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13화 (813/925)

813회

84. 공작님과 살롱 (11)

'이런 허술한 교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건, 악숭 살롱 참석자들이 마약성 축복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한 번만 들어도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꽤 많았다.

내게 사제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며 한 문장씩 뜯어볼 기회만 주어진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개소리를 집약해 놓았을 뿐이라는 걸 증명할 자신도 있다.

그런데 나름대로 배운 사람들이라는 귀족들마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룩스메아를 욕하며 자유를 부르짖고 있었다.

마약성 축복 때문에 환락에 빠져 판별력이 마비된 까닭이다.

사제는 '나쁜 건 신 룩스메아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건 오직 마신 테네브리오 님뿐.'이라는 말을 문장 구조만 바꿔가며 반복했다.

이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행위였고, 환희에 젖어든 민숭이들은 사제의 말을 진리처럼 떠받들었다.

"이래저래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오늘 가르침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드디어 기나긴 개소리 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축복의 마약 효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민숭이들은 아쉽다는 듯 탄식을 흘리면서도 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암흑의 신성력에 관한 얘기는 안 해주시는 겁니까? 이제까지 보아온 신성력에는 저런 효과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봐서 내심 궁금했는데···."

"들어보지 못했을 만도 하지요. 그게 룩스메아 교단이 거짓된 신을 모시는 집단이라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자아를 일깨워 억눌려 있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모시는 사제들뿐입니다."

변성력에 관해 설명해 달라니까, 사제가 마왕을 운운하며 딴소리를 해댔다.

접근 방법을 바꿔서 다시 물어봐야겠다.

"그럼 다른 색 신성력을 타고난 분들도 그분을 모시면 사제님과 같은 능력을 쓸 수 있게 되는 겁니까? 금빛, 은빛, 흰빛을 사용하는 사제님들도 있어요?"

"···저는 어둠의 신성력을 타고났지만, 빛의 신성력을 타고난 이들도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모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색이 유지되는 건 아닙니다. 진심으로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믿고 따르면 신성력이 자연히 어둠을 띠게 되지요."

"타고난 신성력의 색은 바꿀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암흑의 신성력이 빛의 신성력보다 상위의 것이자, 신성력의 본모습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신 테네브리오 님이시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유일신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죠."

즉각즉각 대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즉석에서 설정을 짜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변성력에 관해 질문해 봤자 진실한 답변은 듣지 못할 성싶다.

악마를 처리한 후에 제압해 놓고 물어보면 그때는 진실을 말해 주려나?

"으흠! 그보다 예비 신입님께서는 오늘의 가르침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사제가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더 이상 내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차피 나도 질문을 그만할 생각이었으므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기로 했다.

"상식처럼 배워온 지식과 사뭇 달라서, 좀 더 곱씹어보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다시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내일 아침까지 생각을 잘 정리해 두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로 이 살롱을 엎어버릴 예정이니, 사제가 악숭 설교에 관한 내 감상을 듣게 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제는 너그러운 말투로 내일을 기약했다.

"왕자 저하께서는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

목숨 귀한 줄 아는 밥은 사제의 물음에 침묵을 택했다.

개소리 같았다는 솔직한 감상평을 말하자니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두렵고.

그렇다고 마왕을 향한 신앙심이 생겨났다며 아첨을 한다면, 되려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일 테다.

내가 감상평을 내일로 미룬 것도 바로 그래서다.

사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드나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신입 신도님께서는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이런 엄청난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니, 정말, 안타깝고···.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 같아서 기쁘고···. 아, 아아-! 어서 하루빨리 마신님께서 강림하시어, 모두가 욕망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유, 자유롭게 말이에요!"

적당히 말을 마무리 지으려다가 뒤늦게 중요한 키워드를 빠트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에드나가 다급히 자유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그러자 사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대로 된 감상평을 들을 수 있어서 기쁜가 보다.

"저기, 그런데···. 이게 끝인가요? 사제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이었지만···. 이대로는 뭔가 아쉬운데···. 가령 제물을 바쳐 악마님을 소환한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피를 볼 수 있는···. 특별한 의식을 기대했는데···."

에드나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만큼 맞춰 줬으니 슬슬 악마를 데려오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빨리 악마와 싸운 후 쉬고 싶다는 에드나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매번 특별한 '피의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 피의 의식···! 듣기만 해도 정말, 짜릿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명칭이네요!"

"신입 신도님께서는 대단한 행운을 거머쥐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생각하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 이곳에는 악마님께서 와 계시거든요."

사제가 대단한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리깔며 조곤조곤 말하였다.

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안이었지만,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놀란 척을 해야겠지.

나는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헛바람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허, 허억! 아, 악마···."

"뭐어?! 악마가 이곳에 있었단 말이냐?! 어, 어째서 이런 곳에 악마가···! 크윽, 처음부터 도망 따위는 불가능했던 건가···? 그걸 이제야 밝히다니···. 헛된 희망을 품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즐거웠겠구나."

