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회
84. 공작님과 살롱 (4)
'아무리 봐도 연기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애초에 겁에 질린 연기를 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는 건 공깃밥은 이곳이 악숭 살롱이라는 걸 모르고 왔다는 게 되나?'
공깃밥과 1왕자 측이 예비 악숭이였다면 일이 귀찮아졌을 텐데,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여차했을 때 공깃밥과 그의 시종을 추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게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공깃밥이 데려온 호위는 왕실 소속 기사일 테니까, 우리 일행들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실력자일 터.
두 명 정도는 충분히 지킬 능력이 되겠지.
"하하하! 여기 계신 회원분들이 전부 그런 취향인 건 아닙니다."
"그런 것치고는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던데···."
결박 집착 설명충. 줄여서 결집충이 웃으며 그렇지 않노라 말했지만, 공깃밥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결집충은 조금 전까지 그런 취향에 관하여 누구보다도 신나게 떠들어 댄 사람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결집충의 말이 미심쩍다.
"그럴 수밖에요. 상대가 가진 욕망이 그 무엇이든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살롱의 규칙이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어디까지나 이쪽 취향에 입문하려는 분이 둘이나 계셔서, 다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니 그렇게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과 몇 분 전에 나를 묶어보는 게 어떠냐고 에드나에게 제안했던 주제에, 결집충이 점잖은 척하며 공깃밥을 안심시키려 들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보였는지, 공깃밥의 입술이 마치 '으' 발음을 하듯 좌우로 길게 늘어났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도 꺼림칙한 감정을 저리도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저것도 재주다.
"저쪽 신사분은 처음 오신 분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가 익숙지 않아서 난처하신 모양이니, 지금부터는 다른 주제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서로의 욕망을 존중해 주는 것이 기본적인 규칙이긴 해도, 처음 오신 분은 그런 게 아직 어려울 수밖에 없잖습니까?"
"저도 기존 회원인 우리가 신입분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귀족들의 가면을 쭉 훑어봤다.
조금 전 치한 때문에 나와 에드나가 곤란해졌을 때 우리의 편을 들어줬던 사람들이다.
추측건대 저 세 사람이 '신입 길들이기'에서 당근을 주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닐까 한다.
그런 그들의 말에 다른 살롱 참석자들이 하나둘 동의를 표했다.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하려고 고의로 공깃밥을 대화에서 배제한 거려나?'
공깃밥은 살롱 참석자들의 취향에 불쾌함을 드러낸 반면.
그들은 공깃밥을 배려해 주겠다고 나섰다.
그 행동에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양보해 줬는데, 정말 무례하게 이대로 집에 갈 거야?'라는 속내가 깔려 있었다.
결국 공깃밥은 발길을 돌리는 대신에 두리번거리며 앉을 자리를 물색했다.
일단은 좀 더 두고 볼 심산인가 보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동기끼리 모이자!"
"나보고 바닥에 앉으라고?!"
"누가 내 옆에 앉으래? 여기, 비였잖아."
놀라서 펄쩍 뛰는 공깃밥을 향해 그리 말하며 나는 에드나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나를 위해 비워둔 모양인데, 내가 바닥에 앉는 것을 택하면서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던 자리다.
바닥이 아닌 소파를 권했는데도 공깃밥은 발에 못이라도 박힌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재 에드나의 설정은 '그런 취향이 아닌 사람을 그런 쪽으로 조련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공깃밥은 자신이 그런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에드나의 옆자리를 피하고 싶을 만도 하다.
하지만 공깃밥이 예비 악숭이가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아진 지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깃밥을 내 주변에 두고 싶다.
그렇게 해야 전투 시, 공깃밥이 인질로 잡혀 버리거나 사고로 죽어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으니까.
'뭐라고 말해야 공깃밥을 에드나의 옆에 앉힐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공깃밥의 시종이 공깃밥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그러자 윈스톤처럼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자신의 호위 대상에게 귓속말을 했다.
심지어는 에드나의 뒤에 서 있던 푸로르도 에드나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남색으로 염색한 푸로르의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넘어왔다. '더치 땋기' 방법으로 한데 땋아 놓은 까닭에, 사르륵 흘러내렸다기보다 무게감 있게 툭 하고 떨어진 느낌이다.
'리에나가 앞머리를 벼머리 형식으로 땋고 다니던데, 리에나의 작품이려나?'
잠시 푸로르의 낯선 헤어 스타일에 시선이 가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들 귓속말을 받고 있는데 어째서인가 내 두 귀만 자유롭다.
세르펜스의 기사로서 일할 땐 무슨 일이든 열심히 했던 윈스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 뭐야? 왜 나만 귓속말을 못 받는 건데? 기사 1호, 월급 좀 밀렸다고 일 똑바로 안 하지?"
"끄응···."
윈스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와서 웅크리듯 앉았다.
커다란 덩치로 그러고 앉으니 균형 잡기 힘들어 보인다는 건 둘째 치고, 주군 앞에서 취할 자세는 아니다.
진짜 주군인 세르펜스가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 꿇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설정 오류다.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나는 그의 무릎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그제서야 윈스톤이 마지못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내게 귓속말했다.
