한량 같은 말투와 태도가 이해된다.

형이 이미지 관리 때문에 거리를 두는 껄렁한 친구들만 사귀고 다녔을 테니 그럴 수밖에.

"제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살롱이 악숭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1왕자가 알게 되어, 그자들의 도움을 받아내고자 8왕자를 가면 무도회에 보낸 것은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떠올라서···."

매우 중요한 사안인 만큼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공깃밥이 악숭 세력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녀석이 리에나의 보고를 자세히 듣고자 한 건.

가면 무도회를 연 것이 악숭 세력의 짓이라는 사실을 공깃밥이 알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나 보다.

"동생은 형을 왕위에 앉혀 주려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데, 그런 동생을 악숭 세력의 아가리에 밀어 넣어?!"

"정말로 그런 거면 개새끼네요! 그런 게 아니어도, 이미 동생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뒀다는 것부터가 개새끼예요!"

친동생은 아니긴 해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려고 하는 동생 아니마가 있는 까닭일까?

조용히 있던 에드나가 흥분해서 '개새끼'라는 말을 연발했다.

어제 무도회장에서 들었던 에드나의 '개자식이 좋더라!' 선언이 떠올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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