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05화 (805/925)

805회

84. 공작님과 살롱 (3)

"저는 오로지 여기 이 숙녀분만을 위한 개자식이 되기로 했으니, 제가 아무리 귀여워도 탐내지 말아 주세요!"

"하···! 당돌하기까지 하다니, 더더욱 마음에 드네요. 듣자 하니 그런 취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개가 되길 자처했다고 하던데. 저쪽보다 더 많은 돈을 지원해 줄 테니, 내 밑에서 짖어 볼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섬뜩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본의 아니게 저 사람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 버린 모양이다.

가면 아래로 식은땀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주군, 정말로 이런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주군이 희롱을 당하고 있는데 호위 기사가 가만히 있으면 설정 오류다.

그렇기에 만약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에드나보다 윈스톤이 먼저 나서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로 정해 두었다.

다행히도 윈스톤이 그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이다음에 내가 해야 할 대사는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았지만.

나는 이대로 윈스톤에게 보호받으며, 저 무서운 사람을 치워달라 요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미리 얘기했잖은가.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고 싶어?!"

이 와중에 이런 오글거리는 말투를 구사해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프기까지 하다.

남이 이런 말투를 쓰는 걸 듣기만 했을 땐 아무 느낌 없었는데. 내가 말할 땐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를 주군으로 불러야 하는 이 상황이 어색한 건 윈스톤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래도 윈스톤은 미리 정해둔 대본대로, 분하다는 듯 '크윽···!' 하는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두 주먹을 꽉 움켜쥐는데 천생 연기자가 다 되었다.

시종 역을 맡은 세르펜스는 그 옆에서 묵묵히 서 있었는데,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요구한 거다.

이 녀석은 정도를 몰라서 또다시 '신관 프레이 짓'을 할까 봐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지금은 잘 참아주고 있으나 세르펜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설정 보여주기는 이쯤 하면 됐으니, 어서 치한을 떼어내야겠다.

"이것 참, 제가 이런 쪽에서 생각보다 수요가 많은 타입인가 봅니다?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원래 주인 있는 개를 데려가고 싶을 때 개 주인이 아니라 개에게 의사를 물어봅니까? 진짜 개라면 안 그럴 텐데, 사람은 좀 다른가요?"

"개자식 주제에, 말 한번 잘 했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엄연히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이곳 살롱의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가요?"

아직 대사 처리가 익숙하지 못한 에드나가 문장을 짧게 끊어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고 중간중간 쉬어가는 타이밍마다 숨을 크게 들이켠 덕택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느라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돈으로 남의 파트너를 사려고 하다니···. 정말 격이 떨어지네요."

"자라나는 새싹을 뽑아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의 파트너를···."

"앞으로 살롱에서 매번 만나야 하는데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맙시다."

악숭 살롱에서 교양과 예의를 찾는 모습이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어쨌거나 귀족들은 나와 에드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딴 것에 보람을 느끼기 싫은데, 미리 자료를 보고 공부해 둔 보람이 있다.

"이런! 그냥 오랜만에 온 신입이라 잠깐 놀려주려던 것뿐인데, 다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시네요! 하지만 실례한 건 맞으니까 사과할게요. 이제 됐죠?"

나를 희롱했던 치한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과한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했다.

에드나는 말없이 그 치한이 있는 방향으로 잠시 고개를 고정해 뒀다가, 고개를 홱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어디 앉아야 하지···?'

주변을 죽 둘러보니, 강아지나 하고 다닐 목줄을 목에 걸고 바닥에 앉아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귀족 복장을 한 사람은 없고 시종이나 시녀뿐이었지만.

일단 같은 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듯하니, 나도 바닥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드나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가면 무도회 이후로 따로 만나셨나요? 개가 주인을 아주 잘 따르네요."

처음에 에드나를 치켜세웠던 붉은 브로치를 한 여인이 퍽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진짜로 나를 개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따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어···, 저도 의문이네요."

둘러댈 말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에드나가 나에게 바통을 넘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에드나의 '그런 취향 설정'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를 보호할 생각만 했지, 내가 한 번 만난 에드나를 지나치게 잘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걸 간과했다.

나는 일단 '그게···.' 하고 운을 떼 놓고 망설이는 척하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저는 이런 거 처음이잖습니까? 아무래도 무서워져서 말이죠···. 저분은 돈을 대가로 저에게 너무 무리한 걸 시키실 것 같기도 하고···. 누님은 제게 안 그러실 거죠?"

기왕 꼬리 잘 흔드는 개새끼가 된 김에, 나는 에드나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애교 있게 말했다.

검은 베일 안쪽으로 얼핏 검은 립스틱을 바른 에드나의 입술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우리 누나도 내가 애교를 부리면 일단 인상을 구기고 봤다.

하지만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먹고 떨어지란 말과 함께 용돈을 던지거나 쥐여주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애교가 부족했다는 뜻이다.

나는 에드나를 향해 찡긋 윙크했다. 그러자 에드나가 베일로 덮인 얼굴을 다시 한 번 손으로 덮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애교 부리는 아니마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잃지 않길래 이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평소 작고 귀엽게 생긴 아니마가 애교 부리는 것만 보다가, 스물여덟 먹은 성인 남성이 이러고 있으니 되려 징그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에드나의 일그러진 입매를 본 사람은 나뿐이다.

귀족들은 에드나가 좋아서 저러는 줄 알고 하하 호호 웃어댔다.

아까 자라나는 새싹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마치 뉴비에게 호의적인 고인물 게이머들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비비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참석했던 살롱도, 공감대 형성을 통해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악숭 사상을 전파했다고 했던가?'

