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회
84. 공작님과 살롱 (13)
나는 악마가 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얘기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러할 게, 모든 정황이 저 하이마라는 악마는 흡혈귀 컨셉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마시는 게 아니라고요? 정말로? 그렇다면 대체 왜 잔에다가 피를 담는 겁니까? 인원수가 많으니까 일일이 깨무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다음 살롱이 열릴 때까지 나눠서 마시려고 잔에다가 피를 받은 거 아니셨습니까?!"
"···이놈은 대체 뭐야?"
악마가 미친놈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리며 사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받은 사제는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제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났으니, 악마가 만족할 만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뭐냐고 묻고 싶은 건 오히려 접니다! 콱 하고 목덜미에 박아 넣어서 피를 내는 용도가 아니라면, 그 날카로운 송곳니는 대체 뭡니까?"
"나한테 목덜미를 물리고 싶은 거였어?!"
"그리고 그 망토! 망토는 왜 몸에 두르고 다녀서 사람 헷갈리게 합니까?! 제 기대가 박살 나 버렸으니 책임져 주세요!"
"망토는 아무 상관 없잖아?!"
망토야말로 흡혈귀의 트레이드 마크이거늘.
아무것도 모르는 악마가 되려 언성을 높이며 내게 따졌다.
너무나도 억울하다. 이렇게나 감쪽같이 나를 속여놓고 이제 와서 모든 것이 훼이크였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내가 왜 오늘 처음 보는 인간 놈과 이러고 있는 거지···?"
악마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나야말로 오늘 처음 보는 악마 놈과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순순히 다가와서 세르펜스의 공격에 당해줬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고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쳇!' 하고 혀를 차고 있자니, 얼빠진 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피학적인 취향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네, 없어요."
"그럼 송곳니 페티쉬라도 있는 거야?"
이 자식이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아무리 세르펜스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그렇지.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도 '쟤는 (스물)일곱 살 어린아이인 것 같으니까 말을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안 드나?
나중에 순수펜스가 페티쉬의 뜻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걱정이다.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가 악마 숭배 세력에 몸을 담는 건 확정된 사항이잖아요? 그렇다면 기왕지사 악마님께 잘 보여야죠! 그래야 뭐라도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제님과 흑마법사님에게 집중 관리를 받게 될 왕자 저하는 평생 가도 모르실 겁니다! 별 볼 일 없는 자의 서글픔을!"
"보나 마나 고문과 치료를 병행하며 세뇌당할 게 뻔한데, 그딴 집중 관리가 대체 뭐가 부러워서···."
"닥쳐! 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악마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만다! 칼이든 송곳니든 결국 찔려서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귀하신 분에게 내 몸을 맡기겠어!"
내가 그렇게 외친 순간, 악마가 주춤거리며 반보 뒤로 물러났다.
설마하니 내가 기분 나빠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냥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었더니 자세가 불편해졌나 보다. 이런 걸 두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는 거겠지.
"···그래, 너도 저 여자 못지않게 미쳤다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네. 젠장! 어쩌다 내가 이런 또라이들과 엮여서 이 고생을!"
"그게 왜 저희 때문입니까? 아까 흑마법사님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습니까? 오늘은 8왕자 저하가 오니까 평소보다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사제님께 조언하셨다잖아요? 저하는 그냥 정체를 들켜서 초대장을 받게 되신 겁니다!"
"뭐···?"
이제야 진실을 깨달은 건지 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악숭이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까 걱정하느라 법숭이의 말을 깊이 새겨듣지 못했나 보다.
그 맹한 반응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원래 똑똑함이란 상대적인 것이지.'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이리저리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 떠들어대면, 공포심에 머리가 굳어버린 밥과 비교되어 똑똑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악숭 세력은 인재만 보이면 스카우트를 하지 못해서 안달 난 집단이니.
적당히 머리가 잘 굴러가는 놈이라는 인상을 남기면 악마는 분명 내게 관심을 보일 거다.
"저하, 그거 아세요? 가면 무도회 초대장의 뒷면에 그려진 패턴을 보면, 미묘하게 다른 무늬 하나가 은근슬쩍 끼어 있다는 거. 가면 무도회 측에서는 그것으로 사람을 구분하여 살롱 초대장을 배부했을 겁니다. 저야 어차피 사업 투자를 받는 게 목적이었고 그러려면 신분을 밝혀야 하니, 그것을 알고도 상관없겠다 싶어서 그냥 참석했지만."
"잠깐, 하지만 나는···!"
"압니다, 다른 사람의 초대장을 가지고 참석하셨다는 거. 저하는 살롱 주인에게 관심이 많았잖아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곳에 초대받고 싶으셨겠죠. 만약 이 살롱이 다른 왕위 계승자를 지지하는 모임이라면 염탐을 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한 사교 모임이라면, 살롱 주인을 1왕자 저하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건 맞긴 한데, 어떻게 그것만으로 내가 남의 초대장을 가지고 참석했다는 걸 알았지···?"
밥은 딱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악마도 갑자기 벌어진 게릴라 추리 쇼가 흥미로웠는지, 나와 밥의 대화를 끊지 않았다.
"악마 숭배 세력에서도 오래전부터 왕자 저하를. 아니, 왕족 중 누구라도 좋으니 이 살롱에 모시고자 했을 테니까요. 양측 다 서로를 원했는데, 이제야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건 중간에 문제가 있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가면 무도회 초대장이 걸러져서 왕자 저하께 도착하지 못했고, 그래도 왕자 저하께서는 살롱 회원이 되고 싶으셨을 테니. 어떻게든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야만 했겠죠."