"주군···께서는 돈 때문에 개가 되길 자처하고 있을 뿐이니. 만약의 경우에는 주군을 매수하여 함께 힘을 합쳐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되도록 주군의 근처에 앉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공깃밥의 시종이 무슨 얘기를 한 건가 했더니, 위기 시 도주 방법에 관한 조언을 건넨 모양이다.
나는 윈스톤에게 이제 일어나도 된다고 손짓하며 공깃밥의 시종···.
대충 공시종이라 하자. 아무튼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자신의 말이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음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왕족이 아니라 그 누구의 시종 노릇도 할 수 없다.
다행히도 공시종은 휴마눈새처럼 괴멸적 수준의 눈새가 아니었다.
공시종은 안절부절못하며 가면을 쓴 입가로 손을 올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유는 다르나 공깃밥을 내 곁에 두겠다는 목적은 나와 같으니 거들어 줘야겠다.
"나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인맥과 누님의 전남편이 남긴 전 재산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 그보다 더 많은 걸 줄 수 있다면 어디 매수해 보든가?"
"내 집안이 그 정도로 대단한 귀족 가문은 아니라서 그건 좀 힘들겠는데? 그래도 너라면 돈을 빌려달라고 할지언정, 이상한 것을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저 누님도 네가 있는데 나한테까지 뭘 어쩌지는 않을 테···고?"
비록 마지막에 가서 살짝 쫄긴 했지만.
유력한 차기 국왕 후보 중 하나인 1왕자와 혈연으로 끈끈하게 엮여, 재력과 인맥을 모두 갖춘 공깃밥이 짐짓 능청스레 말하며 에드나의 옆에 앉았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여차하면 나를 매수할 생각이겠지.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받은 모양이네요. 저희 중에 사디즘 성향이 있는 분들이 많긴 하지만, 이게 그렇게 괴상하고 희귀한 건 아닌데."
에드나에게 목줄을 선물했던 귀족, 이하 목선족이 도무지 공깃밥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와 공깃밥도 평생 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권력과 흡사하지 않아요? 경쟁자를 짓밟고 올라서거나, 약자를 내려다보면 짜릿한 쾌감이 든다는 점에서요.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에요. 다만 그 가학성을 사회 전체로 고루 퍼트리느냐, 개인에게 집중하느냐. 그 차이일 뿐이죠."
누군가는 목선족의 저 말에 동의를 표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추한 헛소리로 치부하며 한 귀로 흘렸다.
정치란 무릇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강제력이 필요하기에 생겨난 것이 권력이다.
'그런데 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갈 정치가인 귀족이 저딴 소리를 지껄여?'
저런 글러 먹은 인간은 권력의 정의를 다시 배워야 한다.
아니, 그냥 평생 권력을 쥐여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평안을 고루 도모하는 길이다.
문득 이 펠로 왕국의 왕족인 공깃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저 말에 동의해?"
"글쎄?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던데···."
살기 위해 형인 1왕자를 돕고 있기는 하나, 권력을 휘두르는 것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걸까?
공깃밥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리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목선족은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질문했다.
"권력에 큰 욕심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렇다면 신사분의 욕망은 무엇인가요?"
"음···, 딱히 없는데···."
"그럴 리가요. 분명 그 어디에도 터놓지 못했던 욕망이 가슴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겁니다.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죠."
"······."
여전히 생각나는 게 없는 걸까? 아니면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뿐일까?
공깃밥은 말없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묵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만일 얘기하고 나서 후회가 된다면, 다음부터는 살롱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이고요. 그리고 저쪽 신사분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는 모두의 욕망을 존중한답니다. 그것이 남들의 시선에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로 아주 작은 바람이든, 남들이 추악하다 손가락질할 어두운 야욕이든."
어떻게든 공깃밥의 욕망을 캐내고 말겠다는 듯, 목선족이 결집충을 가리키며 세 치 혀를 놀려 공깃밥을 부추겼다.
그 태도가 무척이나 집요해 보였다.
그만큼 목선족을 비롯한 악숭 살롱 참석자들에게, 공깃밥의 욕망을 알아내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거겠지.
'욕망을 알아야 그것을 미끼로 내걸어 거래하든, 그 부분을 파고들어 악숭 사상을 전파하든 할 테니까.'
나로서는 공깃밥이 계속 입을 다물어 주는 게 좋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다는 말과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안 봐도 된다는 말.
그리고 그 어떤 욕망을 꺼내 보여도 존중해 주겠다는 말에 공깃밥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건 넘어갔네.'
그 누구라도 흔들릴만한 얘기였다.
특히나 남에게 속마음을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공깃밥은 자신이 데려온 공시종과 공기사를 힐끔대며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그 두 사람이라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편히···, 살고 싶달까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냥 마음 편히. 살고 싶습니다. 하하! 별거 없죠? 그저 편하게 놀고먹는 삶을 바랄 뿐이라니."
공깃밥이 무안하다는 듯 공연히 웃으며 자신의 진짜 바람을 얼버무리려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눈치챘을 거다.
두 번 반복된 살고 싶다는 말 앞에 끼어든 기묘한 공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