밥에게 리액션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놀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좌절과 분노를 담아낸 밥의 독백을 들으며, 나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진실된 반응은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제는 절망 어린 밥의 얼굴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아직도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민숭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이건만, 사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신입 신도님께서 위층에 가셔서, 하이마 님을 모셔 와 주시겠어요?"

"네, 넷, 네에?! 제, 제가요?!"

"보시다시피 다른 신도님들은 아직 축복의 여운에 젖어 계시는지라···."

악마라면 당연히 청력이 뛰어날 테니까,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전부 듣고 있을 텐데.

굳이 모시러 가야 내려오다니 예의를 엄청 따지는 놈인가 보다.

하긴 그러니까 침을 질질 흘리는 민숭이들에게 모셔오라고 시킬 수 없어, 신입인 에드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거겠지.

'곤란한데···.'

에드나 혼자 악마를 만나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마력을 꼭꼭 숨기고 있어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에드나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챌 소지가 다분하다.

악마가 방심하여 에드나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새로 온 신입의 피 맛이 궁금하다며 다짜고짜 달려들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세, 세상에! 저, 저에게 그,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맡겨 주시다니···! 하, 하아···. 너무, 너어무 가슴이 벅차올라, 과호흡 증상이···. 허억, 허억···! 아, 아아···, 어쩜 좋아! 악마님을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흥분되는데···. 단독으로 뵙고, 직접 모셔오기까지···! 아앗!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서, 다리에 힘이···! 흑, 흐으윽···. 아흐흑···!"

에드나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여 과장연기를 펼치다 말고, 돌연 풀썩 주저앉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드레스를 움켜쥔 에드나의 손등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본 사제의 얼굴이 떨떠름함에 물들었다.

"···그냥 제가 모셔올 테니, 예비 신입분들을 잘 감시하고 계세요."

"흑, 흐윽! 네, 네에···. 아 씹···지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다음, 다음에 다시 기회를 주시면···!"

"······."

더 이상 에드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사제는 말없이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그래도 에드나는 울음을 멈추기는커녕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어차피 네가 기사를 빌려줬더라도, 탈출은 불가능했겠지. 그러니까 더는 원망하지 않을게."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 밥이 힘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혼자 탈출하도록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태껏 꽁해 있었을 줄이야.

비록 성격은 쪼잔하고 치사하지만, 이렇게 먼저 사과하며 화해를 신청하는 걸 보면 아주 글러 먹은 놈은 아닌가 보다.

"이해해 드릴게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죄다 미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건 네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저 여자니까 조심해. 다른 사람처럼 축복인가 뭔가 하는 걸 받은 것도 아니고, 제정신으로···. 아니, 저걸 제정신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상시에도 저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직자를 상대로 부도덕한 상상을 즐기는 정신 나간 여자잖아?"

"······."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개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봐. 그나마 네가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서 이렇게 충고해 주는 거야."

"어···, 음. 충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밥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에드나가 우는 정도를 넘어 통곡하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데, 민숭이보다 더 정신 나간 여자라는 평을 들어버렸으니.

곡소리가 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 걸까?

리에나가 옆에 붙어 앉아 에드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아~, 정말 시끄럽네. 하찮은 미물 주제에 내 귀를 어지럽게 하다니, 저 인간은 대체 뭐야?"

목놓아 우는 에드나의 곡소리를 뚫고,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용하는 단어만 들어 봐도 방금 말한 목소리의 주인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피를 연상케하는 검붉은 망토를 몸에 두른 채, 계단을 내려오는 악마의 생김새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인간과 다른 부분을 찾아보자면 뾰족한 귓바퀴 정도?

그나마도 엘프처럼 귀가 긴 것도 아니고, 그냥 윗부분이 뾰족한 게 전부였다.

몇 달 전 바다에서 보았던 두족류 악마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악마는 상급이 넘어가면 인간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고 하니까.

이제까지 보아 온 악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적일 테다.

"새로 온 신입인데,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향한 신앙심이 기존 신도들 못지않습니다. 지금도 하이마 님을 만나 뵐 생각에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건 갸륵하지만,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시켜."

악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자와 함께 위층에서 내려온 법숭이가 마법진을 그렸다.

설마 에드나를 공격하는 건가 싶어 긴장한 것도 잠시.

에드나와 그녀를 위로하던 리에나의 주위에 반투명한 검은색 막이 펼쳐졌다. 그냥 평범한 방음 마법이었다.

'설마 저 악마, 1층에서 오가는 대화를 하나도 듣지 못한 건가? 방음 마법을 펼쳐 놔서? 그것도 고작 시끄럽다는 이유로?'

어처구니없었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다.

흑마력의 기운이 일종의 가림막 역할을 해 줄 테니까.

악마가 작정하고 에드나와 리에나를 살펴보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의 마력과 신성력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그리고 세르펜스는 그런 가림막 따위 없이도 알아서 기운을 잘 숨기는 프로 은신러이며, 악마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적당한 타이밍에 기습을 가해 악마에게 큰 상처를 입히면, 휴마누스가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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