"아···."
"그리고 살롱 측에서는 엉뚱한 사람이 남의 초대장을 가지고 가면 무도회에 참석했으니, 유심히 관찰했을 테고. 체격과 입매와 눈동자 색 등 드러난 외양과 본래 초대장의 주인과의 친분 등을 고려하여, 저하의 정체를 알아챘을 겁니다."
"···내가 정말 생사람을 잡았네. 탓해서 미안하다."
이렇게 순순히 사과하는 걸 보면 태생적으로 나쁜 놈은 아닌데.
어쩌다 콩가루 집안에서 태어나서 이리저리 치여 살다가, 거기서 불행이 또 겹쳐 악숭 살롱 따위에 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내게 희생하라며 혼자 도망치려 했을 땐 정말 괘씸했었는데.
문득 그가 불쌍해 보여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이곳이 악마를 숭배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누굴 탓하는 게 아니라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며 자책하셨던 걸 보면, 1왕자 저하의 지시로 오신 건 아닌 듯하고···. 그냥 몰래 왔죠?"
"그···래. 네 말대로다. 형님은 이 살롱이 다른 형제 중 누군가를 지지하는 모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 내가 직접 참석하여 정체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며 걱정했지. 아마 내 앞으로 온 초대장을 가로채서 폐기한 건 형님의 지시였을 거다."
제 이득을 위해 동생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둔다길래, 동생 알기를 개떡으로 아는 놈인 줄 알았건만.
1왕자도 나름대로 인정이 있는 놈이었나 보다.
쓰레기들과 어울려 놀더라도 안전한 재활용 쓰레기통 안에서만 놀아라, 이건가?
"역시나, 그런 거였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 1왕자가 그랬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든 것에 통달한 척했다.
밥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울음을 꾹 참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의 말을 잘 들을 걸 그랬다며 후회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자기 때문에 형까지 위험해지게 생겼다며 미안해하는 걸까?
'펠로 왕실에 영 몹쓸 쓰레기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이 정도면 악마에게 눈도장도 찍었을 테니 더 이상은 깊이 파고들지 말자.'
조금 냉정한 얘기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밥 트리오의 목숨을 붙여 놓는 것까지다.
심지어는 이조차도 내가 아닌 내 동료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악마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악마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변태 같긴 해도 머리는 나름 쓸만해 보이네."
"고작 목덜미를 물어달라고 했을 뿐인데 변태라니, 너무하십니다!"
"도움이 될 것 같은 인간만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서 그냥 죽여버렸을 텐데···. 이딴 걸 정말 살려둬야 하나···? 인간은 쓸데없이 머릿수가 많으니까, 잘 찾아보면 대체할 만한 놈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
악마라는 존재가 눈앞에서 까부는 인간을 죽여도 될지 진지하게 갈등하는 걸 보면, 악숭 세력이 확실히 인력난에 시달리는 게 맞는가 보다.
"물리는 건 포기할 테니까 살려만 주세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혹시 제가 말을 바꾸니까 섭섭해지신 겁니까? 악마님도 역시 저를 물고 싶으셨구나? 하긴, 제가 어릴 때부터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깜찍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긴 했죠!"
"역시 죽여버려야겠어!!"
더는 못 참아 주겠다는 듯 악마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검붉은 액체가 꾸물거리며 악마의 손끝에 맺히는가 싶더니, 놈의 손톱이 주욱 길어졌다.
열 개의 손톱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당장에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다.
악마들은 속이 배배 꼬여서 나처럼 넉살 좋은 사람이랑은 짝짜꿍이 안 맞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잠시 악마와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리기는커녕 평온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악마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듯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단숨에 밧줄을 끊어낸 세르펜스가 쟁반 위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고 악마의 심장을 노렸다.
"크윽?!"
그대로 심장을 꿰뚫었다면 좋았을 텐데.
악마가 상체를 비튼 탓에 단검은 놈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반격을 하기보다는 상황 판단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악마는 다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세르펜스가 바짝 따라붙은 까닭에 둘 사이의 간격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공간 주머니는 어디에 넣어 놨소?"
갑작스레 시작된 전투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긴 사이.
윈스톤이 조용히 다가와 아공간 주머니를 찾았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느긋하게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거릴만한 사람은 나뿐인지라, 혹시 몰라서 세르펜스와 윈스톤의 무기까지 내가 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킷의 오른쪽 안주머니에 넣어 놨는데···. 잠깐만, 밧줄은 어떻게 푼 겁니까?"
나는 윈스톤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여전히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마력 구속구를 발견하고 화제를 바꿨다.
세르펜스가 악마에게 기습을 가하는 동시에 윈스톤의 밧줄을 풀어줬다고 볼 수도 없는 게, 그럴 여유가 있었다면 마력 구속구를 끊어 줬을 거다.
어차피 신성력으로 베는 거면 밧줄이나 마력 구속구나 그게 그거니까.
"그냥 힘으로 끊었소."
그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윈스톤은 내 상체를 묶은 밧줄을 뚝 끊어내고 상의 안쪽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갔다.
그리고 그걸 다시 내게 쥐여줬다.
- 쾅!
법숭이가 밧줄을 끊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윈스톤을 발견했는지, 다짜고짜 공격 마법을 날린 탓에 무기를 꺼낼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윈스톤은 나를 덜렁 들어 올리며 바닥을 박차 공격을 피해냈다.
세르펜스와 악마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던 악숭 기사들도 윈스톤에게 달려들었다.
마력 구속구를 차고 있어서 만만해 보였나 보다.