에드나가 사교성이 좋아서 이들과 친해진 건 줄 알았건만.

냉정한 눈으로 모두의 태도를 살펴보니, 저들이 기를 쓰고 친해지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개가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아무리 귀여워도, 그렇게 끌려다니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리드줄을 꽉 잡고 계셔야죠. 기껏 목줄을 걸어놓고 손잡이를 개의 입에 물려줘 버리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군요. 책으로 공부하긴 했는데, 아직 이론을 적용하는 건 어렵네요. 저만의 개를 가진 건 처음이라···. 너무 설레서 주체가 잘 안 되나 봐요. 유의할게요."

고인물이 조언을 건넸고, 에드나가 겸손한 학생의 자세로 대답했다.

그런 에드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선물을 주겠다며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아! 목줄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번 살롱에는 신입이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고, 가면 무도회에서 보았던 그분들이겠구나 싶어서 준비한 환영 선물이 있거든요? 받아주시겠어요?"

그 귀족의 시종이 고급 포장지로 감싼 무언가를 건넸다.

저대로 아니마 표 호로록 주머니에 쑤셔 넣어, 안에 든 물건을 영영 보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와, 와아···. 기뻐라···!"

"바로 뜯어서 써 보세요."

"세상에···, 너무 기대돼요···!"

에드나가 '저 그런 거 되게 좋아하는데!'라고 외쳤을 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포장지를 벗겨 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목줄이었다.

가죽 재질로 보이는데 왠지 모르게 금속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사실 테일러가 가져온 자료를 봐서 어떤 용도인지 알고 있지만, 모르고 싶다.

"저, 저기! 첫 목줄은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까, 기왕이면 누님께서 직접 고르신 거로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그게 좋겠네요! 죄송하지만, 이 선물은···."

내 의견에 에드나가 옳다구나 동의하며 흉한 선물을 되돌려 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준 사람은 입가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손을 내저으며 반환을 거부했다.

"이미 드린 선물이니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예비용으로 가지고 계시다가, 첫 목줄이 망가지면 써 주세요."

기껏 준비한 선물을 거부당한 것치고는 아쉬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직접 준비한 것이 맞기는 할까?

악숭 살롱 측에서 저 망측한 물건을 제공하며, 에드나에게 주라고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어쩌면 나를 희롱했던 치한도 미리 준비된 악역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머지 인원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이곳이 이렇게나 따뜻한 곳이야. 우리는 모두 네 편이란다. 고맙게 여기렴.'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내 추측대로 기존 살롱 멤버들이 우리보다 한 시간 이상 빨리 모인 거라면, 지시 사항을 전달받고 역할 분배를 끝내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미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확인을 하기 위해 에드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누님. 앞으로는 누님보다 일찍 도착하고 싶어서 그런데, 누님은 언제 도착하셨어요?"

"그쪽이 오기 15분 전쯤···?"

"그쪽이라니, 호칭이 너무 딱딱하잖습니까? 동생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나저나 엄청 부지런하시네요!"

"시간 계산을 잘못했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길이 많이 짧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그쪽이 보관하고 있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동생이 쓸 물건이고."

에드나가 대답과 동시에, 결국 돌려주지 못한 징글맞은 물건을 슬그머니 내게 건네려 시도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누님이 사 준 목줄도 아직 없는데, 다른 사람이 사 준 목줄을 갖고 있는 건 싫습니다. 그보다 제가 오기 15분 전이면, 초대장에 적힌 시간보다 무려 25분이나 일찍 도착한 거 아닙니까? 그럼 일등으로 도착하셨겠네요?"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분들이 전부 도착해 계셨어요. 새로운 사람들이 오니까, 잘 대해주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대요. 그리고 목줄은···. 네, 제가 보관하는 게··· 낫겠네요."

에드나가 패배를 시인하며 다신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을 자신의 핸드백에 넣었다.

손에 계속 들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튼 일부러 우리를 늦게 부른 게 맞는다는 얘기지?'

답이 딱 나왔다. 역시나 저쪽 또한 우리를 상대로 연극을 펼치고 있었다.

우리야 어차피 이곳이 악숭 살롱이라는 것을 알고 왔으니, 연극이든 진심이든 감화되지 않았을 테지만.

악숭이들이 살롱을 굴리는 수법을 파악해 뒀다가 정리해서 배포하면, 피해자가 조금쯤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는 그때, 무시무시한 얘기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부인은 직접 누군가를 결박해 본 적 없죠?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한번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겨, 결···. 그, 그걸 지금, 여기서요?"

"네, 지금 여기서."

"그렇고 그런 건 나중에···. 동생과 둘만 있을 때 조용히 즐···기고 싶은데···."

"그런 위험천만한 소리 하지 마시지요. 초보자들은 결박이라고 하면 그냥 묶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위험천만한 소리를 하는 건 에드나가 아니다.

사람을 밧줄로 이리저리 꽁꽁 묶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설명을 쏟아내고 있는 저놈이 제일 위험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세르펜스의 귀를 막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막아 봤자 녀석의 청력이면 다 들리려나? 그렇다면 세르펜스의 귀에다 대고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떠들어 주고 싶다.

저 설명을 듣지 못하도록.

에드나는 미리 준비해 온 거절 대사들을 꺼내려 해 봤지만, 결박 집착 설명충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대며 거절을 원천봉쇄 했다.

혼이 쏙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때, 나와 에드나를 구해준 이가 있었으니···.

"호, 혹시 여기는 그런 취향이 모이는 장소였어?! 그렇다면 나는 잘못 초대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요?"

공깃밥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에 소심하게 '요'라는 말을 덧붙여 존댓말로 바꾼 탓에 더 가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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